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0년 09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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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80쪽 | 680g | 153*224*30mm |
ISBN13 | 9788984314238 |
ISBN10 | 8984314234 |
발행일 | 2010년 09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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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80쪽 | 680g | 153*224*30mm |
ISBN13 | 9788984314238 |
ISBN10 | 8984314234 |
스파이크 The Spike (1931/04) 교수형 A Hanging (1931/08) 코끼리를 쏘다 Shooting an Elephant (1936/가을) 서점의 추억 Bookshop Memories (1936/11)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Spilling the Spanish Beans (1937/07, 09)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 Why I Joined the Independent Labour Party (1938/06) 마라케시 Marrakech (1939/12) 좌든 우든 나의 조국 My Country Right or Left (1940/가을) 영국, 당신의 영국 England Your England (1940/12)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 Wells, Hitler and the World State (1941/08)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Looking Back on the Spanish War (1942/가을) 시와 마이크 Poetry and the Microphone (1943/가을) 나 좋을 대로 As I Please (1944/01) 민족주의 비망록 Notes on Nationalism (1945/05) 당신과 원자탄 You and the Atom Bomb (1945/10) 과학이란 무엇인가? What Is Science? (1945/10) 문학 예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 (1946/01) 행락지 Pleasure Spots (1946/01) “물속의 달” “The Moon under Water” (1946/02) 정치와 영어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1946/04) 두꺼비 단상斷想 Some Thoughts on the Common Toad (1946/04) 어느 서평자의 고백 Confessions of a Book Reviewer (1946/05) 나는 왜 쓰는가 Why I Write (1946/여름) 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Politics vs. Literature: An Examination of Gulliver's Travels (1946/09~10)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 How the Poor Die (1946/11)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Lear, Tolstoy and the Fool (1947/03) 정말, 정말 좋았지 Such, Such Were the Joys (1947/05) 작가와 리바이어던 Writers and Leviathan (1948/03) 간디에 대한 소견 Reflections on Gandhi (1948/가을) 조지 오웰 연보 역자 후기 |
조지 오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학교 다닐 때가 아니었나 싶다. [동물농장]이나 [1984]와 같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언제 처음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내가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오래전에 자신이 살았던 시대 광부들의 삶과 사회상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한 르포르타주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으며 조지 오웰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그래서 양차대전 기간 중 당시 사회를 위협하던 전체주의 풍토를 비판한 [동물농장]과 [1984]를 다시 읽었다. 그리곤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런 조지 오웰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은 얼마 전에 읽은 [더 저널리스트 : 조지 오웰]을 통해서였다. 저널리스트로써 오웰이 작성한 기사와 칼럼, 기고문 등을 묶어 엮었던 그 책을 읽으면서 오웰의 다른 글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웰이 살았던 시대는 파시즘과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뒤섞여 요동치던 시대였고,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조국인 영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를 경계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대표적인 산문 7편을 묶은 [코끼리를 쏘다], 식민지 인도에서 경험한 경찰간부생활을 토대로 제국주의를 비판한 [버마시절]을 읽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서 멈추어야 했지 싶다.
이 책 [나는 왜 쓰는가]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살았던 오웰이 쓴 수많은 글 중에서 29편의 산문을 선별하여 엮은 책이다. 특히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의 대표적인 산문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통찰을 주었던 글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외의 산문들 또한 오웰의 삶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주고,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렇게 볼 때 오웰의 작품들을 읽기 전에 이 산문집을 먼저 읽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기 전에 멈추어야 좋았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에 나온 산문집 [코끼리를 쏘다]를 먼저 읽어서이지 싶다. 이 책에 실려 있는 29편의 산문 중 5편이 그 책에 실려 있다. 그래서인지 산문들을 읽어가면서도 중복된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런 느낌은 책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물론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오웰의 대표적인 산문을 다시금 읽는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밋밋하게 이 책을 읽었다.
오웰은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을 쓰는 동기를 허영심과 같은 순전한 이기심,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미학적 열정, 후대를 위해 현재를 기록한다는 역사적 충동, 그리고 정치적 목적이라는 네 가지로 구분한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적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목적에 있다고 규정했다. 그는 글의 주제는 작가가 사는 시대에 따라 결정되며, 그래서 작가는 글쓰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특정한 정치적 태도를 갖게 되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예비학교에서 맛보았던 상류층아이들과의 차별, 이튼스쿨에서 실감한 계급차이,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등을 통해 갖게 된 제국주의나 전체주의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오웰로 하여금 정치적 목적을 가진 글쓰기를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며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인 태도’(294쪽)라고 말하는 그는, ‘내 작업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300쪽)라고 고백한다. 이는 그가 저널리스트였을 때 기사나 기고문을 쓰는 이유가 ‘어딘가 존재하는 거짓말을 폭로하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실을 조명하기 위해’서였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만큼 글쓰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불편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읽힌다. 오웰은 자신이 정치적 목적으로 책을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사회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무조건적으로 좌파를 옹호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반대했다. 피압제자의 편에 서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믿었기에, 당시 지식인 계급이 지지했던 러시아식 공산주의에 비판적 시선을 보낸다.
오웰의 글을 읽다보면 흔히 비평가들이 말하는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그의 사상을 찾으려는 생각이 글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때때로 강박관념이 되어 책읽기를 방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비평가들의 말은 어떤 작품을 읽고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먼저 오웰이 살아온 시대와 그의 삶을 이해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에 대한 이해가 먼저여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오웰의 자전적인 산문들을 모아놓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은 넓어짐을 느낀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오웰읽기를 멈추어야겠다.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하기 싶다는 말처럼 한 번에 많은 것을 알려하다가 흥미 자체를 잃을 것 같아서이다.
같은 산문을 두고서 역자들마다 어떻게 번역했는지를 비교하며 읽어가는 것은, 역자를 달리해서 책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오웰이 영국의 3대 에세이스트라니, 그가 소설가, 사상가라는 선입관이 강한 것인지. 왜 글을 쓰는가? 라는 물음에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현실에 참여하기 위해서 아닐까 생각된다. 에세이 묶음인 이 책은 그가 펼쳐 놓은 글들의 향연이며, 조지 오웰의 사상을 크게 가난과 문학, 정치, 제국주의와 국수주의, 자연 같은 주제에 대한 묶음 선물 같다.
시작은 1931년에서 “스파이크”, 끝은 1948년 “간디에 대한 소견”으로, 그의 17년간의 글 모음이고, 그의 생이다. 어린 시절의 사립학교에서의 모순에서부터 인도의 간디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29편의 에세이는 그의 성숙의 과정 또한 잘 보여 주는 것 같다. 젊었을 때 파시스트 맞서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 프랑스와 영국에서의 빈민 생활은 그의 삶이었다. 어떻게 보면 좀 감추고 싶은 그의 이력을 그는 당당히 더러 낸다. 거의 일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돈의 빈곤 속에서 살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글을 써 사람들에게 외쳤다. 그가 바라보는 미래가 “1984”의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경고인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의 감회, 정말, 정말 좋았지. 매질이 아프지 않았다는 건 일종의 승리였고, 오줌을 지렸다는 수치를 어느 정도 씻어 주었다. 인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끔찍했고, 나는 생각보다 못된 아이였다.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기에, 지난 일들은 새로운 사실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잊혀져야만 한다. 빈부에 따른 이중적 교육, 항상 당하는 건 가난하지만 ‘재주’는 있는 아이들, ‘네 부모는 그럴 형편이 못 될 것”이라는 비꼼으로 좌절한다. 최상층이 정말 부러운 것은 젊을 때 부유하다는 점이었다. 두려워하는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내게 아버지는 언제나 ‘하지마’란 소리부터 하는 목소리 걸걸한 노인일 뿐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기록한 것이지만, “자기 어린 시절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과장과 자기 연민을 경계해야 한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일부가 된 스파이크, 노숙시절 당시의 그의 상황은 “당신은 젠틀맨인가? 팔자 한번 무섭게 사납소, 나리.” 우선 배가 고프기 때문에 영혼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 환자가 인간이라는 인식은 거의 없는듯한 태도로 일 배우는 데만 열중하는 그들의 모습이 묘했던 것이다. 사람은 물론 살고 싶어 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 덕분에 계속 살아가는 게 사실이다. 버마에서의 삶과 고뇌를 보여주는 교수형과 코끼리를 쏘다. 죽으러 가는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그가 느낀 것은 무얼까? 군중의 광기와 백인의 동양지배의 허위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사상을 밝히는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하다와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 보다,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 했는가 이다. 언론의 자유를 감히 허용할 체재는 사회주의 체제밖에 없다. 정서의 돌변은 신문과 라디오의 최면 탓이다. 잔학행위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순전히 정치적인 편향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진실은 적이 말하는 순간 거짓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 결국엔 그런 거짓들이, 아니면 그 비슷한 거짓들이 역사가 되어버릴 개연성이 다분한 것이다. 마라케시에서 차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 사람들 피부가 갈색인 곳에서는 빈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는 제국주의적인 영국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의 조국이었다. 좌든 우든 나의 조국과 영국, 당신의 영국에서 그의 조국 사랑과 번민을 보여준다. 다가오는 전쟁은 나에겐 여러 해 동안 악몽이었고, 저항하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의 선택에선 딱히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중산층에 주입되어온 애국주의가 마침내 효과를 본다는 것이다. 민족이란 것이 정말 있기는 한가? 제국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 식민지 지배는 지속하는 모순이다. 영국은 부자와 빈자라는 두 민족으로 나누어나 애국주의는 대체로 계급간 반목보다 강하며, 어떤 유의 국제주의보다 언제나 강하다. 민족주의 비망록. 민족이라는 것 단일한 인종, 지리적 영역에만 속하는 건 아니다. 정신적인 탈골. 민족주의라는 자기편이 저지른 잔악행위를 반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에 아예 귀를 닫아버릴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모든 민족주의자는 과거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에 사로 잡혀 있다. 좌파지식인 대체로 부정적이고 불만 가득한 태도와 언제나 건설적인 제안이라곤 없다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자기 나라의 공통문화와 단절되며, 그들의 입은 파리식을 즐기고, 의견은 모스크바식을 즐긴다.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 세계를 실제로 형성해가는 에너지는 민족적 자존심, 지도자에 대한 숭배, 종교적 신앙심, 전쟁에 대한 사랑과 같은 감정에서 솟아 나는 법이다. 웰스는 현대세계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온건하다. 간디에 대한 소견. 평가는 본능적으로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모든 유럽문명을 가능한 한 철저히 흡수하려는 생각했고, 좀 비인간적, 금욕과 자기의 선을 그음이 그의 실수였다. 우리는 하느님 아니면 인간을 택해야 한다.
문학에서 톨스토이의 세익스피어의 비판과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어 버린 서점의 추억과 시와 마이크에서 서정적이거나 수사적인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짐으로, 일반인 시에 거부감을 갖는 게 당연시 되고 말았다. 시 작품은 종이 위에 패턴보다는 소리로 여기도록 할 수 있다. 문학 예방에서는 지적인 자유 문제는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알릴 자유를, 아울러 강요에 의해 사실과 감정을 꾸며내지 않은 자유를 뜻한다. 우리시대의 정치적인 글쓰기는 거의 다 조립식 장난감세트의 부속처럼 맞추어진 구절들로만 이루어진다. 우리가 누려온 자유주의적 문화가 사실상 끝난 경우, 문예 자체가 소멸될 가능성이 휠씬 높다. 상상력이란 야생동물과 비슷한 것이어서 가둬두면 번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치 대 문학. 대조효과를 보여 주는 것이 걸리버의 주된 역할이다. 스위프트는 행복의 가능성을 불신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어느 작가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과 그의 작품을 즐기는 것과 나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궁극적으로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 말고는 없다. 톨스토이의 세이스피어 비판, 그는 왜 그런 공격을 했는가? 정치와 영어. 문장이 고약한 것은 비유가 상투적,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비유의 유일한 목적은 시각적인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상투적인 비유나 숙어를 쓰면 정신노동이 크게 줄어들긴 하지만 독자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문장의 깊은 뜻을 분명히 알 수 없게 된다. 정치적인 글에 특히 문제가 있다는 건 우리 시대의 엄연한 현실이다. 정치란 본래 거짓과 얼버무리기, 어리석음, 반목, 정신분열증의 집합체인 것이다. 정치적 언어는 거짓을 사실처럼 만들고 살인을 존중할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순진한 헛소리를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다.
과학에 대한 글로는 “당신과 원자탄”과 “과학이란 무엇인가?” 에서 그의 통찰을 보여준다. 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무기의 역사이다. 복잡한 무기는 강자를 더 강하게 만들고, 단순한 무기는 약자에게 갈고리 발톱이 된다. 군사기술의 발전이 국가에는 유리하고, 개인에게 불리. 산업화된 나라에 유리, 후진국에는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과학은 단순히 하나의 방식이나 태도이다. 과학자의 양면성, 과학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모든’ 분야에 대하여 더 현명한 접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나 예술가에 비해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며 자국 정부 쪽에 줄을 서고, 권력지향적(친정부적)이다.
나 좋을대로. 장미에 대한 칭찬, 행락지. 등에서는 오웰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두꺼비 단상에서 어떻게 보면 오웰의 글이라 믿기 어려운 글, 자연의 찬미와 소소한 즐거움을 이야기 한다. 봄에 깨어나는 두꺼비를 보며 “오래 굶주린 뒤라 대단히 영적인 모습인 것이, 흡사 사순절 막바지에 다다른 엄격한 가톨릭 신자 같다.” 중요한 건 봄이 주는 즐거움은 누구나 접할 수 있으며 공짜라는 점이다. 우리가 견뎌야만 했던 겨울들 때문에 봄이 다시 기적처럼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실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다 죽여버린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준비해야 할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일까?
어느 서평자의 고백과 나는 왜 쓰는가 그리고 작가와 리바이어던. 평하는 일을 오랫동안 한다는 건 유난히 달갑지 않고 짜증스럽고 피곤한 노릇이다. 글쓰기는 낱말을 다루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 동기는 순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에 있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형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가장하고 싶었던 것이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 이었다. 기발하게 쓰기보다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해왔다. 모든 좌파 이데올로기는 당장 권력을 잡는다는 기대를 갖지 않았던 사람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은 세계전체라는 차원에서 보면 자신들도 착취자가 되는 야만스러운 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피착취자라는 말에 넘어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작가 정치인들이 보았으면, 작가가 정치에 관여할 때는 일반 시민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관여해야지 ‘작가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 ‘어떤’ 정치 이념을 받아들이면 문화적 성실성을 지키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사실에 바탕을 둔 글로써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문제와 비전을 던져준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다. 이 글들이 쓰여진 것은 과거이고, 제법 시간이 지나가 버렸지만, 아직도 이런 이론의 함정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들을 보면서, 역시 실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언어가 타락한 시대이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전쟁이 나도 평화인 줄 알고, 노예가 되어도 자유로운 줄 알고, 모르는 게 자랑인 줄 알며 살게 될 것이다. 하물며 비판은 못할지언정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일에, 그런 타락에 곡학아세하며 동조해서야 되겠는가? (477쪽)
오웰의 [1984]를 떠올리며 논평을 붙인 역자 후기의 한 대목이다. 우리 주군은 천사이기에 무결점 무오류인데 하찮은 것들이 공연히 덤터기 씌워 단죄하려는 것이라며 범죄자를 극구 옹호하는 모 인사의 언동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전제군주정 시대, 아니 신권정치 시대를 살아가는 신민의 의식에 머물고 있는 그들은 오히려 확신에 차 있다. 헌재 법정에서 국가의 상징물을 펼쳐보이는 퍼포먼스는 젠체하는 것이 아닌 천박한 내면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다. 근대적 의식과 최소한의 교양도 못 갖춘 이들이 내뱉는 언어는 언어이되 말도 안되는 언어이다.
여기 실린 오웰의 글 중 몇 편은 100년도 넘은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고민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아득해진다. 향후 100년 이내에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승리를 거둘 것이라던 오웰의 예언은 틀린 셈이다. [동물농장]과 [1984]을 통해 탁월한 예지력을 보여주었던 오웰이 이 부분에선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오웰은 대여섯 살 때부터 작가가 되리란 것을 운명적으로 알았다 한다. 낱말을 다루는 천부적인 재주를 타고 났고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글쓰기 인생에 일대 격변을 가져올 사태에 직면한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글을 쓰려는 동기를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순전한 이기심의 발로로 글을 쓰려는 시도이다. 허영심과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쩨는 미학적 열정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나누고픈 욕구에서 글이 나온 것이라 보았다. 셋째로는 역사적 충동을 꼽았다. 후세를 위해 글로써 남기려는 의도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고 타인의 생각을 바꾸고자 하는 수단적 글쓰기인 것이다. 그 가운데 오웰은 넷째 동기, 곧 정치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는 스페인 내전 참가 이후 확고하게 굳어진 패턴이라 한다. 물론 그는 정치적 글쓰기를 하되 앞의 세 가지 동기를 아우른 포괄적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사악한 시절에 태어나 성직자와 인민위원 사이에서 방황하다 비록 팜플렛 저자가 되고 말았지만 자신이 쓰려 했던 이야기는 결말이 불행하고 묵직한 자연주의 소설이었음을 고백한다.
언어가 타락한, 아니 온 세상이 미쳐 날뛰는 시대이기에 언어는 부득이 정치적 수단, 계몽의 도구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며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가 오히려 자신의 글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고 믿는다.
맥없는 책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300쪽)
그러니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에 매달리는 사실에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그런 인생 역정에 여한이 없는 듯하다. 글쓰기라는 재능을 통해 자신을 오롯이 의식의 근대화와 인간화의 제단에 바친 셈이다. 제물을 받아든 신은 인류에게 상당한 분량의 선물을 내렸다. 그런데 오늘 여기 한반도까진 미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 책은 그런 오웰의 삶과 글쓰기의 정수를 담은, 한 권으로 요약한 조지 오웰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