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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 소개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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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 Wolfgang von Goethe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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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같은 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독일 뮌스터에 있는 베스트팔렌 빌헬름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2002년부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화해의 심리학》 《남자 심리 지도》 《스타는 미쳤다》 《구스타프 클림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춤》 《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히스테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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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왕실 추밀원 고문인 아버지와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고, 제젠하임이란 마을에서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사랑에 빠지며 감미로운 서정시들을 많이 썼다. 1771년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변호사로 개업했지만 업무보다는 창작에 몰두하여 그해 질풍노도 시기의 대표적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겐》의 초고를 쓰고, 말년에 완성된 그의 역작 《파우스트》를 비롯해 여러 작품을 시작했다. 1774년 9월 그의 첫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마자 대단한 선풍을 불러일으켜 독일 문학을 거의 처음으로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1775년 10월 독일 동부 바이마르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의 초대를 받아 결국 그곳에서 재상이 되어 10년 남짓 공직 생활을 했다. 말년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파우스트》를 완성하고 1832년 찬란한 생애를 마쳤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7년 02월 26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223쪽 | 338g | 130*195*20mm
ISBN13
9788939550643

출판사 리뷰

사랑에 대한 고뇌로 가득 찬 불멸의 소설!

1774년, 당시 스물다섯 살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던 독일의 문호 괴테는 자신이 겪었던 사랑 체험 및 친구 예루살렘이 유부녀에게 실연을 당해 자살한 사건 등을 각색해 그의 첫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출간하였다.

이 소설은 시민 계급 출신의 젊은이 베르테르가 약혼자가 있는 처녀 샤를로테(로테)를 사랑하게 되면서 겪는 생각과 느낌을 친구 빌헬름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쓴 서간체 소설이다. 편지를 보낸 날짜는 1771년 5월 4일부터 1772년 12월 23일까지로 되어 있는데, 소설을 읽는 독자는 편지를 쓰는 나(베르테르) 혹은 편지를 받는 나(빌헬름)가 되어 쉽게 몰입하게 된다.

소설은 형식상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베르테르라는 청년이 고향을 떠나 발하임이라는 마을에 들어와 샤를로테(로테)라는 처녀를 알게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녀에게 연모의 정을 품다가 그녀의 약혼자가 돌아오자 발하임을 떠나기로 작정한다. 2부에서는 대사의 서기관으로 공직에 들어간 베르테르가 부임지에서 겪는 생활이 들어 있다. 그는 관료 기질 등 인습에 반항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다시 귀국하게 된다.

로테에 대한 사랑을 접을 수 없어 결혼한 그녀 곁으로 다시 돌아와 그녀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다가, 윤리와 관습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 베르테르는 결국 죽음으로써 로테를 영원한 사랑으로 간직하려 하며 권총 자살을 한다. 12월 12일부터의 편지에서는 작품 속의 편집자가 끼어들어 베르테르의 삶의 마지막 시간에 일어난 사건을 3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의 '젊은 날의 초상'과도 같은 작품

괴테는 1772년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베츨라르라는 소도시로 법률 사무 실습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알았던 카를 빌헬름 예루살렘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외교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6월에는 하노버 공사관 서기관인 케스트너와 그의 약혼녀 샤를로테 부프(Charlotte Buff)를 알게 된 후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다른 전기에 따르면 그 정도로 심각한 애정은 아니었던 듯하다.

1772년 9월 괴테는 베츨라르를 떠났고 1773년 두 사람의 결혼 선물로 반지를 보냈고 케스트너는 자기가 입었던 예복을 괴테에게 보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때 베츨라르에서의 체류는 그의 첫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Leiden의 본래 의미는 '슬픔'보다는 '아픔', 혹은 '고통'이다. 또한 제목 끝의 주인공 이름에서 소유격을 나타내는 's'는 1824년 새로운 판에서 빠진다 - 이 탄생하게 된 토대가 되었다.

베츨라르를 떠난 지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괴테는 예루살렘이 유부녀를 사랑하다 절망에 빠져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뒤 괴테는 다시 베츨라르를 방문하여 사흘간 머물면서 케스트너에게서 상세한 정황을 들었다. 그리고 두 사건을 조합하고 가공하여 1774년 2월에서 4월 사이에 이 소설을 완성한 것이다.

괴테는 자신이 살았던 사회에 대한 비판과 자신이 읽은 작품, 그리고 그로 인한 사유를 마음껏 펼쳐 보이고 있다. 특히 스스로 베르테르와 동일시한 점들이 보이는데, 베르테르의 생일은 자신의 생일인 8월 28일이며, 샤를로테와 약혼자 알베르트는 괴테가 베츨라르에서 만났던 샤를로테와 케스트너의 관계와도 같다. 베스트너는 실제로 괴테에게 베슈타인 판 호메로스 책과 로테의 분홍 리본, 실루엣을 주었다.

오시안 시의 번역은 괴테가 실제 했던 것이다. 또한 자살자의 모델인 예루살렘은 케스트너에게서 권총을 빌려갔으며, 베르테르가 자살하기 직전에 읽었던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었다고 한다.

'베르테르 효과'의 기원이 된 전설적인 소설!

당시 대단한 선풍을 불러일으킨 이 소설로 남자들 사이에 파란 연미복과 노란 조끼의 베르테르식 복장이 유행하였고 여자들은 로테처럼 사랑받기를 원하였으며, 1774년 출간 이후 독일의 라이프치히, 덴마크의 코펜하겐 등 유럽 여러 도시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모방 자살이 크게 늘어났다.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는 유명인의 자살시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이름 붙였다.

1998년 일본의 록그룹 X-재팬의 기타리스트 히데가 자살한 뒤 그를 좋아하던 수많은 여성 팬들의 자살이 일어나고, 우리나라에서도 지난번 가수 유니 씨가 자살한 뒤 20여 일만에 탤런트 정다빈 씨가 이어서 자살하면서 언론에 '키워드'로 소개되기도 한 '베르테르 효과'의 기원이 된 작품이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이 책을 일곱 번이나 읽었고 이집트 원정 때도 가져갔다는 사실 또한 유명한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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