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아까 올케가 혜진이를 우리 집에 데려다놓고 갔는데, 어떡하면 좋지?”
큰고모였다. 덕적도에 사는 큰고모와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둘이서 주고받는 목소리가 내 귀에 고스란히 들렸다.
“저번에 장례식 날 그런 소릴 하더니만, 정말 걔를 너한테 데려갔구나?”
“응! 나도 그냥 해보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데리고 왔지 뭐야!”
아버지 장례식 날 엄마가 나 몰래 고모들에게 그런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날 나는 아버지 영정 사진을 들고 장의차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소복 차림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멍한 표정으로 이따금 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럼 올케는 어디로 간다던?”
“몰라. 그냥 멀리 떠난다고 그러더라고. 언니도 얘를 맡을 형편이 못 되지?”
나는 큰고모가 어떤 대답을 할지 귀를 바짝 기울였다. 작은고모보다는 큰고모를 더 많이 만났었고, 덕적도 큰고모네 집에 몇 번 놀러 간 적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나는 애들이 셋에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까지 있잖아? 내가 맡으면 좋겠지만.”
“으음!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내가 맡아야겠네. 그런데, 우리 애들이랑 한방을 쓰라니까 얘가 싫다네!”
그 말을 하면서 작은고모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무슨 처치 곤란한 물건을 보듯 다소 건조한 눈빛에는 짜증기가 섞여 있었다.
“처음엔 어색하니까 그러겠지! 근데 올케가 돈이라도 좀 주고 갔니?”
“돈은 무슨 돈? 오빠 병원비로 재산 다 날리고 오히려 빚을 많이 졌다는데.”
“아마 그럴 거야. 6년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니.”
“아무튼 알았어, 언니! 일단 얘는 내가 데리고 있어볼게.”
고모들한테까지 골칫거리가 되어버린 나. 나는 더 이상 세상을 살기 싫었다. --- p.26~27
“너, 교과서 안 가져왔구나?”
내가 부산을 피우자 우측으로 한 분단 건너 4분단에 앉은 한 아이가 물었다. 나는 대답을 않고 네가 뭔 상관이냐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 아이가 자기 교과서를 나한테 던져주었다.
“자, 내 거 봐!”
공중으로 3미터를 날아온 교과서를 얼떨결에 받았다. 그래놓고 나는 그 아이에게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굳이 이런 값싼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돼. 사실 그동안 그 아이가 두어 번 말을 걸었으나 완전히 무시하고 대답도 하지 않았었다. 그 누구와도 어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갈등이 일었다. 교과서를 받았으니 자리에 그냥 앉아 있을 건지, 거부하고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갈 건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는 참에 사회 담당 선생이 들어왔다.
(…) 사회 선생 유라큐라가 2분단을 점검하며 앞쪽으로 얼마큼 갔을 때, 그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야, 남혜진!”
“……?”
“남혜진! 이젠 내 책 돌려줘, 얼른!”
사회 선생의 눈을 피해서 자기한테 교과서를 던져달라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다.
“아!”
그제야 알아차린 나는 그 아이를 향해 교과서를 휙 던졌다. 그 아이가 교과서를 받은 후 손가락을 펴 V자를 만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나도 씨익 웃었다. 그 아이가 나에게 도움을 준 첫 아이, 내 이름을 불러준 첫 번째 아이였기에 나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 p.34~36
“세주야, 너네 엄마 아빠는 오늘도 일 나가신 거야?”
“응! 요즘 회사가 바쁘대!”
“어느 회사 다니시는데?”
갑자기 그걸 알고 싶었다.
“아빠는 저쪽 산업 단지에 있는 식품 공장에서 냉동기사로 일하고, 엄마는 전자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셔. 혜진이 너네 엄마 아빠는 무슨 일 하셔?”
그 질문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미트볼을 씹다 말고 한참을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해야 되나. 거짓말로 둘러대야 하나. 갈등 끝에 나는 사실이 아닌 거짓말을 택하고 말았다.
“우리 아빠는 조그만 이불 공장을 하셔. 여러 가지 침구류도 만들고. 엄마는 시내 가게에서 그것들을 파시고.”
“와! 그러면 너 아빠 엄마가 모두 사장님이시네?”
“음! 뭐 그런 셈이지!”
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사실대로 말하기가 싫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세주가 나를 멀리할까 봐 두려웠다. --- p.70~71
“저, 사실은…….”
겨우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뭐?”
“세주야, 미안해! 사실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한 거였어.”
“……!”
“솔직히 말할게. 아버지는 지난 3월 중순에 병 때문에 돌아가시고, 엄마는, 엄마는 멀리 가버렸어.”
용기를 내서 더듬더듬 말했다. 사실과 진실을 말하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 거짓은 언젠가 들통이 나게 마련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엄마가 가버리다니?”
“나를 작은고모한테 맡기고 떠났어.”
“너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말이야?”
“응! 여기는 작은고모가 운영하는 이불 공장이야. 우리 아빠가 큰 공장을 짓고 있다는 말도, 엄마가 시내에서 이불 가게를 한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었어.”
거짓말이었음을 실토하는 내내 나는 입 안에 침이 마르고 손이 떨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 이 지하 공장 창고방에서 혼자 살아.”
“그럼 혼자서 자취하는 거네?”
“완전 자취는 아니고, 밥만 내가 해! 반찬은 고모가 출근할 때 가져다주고.”
세주가 모든 걸 다 파악했다는 듯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세주가 실망하고 돌아갈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랬구나!”
“세주야, 나 이런 데 산다는 거, 엄마 아빠가 없다는 거, 다른 애들한테 절대 말하면 안 돼! 비밀로 해줘! 응?”
“알았어. 비밀로 해줄게. 걱정하지 마!” --- p.122
나는 세주와 번화가 구경을 하다가 액세서리 숍으로 들어갔다. 가지가지 예쁜 것들이 우리를 잡아끌어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안에는 여학생들이 꽤 많았다.
“혜진아, 살 만한 거 골라보자.”
“그래. 와! 참 많다.”
이리저리 돌며 한참을 구경하다가 나는 머리핀을 하나 골라잡았다. 엄지손톱 크기의 은색 별이 달린 것으로 2,000원짜리였다. 그것을 들고 망설이던 나는 한 개를 더 집어 들었다. 그러고 서 몸을 돌리려다 뚝 멈췄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두 개를 더 집어 모두 네 개가 되었다.
“어? 세주는 어디 간 거야?”
바로 옆에 있는 줄 알았는데, 세주가 보이지 않았다. 빽빽한 여학생들을 헤치며 세주를 찾았다. 세주는 저만치 구석 진열대 에서 다른 것을 고르는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간 순간, 세주가 몸을 돌렸다.
“세주야, 다 골랐니?”
“응. 지금 골랐어. 봐봐!”
세주가 골라잡은 액세서리를 내밀었다. 행운의 네잎 클로버가 달린 휴대폰 고리였다.
함께 수영장 갔던 날, 내가 네잎 클로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걸 봐서 산 모양이었다.
“어어? 너도 네 개 샀네?”
“어떻게 달랑 내 것만 사니? 하나씩 나눠주려고 똑같은 거로 네 개 골랐어.”
“나도 그러려고 이 머리핀 네 개 골랐어.”
“어머! 우리 텔레파시가 통했나 보다. 이쁘다!”
나는 세주와 마음이 통한 것 같아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세주와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웠고 큰 의지가 되었다. 문득문득 세주가 서너 살 위의 언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p.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