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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미로하지 말아요
이가은 저
시인동네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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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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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한낮은 오늘 혼자 있어•13/태어나 한 번쯤은 씩씩하게•14/이탈•15/기이하지만 무사해•16/한낮, 한낱 활기찬 가루 되기•17/나는 휴관일 문화예술회관처럼 비어 있다•18/회차지•20/우거진 생활•21/무음•22/정오 한 장 펼쳐 들고•23/금속음•24/한낮을 조곤조곤 읊조리고 있어•26/기다란 한낮을 가느다랗게 몰두해•27/한낮로빅•28/한낮 소등•30

제2부
낮 산책•33/그냥 한낮에 그냥 있기•34/투명 모스크•35/녹음이 짙은 한낮을 녹음했다•36/부재•38/잘카닥잘카닥•39/악센트•40/침수 식물•41/그저 그런 사람•42/조향•44/잠깐 자고 잠깐 깨면•45/거듭•46/무료 개방•47/휴식기•48/화상 연고에선 갓 끓인 보리차 냄새가 난다•49/폭풍이 몰려오면 오늘 밤 오로라를•50

제3부
한낮은 복작거리고 더없이•53/길 잃기 안내서•54/한낮 소곡집•55/뉴 시즌 론칭•56/안온•58/앞으로 척척 내디디면•59/그런 줄 몰랐다•60/그게 다 무슨 소용•61/무광층•62/한낮에도 석양이 어른댔음•64/나의 마리네이드•65/지금 여기에 없는 용기•66/다정한 성장•67/그곳으로 가는 지도가 정말 있는 것처럼•68

제4부
휴양•71/이름은 청페페•72/비상구•73/너무 멀리 온 파도•74/빛의 테두리•76/아무 미로하지 말아요•77/혼돈 정원사•78/눈사람엔 여름이 내렸다•79/낙담과 낙조 사이•80/잠옷은 잠옷 입은 나보다 활기차다•82/매몰자•83/실패 컬렉션•84

제5부
킥킥 별거 아닌 우린 컥컥•87/오라시온•88/청회색 반죽이 질컥 출렁일 때•89/나도 의자를 한 번은 무릎에 앉혀주고 싶었다•90/부식•91/사는 데 별 필요 없어요•92/미동•93/건너가는 월요일•94/액자 속으로 바람이 분다•95/저녁은 종이처럼 우리는 주름처럼•96/낱장에 날개 하나 달렵니다•97/진득이 들어준다면•98

해설 임지훈(문학평론가)•99

저자 소개 1

울산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무 미로하지 말아요』가 있다. 2026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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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25*204*8mm
ISBN13
9791158968045

책 속으로

모로 누워 천장에 너울대는 빛을 본다
한낮과 작은 방은 여러모로 나쁠 것 없고

오늘의 운세 총운은 혈혈단신 아닐까

휴대폰 내려놓고 빛이나 더 보기로
강철 하루 위에서 톱날이 돌아가지만

이리 와, 나랑 둘이서 빛 갖고 놀지 않을래?

우리에게 간절한 것 안쪽을 비춰보자
예배당 홀 가득 채운 기도의 소리 없음처럼

빛들이 수군거리면 작은 세계가 일렁여
― 「한낮은 오늘 혼자 있어」 전문

여기에 멈춰 선 지 얼마나 지난 걸까
미세한 움직임에도 온 신경을 기울이며
색조와 먼 바람 소리 그림자에 얽힌 향
나날의 대부분을 겁먹는 데 쓴다 해도
도움을 구하는 대신 스스로 너그럽다면
더 나은 구석이 없는 서로를 염려한다면

도끼로 내리찍는 꿈에서 깨어나도
빛은 쪼개지지 않고 때 탄 시폰커튼 틈으로
하루는 기이하지만 생동 속에서 무사해
두리번거리지 않고 찬찬히 살필 수 있길
열망을 영양제처럼 매일 복용하고 있어
헛되이 믿어보려고 잃은 길을 앓으며
― 「기이하지만 무사해」 전문


알약을 먹었는데 손에선 가루약 냄새
매일을 흩날리지 떠다니면서 붙들리지

가뿐히 길 잃을 수 있어
납 같은 낮 속에서

둔중한 쇠붙이들이 부딪히고 있는 걸까
창문을 열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손써 볼 틈조차 없이
손이 끼는 상상을

넌 왜 그 모양이니, 그런 말 듣고서야
손가락이 무사한지 구부렸다 펼쳐본다

다시는 구하지 못하는
낮이란 게 있었다

부주의로 잃어버린 귀한 너를 찾아봐
작고 낮은 목소리 이쪽으로 한번 가 보자

지도를 부적처럼 쥐고
사라지면서 여기 있어
― 「금속음」 전문


시집이 다 젖었다 덮개 없는 가방 속에서
갑자기 쏟아진 비에 쭈글쭈글 말려든 끝

내게도 바탕 있다면 종이의 결 있을는지

조금 못 쓰게 된 채 날아도 되는 걸까
움직이지 않고서 얼마나 더 갈 수 있나

빗물에 거꾸로 비친 그림자를 말리며

퓌요오 퓌요오오 흔들리는 몸을 느껴
서늘한 열기 속엔 밀면서 가는 이마 소리

날개 끝 깃털이 위로 구부러졌다 한껏
― 「길 잃기 안내서」 전문


점액질로 이뤄진 끈끈한 날 속에서
등껍질 가진 꿈은 잘 구부러진다는 걸

위로가 절실한 날엔 기어 볼 뿐 미로를

무심히 크루아상 베어 물어 보았지

거무레한 바삭을 반 쪼개면 뽀얀 내부

겹겹의 전환이 있는 그런 나를 기다려

긴긴날 떠돌던 새가 미로에 갇힌다면
여러 갈래의 길과 수많은 방을 갖겠지

어렵게 벗어나지 않고 헤쳐 나가기로 해
― 「아무 미로하지 말아요」 전문


잘 되다 잘 안 되다 그러고 있는 날엔
얼굴을 새장으로 갈아 끼우고 걸었어

촘촘히 복잡한 채로 물러나고 나아가

붐비는 잠잠 속에 가만한 나를 켜고
깃털을 끌어모아 빈 날개를 써 나갔지

드높이 웅얼거려도 들어준다면 진득이

한낮을 몰래 열어 나날을 돌봤을 뿐
온통 빛 되고 싶어 온갖 안달이니까

절반쯤 환한 책상에서 그저 했다 할 일을
― 「진득이 들어준다면」 전문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온통 휩쓸리는 동안에도
기척이라곤 없는 잠잠에 직면해 보려 했다.

어떤 것도 확신하지 않는
조용이 필요했다.

얼마간 중요했다.

2026년 10월
이가은

[해설 엿보기]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우리는 스스로의 하루를 돌아보곤 한다. 자신이 보낸 하루에 충만한 만족감을 느끼는 날도 더러 있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떠오르는 날이면 자신에 대한 성토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기도 한다. 오늘 나는 충분히 효율적으로 살지 못했다, 왜 시간이 더 걸리는 그 길로 갔을까, 아침에 다른 버스나 지하철을 탈 걸, 회의 시간에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등등. 이미 해버린 일과 미처 하지 못한 일을 떠올리며, 다른 선택을 했다면 하루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후회와 자책이 밤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낮의 시간 속에서 더 뚜렷하고 선명해지기도 한다. 가령 실직 등의 이유로 일터를 떠나 있게 된 사람에게 한낮은 더없이 가혹한 시간으로 경험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일하고 있는데 오직 ‘나’만이 아무런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 그 생각 속에서는 주어진 시간조차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와는 별개로, 자기 자신만이 하루의 바깥에 남겨진 듯한 감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낮이라는 시간은 그 밝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게 더욱 가혹해지는 역설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발밑의 그림자에 붙잡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시간, 오직 ‘나’ 혼자만이 마땅한 자리가 없다는 감각이 밝은 빛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밝은 빛 속에서 오직 자신의 발 디딘 곳에만 어둠이 존재하는 듯한 감각을 이가은은 『아무 미로하지 말아요』라는 시집을 통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다. 이 시집에는 더러 길을 잃고 흔들리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직 괜찮아지지 않은 몸으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밝은 빛 속을 헤쳐나가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이들에게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앞서, 지금의 자신을 조금이나마 돌보는 일이 절실하다.

남아도는 나 같은 건 어떻게 해야 할까
병든 현관을 열고 나아 보려고 걸었다

날씨가 너무 좋네요 지나가는 무리들

옷깃을 여밀 때면 열리는 것이 있고
햇빛이 오후 속을 피처럼 돌아다니니

한 번은 뻗어 나가자 어떤 길로든 우리

혈관을 가진 정오 한 장을 펼쳐 들 때
누가 좀 도와주세요 돌아봐도 아무도 없고

선캡을 푹 눌러쓴 채 땅만 보고 걸었다
― 「정오 한 장 펼쳐 들고」 전문

화자는 시의 첫 구절에서 자신을 “남아도는 나”라 표현하며, 자신이 필요한 만큼보다 더 많이 남겨졌다는 감각을 토로한다. 무언가 남아돈다는 감각은 어떤 필요와 쓰임을 기준으로 할 때만 성립된다. 쓸 곳이 없는 물건은 한쪽에 치워두면 되지만, 자신을 그렇게 여기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 필요와 쓰임이 없는 ‘나’에 대한 토로는 그렇기에 생활의 곤궁을 넘어 삶 자체를 존속하는 것에 대한 곤란을 드러낸다. 이 물음에서 ‘나’는 하루를 사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처리해야 할 대상이 되며, “나 같은 건”이라는 표현은 그 거리를 더욱 벌어지게 만드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여기에 있어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병든 현관”이라는 표현이다. 시의 구도를 생각해 볼 때, ‘현관’은 곤궁에 빠진 ‘나’와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통로를 수식하는 것이 ‘병든’과 같은 부정적 수식어라는 점은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화자의 우울한 마음을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면서, 그 마음이 세계와의 연결마저도 위태롭게 만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화자가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는 일에 앞서 무엇을 할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화자가 그 문을 열었다는 사실은 부담을 없앴다는 뜻보다, 그것을 지닌 채 자신을 바깥에 내놓음에 가까울 것이다.
― 임지훈(문학평론가)

[시인의 산문]

사람들이 마구 올라탄 인도 열차처럼
너무 좁은 내가 한둘이 아닌 나로 바글거렸다.

달리는 열차 위에 서서라도 갈 수만 있다면.

예감을 구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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