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간할 땅이 없는 조선 사람들은 물가에 있는 숲을 적극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홍수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보를 만들거나 둑을 높이 쌓자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문제는 호랑이였다. 그곳은 태초부터 호랑이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조건 땅에 불부터 놓았다. 호랑이한테 선전 포고를 하는 셈이었다.
“이제부터 이 땅은 우리가 접수할 테니, 죽기 싫으면 다른 곳으로 물러나라!”
갑작스러운 불 공격을 받은 호랑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연기에 질식해 목숨을 잃었고, 불길이 털에 달라붙어 목숨을 잃었다.
호랑이들은 놀라서 달아난 뒤에야 정신을 가다듬고는, 어떻게 해서든 살기 좋았던 자신들의 땅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개간지에서 호랑이와 인간이 자주 충돌했다. 충돌로 인간이 다치면 ‘호환虎患’이라고 하며 모두 호랑이 탓으로 돌렸다.
‘호환’은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쓰인 말인데, ‘호랑이한테 당하는 피해’라는 뜻이다. 그러니 호랑이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당신들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보시오.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 당신 집에 불 질러 쫓아냈다고 생각해보시오. 당신들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 pp.20-22
『조선왕조실록』에는 호환에 대한 기록이 600여 차례 등장한다. 물론 철저하게 인간들 입장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호랑이는 가해자’고 ‘인간은 피해자’라는 식으로 왜곡되어 있다.
조선의 각 마을에서는 겨울이 오면 세금으로 바칠 호피를 마련하기 위해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사냥하다가 다치면 무조건 호환이라고 기록했으니, 호랑이 입장에서는 아주 부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원래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양측의 의견을 다 들어보고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무조건 호랑이의 포악성만을 과장되게 퍼트리며 자신들의 행위는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호랑이가 역사책을 작성했다면 ‘한 해에 인간들 공격으로 죽어간 호랑이가 수천 마리이니, 대체 그 포악한 인간들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했을 것이다. 심지어 인간들은 덫이나 함정에 걸린 호랑이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어도 당국에 호환이라고 신고했다. 그러니 단순하게 ‘17세기에 호환이 가장 많았다’는 식의 통계는 별 의미가 없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7세기에는 조선 인구가 폭발적으로 불어났으며 그와 더불어 전국에서 농지 개간이 실시되었다. 농지 확충은 호랑이들의 땅을 빼앗는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니 인간들도 많이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두고 ‘호환이 늘어 백성들이 부들부들 떨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 pp.54-55
한국에서 처음 열린 서울올림픽에서 호랑이가 마스코트로 선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도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국 하면 호랑이가 떠올랐고, 다른 동물로 대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외국 기자들 눈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올림픽 마스코트가 호랑이라고요? 그렇게 큰 동물이 한국을 대표한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한국에 가면 호랑이를 볼 수 있겠네요? 어느 국립공원에 가야 볼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 땅에는 호랑이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은데……. 이곳에 사는 이들은 호랑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니 말이다.
사실 호랑이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마스코트로 선정된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을지 모른다. ‘호돌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달고 인간들 앞에 나서서 광대짓을 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대체 무슨 권리로 우리를 인간들 잔치의 마스코트로 선정 한 것인가요? 우린 한반도에서 살아오면서 수백 년 동안 인간들에게 탄압받았어요. 그것에 대한 진지한 사과나 반성 한마디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마치 호랑이와 인간들이 사이좋게 살아온 것처럼 포장하고 떠들어대는 것에 대해 분노합니다.” --- pp.116-117
1963년에도 표범이 잡혔다. 역시 가야산 자락에 사는 농부들이 잡은 것이었다. 오도산에서 약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가야산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
다음 날, 황 씨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복수에 나섰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몽둥이와 창으로 무장하고 숲을 뒤졌다. 바위 밑에서 쉬고 있던 표범을 발견한 개가 마구 짖어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표범은 그 소리에도 얼른 달아나지 못했다. 그걸 두고 사람들은 ‘표범이 전날 개를 잡아먹었기 때문에 취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옛날 사람들은 호랑이가 개를 잡아먹으면 술을 마신 듯 취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호랑이를 잡을 때는 주로 개를 미끼로 이용했다. 물론 그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고, 아마 표범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표범은 개가 짖어대고 사람들이 포위하고 있는데도 달아나지 않고 잔뜩 웅크렸다. 11세에서 12세 정도 된 노련한 표범이 그렇게 어리숙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돗개는 8시간이나 표범을 공격했고, 사람들도 표범에게 달려들어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내리쳐 죽였다.
표범을 잡은 사람들은 개한테 공을 돌렸다. 그 소문이 퍼져 신문에도 나오게 되었다.
“용감한 진돗개가 표범을 잡았다!”
그 기사를 본 사람들은 개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죽어간 표범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미 세상이 변해서 호랑이는 멸종했고, 표범도 멸종 단계였는데도 한 나라의 언론은 여전히 표범을 조선시대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 pp.151-152
성황당은 원래 ‘산왕당’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산왕’ 즉 호랑이 신을 모시는 곳이다. ‘산왕이시여, 우리 마을을 지켜주십시오!’ 하는 뜻이 들어 있는 말이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 단어가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하기 쉽게 ‘사낭당’ 또는 ‘사낭’이라고 바뀌고, 또 지역에 따라 ‘사’가 ‘서’로 발음되면서 ‘서낭당’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성황당은 할미당, 천황당, 국사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특히 할미당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인다. 주로 마을로 통하는 고갯길이나 산길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할미당이라고 부른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성황당을 할미당이라고 불렀으며,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올 때 몰래 그곳에 가서 돌탑을 쌓으며 소원을 빌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마다 나는 그곳에 가서 고개를 숙인 채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할미당이 사라져버렸다. 그곳이 사라지자 고향이라는 아름다운 세상을 지켜주던 영적인 힘도 사라져버린 것만 같아서 안타까웠다.
왜 우리는 그렇게 빨리 없애려고만 하는가.
왜 우리는 그렇게 빨리 변하려고만 하는가.
한국의 신화는 호랑이 신을 빼면 초라해질 정도다. 호랑이 신은 그렇게 수천 년 동안 한국 사람들의 외롭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호랑이 신이 성황당으로 변해온 것 또한 우리의 역사다.
--- pp.176-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