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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옻나무 덩굴 집 단호한 것들 콩나물 시루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치명적인 사랑 노을 가을 겨울마당 그 집 Ⅱ 부메랑 던지는 남자 늙은 관리인 그의 구두 그 바비큐 집 삼양 슈퍼 맹씨 은행을 털다 명당 탑골 공원에서 노인들을 보다 대한민국 갑을 씨 물 아저씨 5층에서 본 그의 리어카 공중의 잠 Ⅲ 에스컬레이터 한 십 년 그 다방의 동백 보이지 않는 손 차이 지겨운 드라마 아내의 아파트 텔레비전 이빨들 매미 즐거운 형벌 나의 죄 고려장 3월의 꽃들 Ⅳ 폭포 수도꼭지 기찻길 옆 고물상 겨울 과수원을 지나다 디스플레이 홍수 멸치 때 먼 길 출렁이는 돌 고구마 줄기 밤 산행 오래된 희망 [해설] 시간의 내부와 자기성의 회복/ 박주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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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 죄,
피를 돌리고 순환의 심장을 만든 죄 너의 자궁 속에서 進化의 은밀한 몸을 키운 죄 욕망의 손아귀를 가진 죄 너의 살을 찢고 나온 죄 너의 몸에 피의 문신을 새긴 죄 울고 웃고 보고 들은 죄 모른 척 한 죄 버린 죄 나를 사랑한 죄, 어머니를 파먹은 죄 아버지를 파묻은 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죄 백 년만 살다가 죽어야 하는 죄 ---p. 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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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병근 씨가 등단 14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 순간도 시를 잊어본 적이 없다"는 그의 말처럼 이번 시집에는 산고 후의 쨍쨍한 햇빛 같은 시편들이 담겨 있다.
정병근의 시들은 오래 전 혹은, 방금 일어난 어떤 사건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사진처럼 플래시가 터진 순간의 광휘가 뚜렷이 남아있다. 이 광휘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깊어서 망각과 무의식을 자극하는 한 시대의 그로테스크로 다가온다. 추억이라고 하기엔 범박하고 상처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담담한 판화 같은 그의 시들은 그러나, 꺾일지언정 잘 휘지 않는 직절(直節)의 힘을 가지고 있다. 남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시는 요즘 시인들의 내면 진술적인 시에서 보이는 자기 연민이나 습기 같은 것이 배제되어있다. '깎아지른 절벽 하나를 세워야 한다 / 날카로운 그믐달 하나를 새벽하늘에 걸어야 한다 / ... / 내 목숨으로는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 아득한 저 편이 분명 있어야 한다 <決心>'고 다짐하며 그는 시의 날을 세운다. '삶과 죽음',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지에 다가가려고 하기보다 그는 오히려 그 경계의 각을 더욱 뚜렷하게 세우며 대상과 맞서는 독전자(獨戰者)의 입장을 취한다. "진술과 제스처를 줄이기 위해 묘사에 더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강퍅하고 드라이해 보인다. '쩍쩍 금이 간 담장,/움푹 패인 마당을 사방으로 껴안은/슬레이트 지붕 위로/호박꽃 나팔꽃 담쟁이덩굴들/한데 뒤엉켜 필사적으로 오른다//그곳이 어딜까/허공을 긁는 무수한 손아귀,/땀 뻘뻘 흘리며 기어가는 손등의 핏줄/저 우둘두둘한 삶의 행로 <덩굴 집>'에서처럼 다소 거친 문법으로 세상의 풍경을 점묘하면서 그가 바라보는 곳은 '일회(一回)의 존재 바깥 <표4 발문인용>'이다. 그가 포착한 일상의 순간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베고 지나간 과일의 단면처럼 적나라하면서도 생생하여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그의 시를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베인 자국의 통증이 전해진다. 그는 한 때 '죽은 적이 있'다. '알 수 없는 분노로 책을 불태우고/사람의 목을 댕강댕강 날린' 야만에 대한 원죄를 가지고 있음을 서슴없이 고백하는가하면, 원색의 물감이 뚝뚝 흐르는 야수파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유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후두둑, 소나기가 오기 전에/서둘러 교미를 끝낸 암사마귀가/숫사마귀를 뜯어먹었다/단 한 번의 정사를 위해/벌들이 공중으로 전 생애를 던졌다/...거미는 발을 헛디딘/잠자리의 체액을 거침없이 빨았다 <유년>'. 시인은 이러한 자신의 기억과 체험에 대한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해 또 다른 '그'를 찾아 나선다. '길가에 버려진 구두 한 짝,/얼마나 싸돌아 다녔는지/바깥쪽으로만 달아서 동들동글하다/구두는 끝내 안으로 굽었다 <구두>, '숯불에 벌겋게 단 얼굴,/충혈된 눈으로 지난밤 그 남자는/열심히 닭을 구워 냈을 것이다 <그 바비큐 집>'와 같이 시속의 '그'는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의 아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나무는 서 있는 한 모습으로/나의 눈을 푸르게 길들이고/물은 흐르는 한 천성으로/내 귀를 바다에까지열어 놓는다//...//서 있는 것들, 흔들리는 것들, 잘 움직이지 않는 것들,/환하게 피고 지는 것들/추호의 망설임도 한점 미련도 없이/제 갈길 가는 것들/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들 <단호한 것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왔다가는 자연의 섭리야말로 우리가 흔쾌히 순응하고 걸어가도 좋을 진정한 '길'이 아닐까.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저 나무처럼 돌처럼 <먼 길>' '나'에게 이르는 먼 길을 숙명처럼 뚜벅뚜벅 걸어가는 시인의 발걸음이 단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