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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으로부터 사흘 밤낮
이인
시인동네 202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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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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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칠점사 · 13
동박, 동백꽃 · 14
파킨슨 씨의 저녁 · 16
집이 운다 · 18
낮달 · 20
한식 · 21
빈집의 여백 · 22
모란장 · 24
못다 쓴 문장 · 26
흙 위에 쓰는 시 · 28
봉인 · 29
가장 가벼운 의식 · 30
양장의 날개 · 32
백련 · 34

제2부

상강 · 37
장미 정원 · 38
산당화 · 40
사흘 밤낮 · 42
기몽 · 44
부르다 만 노래 · 45
버드나무 미용실 · 46
오색딱따구리의 무덤 · 48
이마가 흰 기러기 · 50
연못이 평화로운 이유 · 52
담쟁이 기도문 · 53
천궁 · 54
곡선의 기억 · 56
암각화를 그린 여우 · 58

제3부

허물 · 61
부드러운 독 · 62
복사꽃 평전 · 64
물총새의 저녁 · 65
뱀딸기 · 66
낮달 2 · 68
한밤중 · 69
일일 · 70
나문재 · 72
올빼미 · 73
옥상 · 74
항아리 거울 · 76
제비꽃 · 77
아주 심기 · 78
꽃들의 행진 · 80

제4부

산벚나무 · 83
환지통 · 84
수문 밖 풍경 · 86
월담 · 87
장다리꽃 · 88
싸리나무가 있는 방 · 90
박꽃 · 92
자웅동주 · 93
옥녀개각혈 · 94
애기똥풀꽃 · 96
꽃사태 · 98
산책 · 99
튤립은 피고 · 100
물방울의 기원 · 102
저녁의 입술 · 104

해설
탈주하는 은유의 힘/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 105

저자 소개 1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2013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2007년 미당문학제에 입선했고 2010년 제10회 동서커피문학상 맥심상,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제29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우수상을 수상했다. 2018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지원 문학 분야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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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2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53*225*20mm
ISBN13
9791158965006

책 속으로

머리에 일곱 개의 별을 단 뱀을
노인은 산 채로 유리병에 넣고 술을 붓는다

뱀의 익사를 본다
별의 익사를 본다

죽음을 들이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좀처럼 자세가 취해지지 않는다

제가 뿜은 독(毒)에 취해
일곱 개의 별을 뱉어낸다

유리병 속에
북두칠성이 떴다
---「칠점사」중에서

늙은 감나무 빈집을 내려다보고 있다

흙벽 떨어져 나간 토방 앞
들고양이 배 깔고 자울자울 졸고
댓돌 위 다 해진 검정 고무신 한 짝 누워 있다

문턱이 다 닳도록 드나들던 안방 방문 위
윗대서부터 내려왔다는 가훈이
비딱하게 걸려 있다

여름 한철 국수를 밀던 밀대는
부뚜막을 굴러다니고
녹슨 가마솥에는 거미들이 집을 짓고 있다

빈손으로 허공만 더듬거리던 바람
마당귀, 저 홀로 피어 만삭이 된
봉숭아꽃 씨방을 만지작거리고
나비는 문 열린 빈집을 제 집처럼 드나든다

붉은 굴뚝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
그늘 넓히느라 하루가 짧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집
불쑥 대문을 밀고 들어올 것 같은 사람이 그리워
집이 운다

땡감 매달고 있는 감나무 가지 끝
귀 닮은 낮달이 걸려 있다
---「집이 운다」중에서

내 손바닥 위에 조약돌을 쥐여 주고 떠났다
돌을 움켜쥐고 크게 한번 흔들었다
썰물이 빠져나간 조약돌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화인처럼 내게 남겨진 조약돌

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지구의 자전이 몇 번 있고서야 알았다

백중 때가 되면 손 안에서
잔물결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한낮에도 달은 뜨고
물결은 차오른다

어둠은 어쩌다가 달을 놓쳤을까?
---「낮달」중에서

월간지로 나온 살구나무 책을 펼쳐든다 물관을 타고 오르는 활자들이 뿌리의 안부를 묻는다 아지랑이 토해내는 나무의 목록을 누가 흙 속에 새겨두었던 걸까 적산가옥 그 연혁이 펼쳐진 봄, 굴뚝은 제 붉은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연기만 자꾸 피워 올린다 그때 눈이 가려운 살구나무들이 꽃빛을 피운다 이따금 부리에 침을 바른 새떼들이 봄빛을 몰고 와 책장을 넘긴다 몇 년 전 타지로 나간 주인집 아들이 유골함으로 돌아왔다 봄비에 젖은 나무는 온종일 몸을 뒤척였고 새소리 바람 소리를 수피 속으로 가두었다 비에 젖은 파란 대문이 붉은빛으로 글썽이고 꽃숭어리가 빗소리에 다 털릴 즈음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봄밤이 늘어지지 말라고 솔잎 시침핀으로 지붕을 눌러놓았다

봄이란 책장이 쉽게 넘어가질 않는다
---「흙 위에 쓰는 시」중에서

목련은 기러기 날아간 곳으로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운다

북국(北國)을 향해 눈뜨는 꽃망울
어둠 찢고 나오는 풋잠

가지 끝,
저 먼 슬픔을 향해 손을 내밀어본다

얼굴만 가물거리는 사람
꽃으로 흘러갈 사람

한 숨결이
한 숨결을 먼발치에 묻고

당신으로부터 사흘 밤낮
돌아선 뒤의 일이었다

---「상강」중에서

출판사 리뷰

명사는 랑그(langue)의 지시로 사물에 ‘개념’을 부여한다. 그러나 개념은 실물의 무한한 변화와 생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실물은 멈춰 있지 않으며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개념은 무한 생성의 실물에 가해진 랑그의 폭력이다. 이인 시인은 이렇게 기표로 개념화되고 단일화된 사물의 의미를 해방한다. 그는 명사를 무수히 다른 기표들로 환치함으로써 개념이 강요한 동일성에 구멍을 낸다. 사물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는 것은 은유이다. 말하자면 그는 사물에 대한 은유인 명사를 다시 은유함으로써 의미를 끝없이 흐르게 한다. 이 탈주하는 은유의 힘이야말로 이인 언어의 힘이다. 이인은 기표와 실물 사이의 공백에 유의하며, 그 빈틈을 파고 들어가 기표가 개념의 그물에 포획되지 않도록 한다. 그는 기표가 개념에 갇히기 전에 그것의 다의성(multiplicity)을 풀어놓고, 이미 개념에 갇힌 기표에 다른 개념을 부여함으로써 동일성을 해체한다. 그가 유독 명사형의 제목에 몰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동박새가 유두처럼 생긴 꽃봉오리 쪼아대는 한낮
동백 숲에 드니
산도(産道) 열고 순풍순풍 붉은 꽃 피어나는
오랜 수령의 동백나무에서
피, 비린내가 난다

한 달에 한 번씩 꽉 차오르는 아랫배 움켜쥐고
붉은 혈 질펀하게 쏟아내야 가벼웠던 몸
자식 둘을 낳고 이제는 자궁 문이 닫히는 중이다

시도 때도 없이 벌겋게 홍조 띤 얼굴
계절과 상관없이 불같은 적막을 견뎌내며
새벽 맞는 일 허다하다
도대체 틈을 주지 않는다
여자가 빠져나가는 몸에선 버석버석 물기 마른 소리 들린다

동박새 앉았다 간 나뭇가지
낭창낭창 휘어진다
춘정에 못 이긴 꽃 모가지 우수수 떨어진다
저 흥건하게 젖은 붉은 혈 서럽도록 화사하다

달빛 환하게 내려앉는 밤
나, 거기 동백 숲에 들어 발정 난 동박, 동박새와
한 열흘쯤 몸을 섞다
덜컹, 애라도 밴다면
완강하게 달려드는 갱년기 견딜 만하겠다
― 「동박, 동백꽃」 전문

이 시에서 늙은 동백나무는 폐경을 맞이하는 화자의 몸과 유비(類比)된다. 동백의 붉은 꽃은 달거리의 “피”로, “발정 난 동박”은 (여성화된) 동백의 연인으로 환치된다. 늙은 동백나무는 늙어도 폐경이 되지 않고 “피, 비린내” 같은 꽃을 피운다. 동백나무와 동박새의 사랑놀이를 바라보는 화자는 자신을 동백나무와 동일시하며 동박새와 “몸을 섞”는 상상을 한다. 이렇게 동백과 동박은 식물/동물로서의 고정된 개념에 구멍이 뚫리면서 화자의 몸, 그리고 욕망과 뒤섞인다.

시인의 이런 작업은 랑그의 체계가 부여하는 의미에 대한 시인의 무의식적 회의를 보여준다. 시인은 상징계(the Symbolic)가 대상을 재현하는 편리한 수단이 아니라, 폭력적 개념화, 범주화, 영토화의 체계임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저마다 자신이 사용하는 질료에 대하여 민감한 태도를 견지한다. 질료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자는 예술가가 아니다.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나 작가라 부르지 않는다. 시인은 (이론이 아닐지라도)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감각적으로 상징계의 폭력을 감지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자이다. 이인 시인은 특히 이런 작업에 매우 예민한 안테나를 가지고 있다. 그는 랑그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의미들을 지우고 그 자리를 자신의 의미로 채운다.

이 ‘채워넣기’, ‘대체하기(supplement 자크 데리다)’에 의해 단어는, 기호는, 기표는, 정지 혹은 정주(定住)하지 않고 의미의 산탄(散彈)을 날리며 탈주하는 기관차가 된다. 기관차는 (시인에 따라) 저마다 다른 노선(路線)을 갖는다. 이인 시인은 주로 몸의 쇠락, 병, 죽음, 소멸이라는 존재의 회피 불가능한 정거장들을 지나간다. 그리하여 의미의 회로를 달리면서 “모든 죽어가는 것”(윤동주, 「서시」)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헌사를 흩뿌린다.
―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시인의 말

꽃 진 자리에서부터 발아된
나의 슬픈 문장들이여

이제 더는
뒤돌아보지 말기를……

2020년 12월
이인

시인의 산문

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마디가 밤새 또 한 뼘 키를 늘렸다.

준비하지 못한 이별에 대처하는 방식은 못갖춘마디에 음표를 다는 것, 나는 오선지 위에 여린 마디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리는 음표는 영영 그리지 못할 당신의 탄식과도 같아서 끝마디에 가닿지 못할 것을 안다. 빗방울 마디와 눈송이 마디가 꽃잎의 마디로 피어오를 때까지 오래오래 오선지 위를 나는 배회할 테지만……,

당신이 부르다 만 노래의 첫마디가 오래 귓속에 머무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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