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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정병근
천년의시작 200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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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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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옻나무
덩굴 집
단호한 것들
콩나물 시루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치명적인 사랑
노을
가을
겨울마당
그 집



부메랑 던지는 남자
늙은 관리인
그의 구두
그 바비큐 집
삼양 슈퍼 맹씨
은행을 털다
명당
탑골 공원에서 노인들을 보다
대한민국 갑을 씨
물 아저씨
5층에서 본 그의 리어카
공중의 잠



에스컬레이터
한 십 년
그 다방의 동백
보이지 않는 손
차이
지겨운 드라마
아내의 아파트
텔레비전
이빨들
매미
즐거운 형벌
나의 죄
고려장
3월의 꽃들



폭포
수도꼭지
기찻길 옆 고물상
겨울 과수원을 지나다
디스플레이
홍수
멸치 때
먼 길
출렁이는 돌
고구마 줄기
밤 산행
오래된 희망

[해설] 시간의 내부와 자기성의 회복/ 박주택

저자 소개

저자 : 정병근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였고, 계간 <불교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였다. <현대시학>에 「소시집」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02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08쪽 | 156g | 128*188*20mm
ISBN13
9788990235053

책 속으로

너를 사랑한 죄,
피를 돌리고 순환의 심장을 만든 죄

너의 자궁 속에서
進化의 은밀한 몸을 키운 죄
욕망의 손아귀를 가진 죄

너의 살을 찢고 나온 죄
너의 몸에 피의 문신을 새긴 죄

울고 웃고 보고 들은 죄
모른 척 한 죄 버린 죄

나를 사랑한 죄,

어머니를 파먹은 죄
아버지를 파묻은 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죄
백 년만 살다가 죽어야 하는 죄

---p. 68

출판사 리뷰

시인 정병근 씨가 등단 14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 순간도 시를 잊어본 적이 없다"는 그의 말처럼 이번 시집에는 산고 후의 쨍쨍한 햇빛 같은 시편들이 담겨 있다.

정병근의 시들은 오래 전 혹은, 방금 일어난 어떤 사건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사진처럼 플래시가 터진 순간의 광휘가 뚜렷이 남아있다. 이 광휘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깊어서 망각과 무의식을 자극하는 한 시대의 그로테스크로 다가온다. 추억이라고 하기엔 범박하고 상처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담담한 판화 같은 그의 시들은 그러나, 꺾일지언정 잘 휘지 않는 직절(直節)의 힘을 가지고 있다. 남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시는 요즘 시인들의 내면 진술적인 시에서 보이는 자기 연민이나 습기 같은 것이 배제되어있다.

'깎아지른 절벽 하나를 세워야 한다 / 날카로운 그믐달 하나를 새벽하늘에 걸어야 한다 / ... / 내 목숨으로는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 아득한 저 편이 분명 있어야 한다 <決心>'고 다짐하며 그는 시의 날을 세운다. '삶과 죽음',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지에 다가가려고 하기보다 그는 오히려 그 경계의 각을 더욱 뚜렷하게 세우며 대상과 맞서는 독전자(獨戰者)의 입장을 취한다. "진술과 제스처를 줄이기 위해 묘사에 더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강퍅하고 드라이해 보인다.

'쩍쩍 금이 간 담장,/움푹 패인 마당을 사방으로 껴안은/슬레이트 지붕 위로/호박꽃 나팔꽃 담쟁이덩굴들/한데 뒤엉켜 필사적으로 오른다//그곳이 어딜까/허공을 긁는 무수한 손아귀,/땀 뻘뻘 흘리며 기어가는 손등의 핏줄/저 우둘두둘한 삶의 행로 <덩굴 집>'에서처럼 다소 거친 문법으로 세상의 풍경을 점묘하면서 그가 바라보는 곳은 '일회(一回)의 존재 바깥 <표4 발문인용>'이다. 그가 포착한 일상의 순간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베고 지나간 과일의 단면처럼 적나라하면서도 생생하여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그의 시를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베인 자국의 통증이 전해진다.

그는 한 때 '죽은 적이 있'다. '알 수 없는 분노로 책을 불태우고/사람의 목을 댕강댕강 날린' 야만에 대한 원죄를 가지고 있음을 서슴없이 고백하는가하면, 원색의 물감이 뚝뚝 흐르는 야수파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유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후두둑, 소나기가 오기 전에/서둘러 교미를 끝낸 암사마귀가/숫사마귀를 뜯어먹었다/단 한 번의 정사를 위해/벌들이 공중으로 전 생애를 던졌다/...거미는 발을 헛디딘/잠자리의 체액을 거침없이 빨았다 <유년>'.

시인은 이러한 자신의 기억과 체험에 대한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해 또 다른 '그'를 찾아 나선다. '길가에 버려진 구두 한 짝,/얼마나 싸돌아 다녔는지/바깥쪽으로만 달아서 동들동글하다/구두는 끝내 안으로 굽었다 <구두>, '숯불에 벌겋게 단 얼굴,/충혈된 눈으로 지난밤 그 남자는/열심히 닭을 구워 냈을 것이다 <그 바비큐 집>'와 같이 시속의 '그'는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의 아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나무는 서 있는 한 모습으로/나의 눈을 푸르게 길들이고/물은 흐르는 한 천성으로/내 귀를 바다에까지열어 놓는다//...//서 있는 것들, 흔들리는 것들, 잘 움직이지 않는 것들,/환하게 피고 지는 것들/추호의 망설임도 한점 미련도 없이/제 갈길 가는 것들/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들 <단호한 것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왔다가는 자연의 섭리야말로 우리가 흔쾌히 순응하고 걸어가도 좋을 진정한 '길'이 아닐까.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저 나무처럼 돌처럼 <먼 길>' '나'에게 이르는 먼 길을 숙명처럼 뚜벅뚜벅 걸어가는 시인의 발걸음이 단호하다.

추천평

정병근의 시는 먹빛을 머금고 있다. 이슬에 젖어 촉촉한 쪽풀을 항아리에 담가 우려내면 처음엔 찌꺼기가 문드러진 채로 먹빛이지만 석회를 뿌려 가라앉히면 그 안에 녹(綠)이 얼핏얼핏 출렁인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이렇듯 일회(一回)의 존재 바깥이다. 한 번 물들면 옷감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빠지지 않는 청포(靑布) 같은 시들이다.
--- 정철훈(시인)
그의 시속의 사물은 인화 물질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 당겨주기만 한다면 확 불길로 솟구칠 그런 세상과의 불화와 배설 직전의 원시적 생명으로써의 욕정이 미만해 있는 것이다.

가령 그의 시 '幼年'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고 있는 한가로운 낙원의 공간이 아닌, 생존을 위한 처절한 피의 전투장을 방불케 하는 힘의 이미지가, 바람 많이 든 풍선처럼 팽배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그의 시의 에너지이고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무서운, 늙은 신인의 때늦은 출현이 나를 소름끼치게 한다. 뚝뚝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으므로, 그의 시는 매우 남성적이다.
---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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