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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고려 땅 가장 낮은 자들이 왕에게 날라다 준, 따뜻한 밥 한 끼 숨은 암자 열두 살 미름이 이야기 안마당의 구렁이 한 마리 야반도주 남루한 손님의 첫날 호법이의 비밀 천동의 둘째 날 호위 무사가 된 호법이 셋째 날, 위험한 예고 넷째 날, 다락골로 피신하다 폐가입진 마지막 동무 다섯째 날, 밥 나르는 콩할머니 옥 같은 두부 한 덩이 어린 날의 노래 연못의 사슴 가죽 신발 새 날을 향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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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 Jun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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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마저 잘 본다는 삽살개인지라 미름이는 호법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호법이가 먼 산을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미름이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호법이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호법이가 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았다. 문득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차올랐다. 그것은 미름이에게 오래도록 습관처럼 배어 있는 그리움이었다.
--- p.13 “얘야, 먼 길 가던 사람인데 날이 어두워졌구나. 여기서 하룻밤 묵어가도 괜찮겠니?” 남자의 목소리는 반듯하고 울림이 크며 위엄이 서려 있었다. 미름이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낯선 방문자를 살펴보았다. 가까이 얼굴을 대하니 초라한 차림새가 어울리지 않게 귀티가 났다. 무척 지쳐 보이긴 했으나 달빛 아래에서도 남자의 얼굴은 그을리지 않은 흰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큰 체격은 아니지만 어딘지 당당한 풍모였고, 여자 또한 단정히 잘 틀어 올린 머리 매무새와 함께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는 듯한 깊은 눈빛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런데 달빛 아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미름이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풍모에서 느껴지는 당당함과 함께 어떤 처량함 또는 처연함도 느껴졌다. 마치 호랑이한테 쫓기는 사슴의 모습과도 같은 안쓰러움이었다. 그런 처연함과 함께 남자는 불안함을 애써 감추려는 듯이 보였다. --- p.45 “나는 믿지 않소. 지금 내 곁에 있는 친구는 오로지 호법이와 미름이뿐! 너희들은 내 마지막 동무들이다.” 미름이는 ‘마지막 동무’라는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나리, 저 연못은 비가 오고 나면 무지개가 자주 걸린답니다. 무지개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잖아요. 나리께서도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다음에 오면 무지개도 볼 수 있겠지?” “네. 비가 오고 화창한 오후에 연못에 가 보시면 무지개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참 좋겠구나.” --- p.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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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소녀 미름이와 삽살개 호법이 - 버림받았지만 서로를 의지하다
미름이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였다. 미름이 아버지는 미름이가 백일도 되기 전에 왜구의 침입에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은 미름이 어머니는 부지런히 길쌈과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나갔지만, 결국 동네 주모의 부추김에 흔들려 미름이를 버리고 원나라 사람에게 재가한다. 미름이는 주모 밑에서 고된 일을 하며 살다가 탁발을 하러 온 스님 눈에 띄어 견달산의 암자에서 지내게 된다. 삽살개 호법이는 태어난 지 열흘 만에 버려졌다. 호법이는 고려 어느 귀족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 집의 안주인에게 귀신 들림병이 생기자, 무당은 태어난 삽살개 중에서 가장 약한 새끼를 내다 버리라는 비방을 내린다. 머슴이 가장 약한 다섯째 삽살개를 내다 버렸을 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스님이 발견하고 암자로 데려와 미름이에게 안겨 주었다. 미름이는 핏덩어리나 다름없는 삽살개(호법이)를 돌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암자에서의 생활을 적응해 간다. 호법이도 자신을 돌보는 미름이를 따르며 세상에 버려진 둘은 그렇게 산속에서의 생활을 이어 간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 세상에 쫓기다 혼탁한 고려 말 격변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왕위에 오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공양왕이었다. 공양왕은 마흔다섯의 적지 않은 나이에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성계의 계획이었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든 다음, 자신이 왕위를 이어받아 왕이 되려는 야심을 가졌다. 결국 이성계의 계획대로 공양왕은 원주로 추방당하고 간성, 삼척 등으로 쫓겨 다녀야 했다. 그렇게 도망치던 왕 부부가 견달산 자락의 작은 암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준 것은 공양왕 부부처럼 세상에 버림받은 소녀 미름이와 삽살개 호법이었다. 공양왕 부부와 미름이, 그리고 호법이 - 동무가 되다 피신 중이었던 공양왕 부부에게는 여유가 없을 뿐더러, 시시각각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미름이와 호법이는 공양왕을 천동 나리라 부르며 따르고, 살뜰하게 챙긴다. 시중드는 사람들 속에서만 살던 공양왕 부부는 인적 드문 암자에서 어린 소녀와 삽살개와 어울리며 조금씩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고, 순수한 미름이와 호법이 덕분에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잠시 미소를 띠기도 한다. 친구란 그런 것이다. 처지는 달라도 마음이 통하면 서로의 친구가 될 수 있다.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자신의 권위와 위치 때문에 마음으로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없어서 쓸쓸했던 왕이, 쫓기는 신세가 되어서야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 동무를 만난 것이다. 어린 시절의 친구같이, 아무런 대가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진짜 친구’ 말이다. 미름이와 호법이는 공양왕 부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들의 우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쫓기는 신세의 공양왕 부부는 자신들을 쫓는 자객들을 피해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래서 어느 날 사라져 버린다. 갑자기 사라진 공양왕 부부를 기다리는 미름이와 호법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공양왕 부부를 기다리는 미름이와 호법이. 그들에게 공양왕 부부를 다시 만날 날이 올 수 있을까? 《공양왕의 마지막 동무들》은 이 동무들의 앞날을 희망적으로 그린다. 공양왕을 다시 만날 거라고 확신하는 미름이와 호법이를 보면서 정말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왕의 회한과 여자아이와 삽살개를 진심으로 동무로 생각한 공양왕의 인간적인 면모가 묘하게 설득력을 자아내면서 역사적인 사실보다 더 진짜 같은 감동을 주는 이 이야기의 애틋하면서도 아련한 매력 속으로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작가의 말 고려 땅 가장 낮은 낮들이 왕에게 날라다 준, 따뜻한 밥 한 끼 이 동화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들이 조선을 세우던 시기에,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쫓기는 신세가 되어 도망 다니다 작은 암자에 숨어들어 어린 소녀와 삽살개가 날라다 준 밥을 먹으며 지내던 단 5일간의 이야기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풀어 낸 작품이에요. 제가 살았던 경기도 고양에는 공양왕과 삽살개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요. 이성계에게 쫓기던 공양왕이 연못에 몸을 던져 그곳에 무덤이 만들어졌고, 왕과 왕비가 귀여워하던 삽살개가 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무덤을 지켰다는 애틋한 내용이지요. 그것을 증명하듯 왕의 무덤 앞에는 실제로 개로 추정되는 석물이 있답니다. 또 어느 암자에서 숨어 지내는 왕에게 밥을 지어 날랐다는 민간 설화가 깃든 ‘식사동’이라는 지명도 있어요. 저는 왕과 왕비가 귀여워했다는 삽살개 이야기를 알게 된 뒤부터 고려의 마지막 왕에 대한 동화를 써 보고 싶었어요. 그러나 고려를 배경으로, 마지막 왕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럴 때마다 작고 초라한 왕의 무덤 앞에 가서, 죽음을 눈앞에 둔 왕과 왕비가 삽살개와 놀면서 가졌을 법한 동심에 대해 생각하곤 했지요. 비록 허수아비 왕이었지만 당시 왕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모든 권세를 지닌 강력한 존재였지요. 그런 왕이 신하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려져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마도 모든 권력의 부질없음을 깨닫지 않았을까요?그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왔을 때 비로소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동심으로 돌아가 진심으로 자신을 돕는 어린 동무들을 향한 우정 어린 마음과 세상을 바라보는 진정한 눈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이 동화는 가장 낮은 자들이 자신의 상처를 보듬으며 오히려 어려움에 처한 상대에게 따뜻한 마음을 건네는 이야기예요. 여러분도 미름이와 호법이의 따뜻한 마음을 통해 꿋꿋이 살아 나갈 용기와 의지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아울러 당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던 격변기의 역사 속 정세들도 함께 들여다보며 고려 시대 민초들의 삶을 엿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경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