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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다리가 끝없이 길어진다면
강현숙 저
시인동네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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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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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사물의 시간•13/올리브 열매가 익어갈 무렵•14/의자는 의자 사이,•16/공존•18/후르츠•20/비가 내리는 나무•22/러브 하와이•24/달맞이꽃이 쏟아지네•26/매화 초옥•28/머루•31/코끼리 다리가 끝없이 길어진다면•32/눈먼 돌•38/얼룩 없는 얼룩 얼룩 안으로•40

제2부
비극의 형식•43/녹슨 신부•44/불완전한 눈•46/상실의 튤립•48/붉은노을의구체성에관하여•50/격렬히 아무것도 아닌•52/철물•53/회피의 세계•54/완벽한 여름•56/문•58/햇살 걸린 거미줄 사이를 통과하지 못하는 몸•60/천지 매화가 핀 벌판을 꿈꾸었지•61/벽•64/밖•66

제3부
배롱나무에서 핀다고 말하자•69/풀의 형식•70/너는 꽃이구나, 분명하게•72/해빙기•74/머물다•76/미래에도 없을•78/죽음의 형식•80/할미꽃 무덤•82/늪•84/살아가는 세계•86/모감주나무•88/금목서•90/죽은나무죽지않은나무•92

제4부
자귀나무꽃•95/흰 새•96/가시거리•98/붉은 열매•100/개기월식•102/최소한의 꽃•104/오래 지속될 꿈•105/얼굴 없는 당신•106/먼 사랑•107/물푸레나무•108/오렌지 향이 나지 않는 오렌지•110/패션후르츠에이드•112/공 하나가 튀어 오르면•114

해설 이정현(문학평론가·한국외대 교수)•115

저자 소개 1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자랐다. 부산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울산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2013년 『시안』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물소의 춤』 등을 펴냈다. 여름 소나무, 우물, 대나무숲, 겨울 빈 논, 마당의 한 그루 감나무 아래 평상, 여름밤 달빛 들어오는 창가에 자리 잡은 잠 등을 추억의 열쇠로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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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25*204*8mm
ISBN13
9791158968052

책 속으로

사물에 눈을 뜬다면

사물이 온다

사물이 미리 와 나를 기다린다
내가 사물을 낯설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거리에 이미 와 있다

사과 한 알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미리 와
무연하게 있다

사과의 바닥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세계로부터 길어 올린

사과의 여러 방법이다
― 「사물의 시간」 전문


비극의 형식을
탈출하는
곳에, 문을 세우고
해바라기를 심고
거리의 가로등이 켜질 때
집을 허물고 문이 사라지고
달과 별을 지우고
붉고 파란 사각형의 벽을 무너트리며
슬픔과 미안함과 죄를 씻어내며
발가벗은 탈출을 하는
나무와 꽃으로,
여름과 가을로,
도망가지 않을
달빛 속으로 숨지 않을
형태 없을
그림자 하나가
탈출을 할,
― 「비극의 형식」 전문


구름이 무미건조하다 걸어가는 신발이 무감각하다 철거되는 외벽이 무미건조하다 멀리서 오는 버스가 무미건조하게 도착한다 말 없는 개의 혓바닥이 무미건조하다 밀가루로 구운 무미건조한 지붕 아래 무미건조한 붉은 꽃이, 핀다 보내지 못하는 여름 같은, 무미건조한 단풍이 든다 개가 걸어간다 무미건조한 은행나무 아래 무미건조한 감각들이 도로로 깔리고 무미건조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고깃집에서 남녀가 무미건조한 말을 굽는다 무의미는 무감각이 되어가고 무미건조한 것들은 세계를 이루었다 무미건조한 조명 아래 무미건조한 저녁 구름이 몰려오고 무의미하게 도로를 건너다 무감각해지기로 했고 무의미를 곁에 두기로 하며 무경계에 서서 흘러가는 멈춤을, 붉은 열매의 무의미한 매혹을, 나무 사이로 무의미하게 떠오르는 초저녁달은 낮달과 무의미한 차이를 가지는가 계절에 무감각해지며 초록 잎과 붉은 열매에 무감각해지며 세계의 무의미함에 물들기를 원했다 붉은 구름이 사라졌다 공기 방울 안 계단을 오르면 붉은 단풍 든 나무 아래 당도하다 붉은 열매 속 붉은 열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세계의 끝에 이르다 격렬히 아무것도 아닌,
― 「격렬히 아무것도 아닌」 전문


사로잡히지 않을 시간이다
저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자귀나무 붉은 꽃은 왜 여름마다 여름을 불러 모으는지
멀리 있는 소나무,
먼 소나무는
왜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지
왜 한 걸음의 차이로
벼랑 끝에서 벼랑으로 다가가는 칡넝쿨의 뻗은 무심한 본능
을 닮는지
반복은 강박을 부르고
결국 빈 곳으로 닭의장풀이 자라고
―나의 슬프지 않은 방향으로,
너는 절벽을 물러서서 마지막 풍경을 바라보며
그만, 괜찮아,
그게 기호라는 거라고
곁으로 한 걸음 바깥이란 공존한다는 것,
달려도 해소되지 않을 오늘이라는 것,
그곳에선 멈추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
― 「밖」 전문


보도블록과 보도블록 틈 사이로 자라는

풀이 따르는 형식은 다정해

풀은 풀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풀은 풀의 입술을 더듬거리며

풀피리 소리 들리지 않을 아침을 기다리는
풀벌레의 잠이
깃드는

풀의 초록 벌판을 뛰어다니던
미래의 잠은
오질 않고

풀과 풀끼리 대화가 오고 가는
열린 형식을 따르는

풀은 이 밤을 건너뛰며

보이질 않을
속박되지 않을

서서 자라는 비밀의 공간으로 잠입하게 될

무한한 슬픔이라고 기어이 말하지 않을
― 「풀의 형식」 전문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미래 없는 미래라는 말을
그만하기로 한다.

폐허라는 말에서 말을 끝내고 싶지 않다.
치열한 생존으로부터도 조금은 자유로웠으면 한다.

더 가지게 된 것도,
더 이룬 것도 없지만
마음이 몸보다 멀리 안 나갔으면 한다.

이제 규정되지 않기를,
식물 동물 사람으로도 분류되지 말기를,

2026년 10월
강현숙


[해설 엿보기]

강현숙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화사한 꽃과 나무가 가득하지만,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하염없이 쓸쓸하다. 게다가 시집의 제목은 꽃과 나무의 생멸을 담은 시와는 어울리지 않게 이질적이다. 알다시피 시집의 제목은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의 그림 〈엘리펀트〉(1948)에서 따온 것이다. 달리의 그림에는 황량한 붉은 사막을 건너는 두 마리의 코끼리가 등장한다. 마주 선 두 코끼리는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짊어지고 있다. 코끼리의 거대한 몸을 지탱하는 다리는 한없이 가늘고 길다. 이 기형적인 비례는 보는 이에게 기괴한 불안감을 선사한다. 달리의 그림에는 인간의 이성과 문명에 대한 회의감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시인은 왜 달리의 기괴한 그림에서 제목을 차용했는가.
사막을 건너는 코끼리의 가느다란 다리. 그것은 거대한 몸집을 위태롭게 유지하는 이 세계에 대한 은유다. 살바도르 달리가 통과한 시대와는 달리 지금 시대는 풍요와 긍정으로 가득하다. 긍정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불안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은 쉽게 은폐된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폐적인 성과기계로 전락하고 만다. 시적 화자는 “매일 미래의 하루를 당겨다 지우며”(「천지 매화가 핀 벌판을 꿈꾸었지」) 살아가는 공허를 응시하면서 “사로잡히지 않는 시간”(「밖」)을 갈망한다. 그러나 지속성을 파괴하는 소비와 정보의 교환에 불과한 소통이 넘치는 세계에서 시적 화자가 원하는 ‘사이’와 ‘틈’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산책에 나선다. 목적 없이 배회하면서 시적 화자는 필사적으로 무용한 존재들을 응시한다.

이제 산책을 하기로 한다
이제 균열된 사랑을 응시하기로 한다
지금은 깨달음이 무용한 시절이다
발바닥에 힘을 주며 땅 위에 서는 법을 익힌다
어느새 은목서를 지나치는 중이다
금목서가 느닷없이 꽃을 피운다
간절하고 사무치고 절실한 것들은 찰나일 따름이다
꽃이 몸을 떠나듯 마음도 몸을 떠나는 것이다
빛이 오래 끼어들지 않는다
― 「올리브 열매가 익어갈 무렵」 부분

시적 화자는 배회하면서 ‘빗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듣고, “뜻 모를 식물의 이름이 궁금해지는 일”(「후르츠」)을 즐긴다. 이것은 세속의 기준으로 보면 효용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무용한 행위에 불과하다.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세계에서 ‘나’가 자각하는 것은 ‘부재(不在)의 슬픔’이다. 인간은 누구나 상실의 슬픔을 피하지 못한다. 이별, 상실, 낡음, 소멸, 실패 등은 인간이 짊어진 공동의 운명이다. 그러나 화려하게 명멸하는 세계는 그것을 막거나 늦출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 운명을 외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생각할 틈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소비하고, 낡은 것을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삶이 나아졌다고 착각하기 쉽다. 사유와 판단마저 외주화하는 AI시대에 이르렀지만 인간은 달리의 그림에 묘사된 코끼리처럼 더 위태로워질 뿐이다. 생명을 지닌 존재들은 모두 낡고, 부스러지고 만다. 이 자명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는 인간의 모습은 나약한 다리로 사막을 건너는 코끼리와 다르지 않다. 시인은 화자의 입을 빌려 편리하고 화려한 세계가 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가치, 즉 부재와 소멸의 의미를 묻는다.
― 이정현(문학평론가·한국외대 교수)

[시인의 산문]

먼 미래에 올 꽃 피는 속도를 놓치고 있었다. 매화나무 가지에 아직 물이 덜 올랐고, 동백은 멀었고, 봄마다 너무 일찍 마중을 나갔다.

내일은 나를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려 하는지를 놓치고자 한다.

꽃잎이 시간의 속도로 날리듯이 애타는 봄이 누구나 느끼는 편안한 질서였으면 했다. 무질서의 질서, 흐트러짐의 경계에 내가 떠나고 난 뒤의 타인의 삶이 흘렀으면 했다.

미래가 없는 미래를 오래 끌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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