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01월 29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24쪽 | 416g | 128*188*30mm |
ISBN13 | 9791158884925 |
ISBN10 | 1158884923 |
발행일 | 2019년 01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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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24쪽 | 416g | 128*188*30mm |
ISBN13 | 9791158884925 |
ISBN10 | 1158884923 |
시작에 부쳐 · 9 1장 여든을 넘기며 당신의 여가 시간에 · 13 나약한 이들의 반격 · 21 스러지는 것 · 26 따라잡기, 하 하 · 35 - 파드 연대기Ⅰ - 고양이 고르기 · 41 고양이의 간택을 받다 · 51 2장 문학 산업 제발 좀 '씹할' 그만해 줄래요? · 59 독자의 질문 · 65 아이들의 편지 · 72 내 케이크 지키기 · 78 아버지 H · 86 너무 필요한 문학상 · 96 TGAN과 분노의 포도 · 102 또 TGAN · 111 서사적 재능과 도덕적 난제 · 118 꼭 그래야할 필요는 없다 · 127 유토피음, 유토피양 · 135 - 파드 연대기Ⅱ - 말썽 · 143 파드와 타임머신 · 149 3장 이해하려 애쓰기 남자들의 단합, 여자들의 연대 · 157 퇴마사 · 163 제복 · 166 필사적인 비유에의 집착 · 172 온통 거짓 · 179 내면의 아이와 벌거벗은 정치인 · 187 약간의 제안: 식물연민 · 200 신념에의 신념 · 205 분노에 관하여 · 212 - 파드 연대기Ⅲ - 끝나지 않은 배움 · 227 끝나지 않은 배움, 속편 · 230 내 고양이를 위한 졸시 · 236 4장 보상 선회하는 별, 에워싸는 바다: 필립 글래스와 존 루터 애덤스 · 239 리허설 · 246 들로레스라는 사람 · 249 계란 빼고 · 260 노트르담 드 허기 · 270 트리 · 276 위층의 말들 · 282 첫 만남 · 295 살쾡이 · 301 오리건 하이 사막 목장에서의 한 주 · 314 |
어슐러 K 르 귄은 판타지와 SF 소설 뿐만 아니라 동화와 시, 그리고 에세이도 다수 남겼다. 수십권의 남겨진 책 중 에세이 컬렉션만도 십여 권이다. 에세이 콜렉션은 주로 매체에 발표된 글과 강의 내용 등을 수정해서 한 권으로 엮는다. 이 책이 특별한 점이 있다면, 블로그에 게재된 글들이라는 점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블로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나도 한번 해볼까? 따라쟁이 귀여운 르귄 님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블로그는 여전히 거기에 있고 책에 실린 내용을 제외하고는 클릭 한 번으로 도달할 수 있다. (웹 주소 : http://www.ursulakleguin.com).
한국에서 이 책이 출간되기 전에 이 책의 정보를 휴고상 수상 사이트에서 발견한 적이 있다. 해마다 주는 휴고상 수상 분야는 아주 많다. 장편, 단편, 중단편, 중편 이렇게 소설종류만 네 가지인데 여기에 시리즈, 그래픽 스토리, 영화, 드라마 등등. 그 중 Best Related Work 부문에서 이 책이 수상했다. 80이 넘은 노작가에게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No time to spare)라는 제목의 책은 나이듦에 대한 시적 안타까움과 슬픔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의 주제는 나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나이듦에 대한 소재는 지극히 일부로 첫 장 <여든을 넘기며>에 포함된 네 편 뿐이다. 나머지는 <문학산업>, <이해하려 애쓰기>, <보상> 이라는 주제로 장이 나뉘어져 있으며, 블로그 글이었던 만큼 전체적으로 작가의 평범한 일상을 엿볼 수 있고, 일상 활동 중 만들어진 생각의 타래들이 엮여 있다. 80대를 살아가는 작가가 아주 사소한 일들의 모퉁이 한 켠을 포착해서 타래에 엮으면 이 노작가의 작은 일상은 작은 공감이나 위안, 사소한 사생활 엿보기의 즐거움의 차원을 떠나 통찰을 준다.
첫 컬럼 <당신의 여가시간에 In your spare time>에서 그러한 주제를 다룬다. 51년도 졸업생의 60회 대학동창이라면 대략 80선인데, 이 노인들에게 대학측에서 설문지 하나를 돌렸다. 작가는 '여가시간에(In your spare time) 무엇을 합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긴다. 은퇴한 사람들이 남는 시간 말고 그 외에 무슨 시간을 갖는다는 걸까. 평생 작가로서 생계를 위한 글을 쓴 르귄은 여러 가지 '창의적 활동'을 취미로 여가 시간에 하기 위한 일로 여기는 설문지 작성자들의 생각과 달리, 자신은 은퇴를 하지 않았다. 그는 설문작성자들이 말하는 남는 시간을 자신의 하루 일정에서 찾지 못한다. 남는시간의 반대말은 바쁜시간일 것이며, 비록 많은 시간동안 신체를 유지 보수하는 일에 들이고 있지만,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명상을 하고 영화를 보고 담소를 나누는 그 자잘한 일상을 사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은 모두 소중한 순간이고 모두 바쁜 시간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흔히 은퇴 노인 하면 시간이 남아 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 어찌할 수 없이 쌓여가는 짐스런 시간 덩어리들을 풀어놓기 위해 골프나 세계여행과 같은 화려한 여가 활동에 집착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은 생을 생각해 본다면, 하루 하루 비록 늙은 몸을 유지보수하는 데 들이는 시간이라 할 지라도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한 줌 숨을 불어쉬고 내쉬는 일은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일이랴.
언어를 탐구하고 사랑하는 작가가 영어로 쓴 글 중에는 작가의 언어 내에서 소통해야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는 주제들이 종종 있는데, 예를 들어 문학 작품 중 '씹할(fucking)'과 씹 제기랄(shit)에 대한 단상이 그 중 하나다. 욕이 제법 다채롭고 때로는 대단히 특색있기까지 했던 시대를 기억하는 작가가 shit과 fuck으로 대동단결하여 통일된 현세대를 고루한 노인체로 불평하는 게 아니다. '욕의 기본법칙은 제자리를 벗어나는 것이다.(p62)'라는 거다. 즉, 똥과 씹이 욕이 될 조건은 똥이 있어야 할 곳에 안있고 지금 이 엉망진창인 상황에 있기 때문에 shit인 거고, 사랑하는 두 남녀가 서로가 갈망해서 해야 할 씹하는 행위가 공격적이고 위압적인 상황에서 하는 행위가 될 때 fuck인 거다. 제길 좆됐네(oh shit, we're fucked)는 아침에 원활하게 배변활동을 하고나서 사랑하는 사람과 성행위를 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억압과 학대, 경멸, 그리고 혐오의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다(p64)'. 그리고 이러한 '증오와 배설물은 욕설의 세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p64)'.
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분열증이거나, 편집증이라는 말을 하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한 속담에 대한 이야기를 언어적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속담이 되었든 시가 되었든, 나 역시 나말고 전세계가 그 뜻을 알고 있는 어떤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경우가 있어서 흥미로왔다. 케이크를 지키면서 먹기도 할 수는 없다. 이게 한국어로 쓰면 당연히 의역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바로 이해가 되지만 원래 속담인 'You can't have your cake and eat it too'라고 쓰여 있으니 르귄은 어떻게 있지도 않은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지 (How can you eat a cake you don’t have?)가 궁금하다. 열쇠는 have의 의미에 있었다. 흔하게는 가지다 소유하다는 의미지만 keep한다는 의미도 있고, 여기서 have는 keep의 의미로 쓰였다는 언어의 그 미묘한 차이를 알게 된 것이다. 가지고 있던 케익을 먹으면 없어지니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을 영어로 글을 쓰는 대작가가 바로 캐치하지 못했다는 사실의 고백에는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미묘하고 세심하게 다루어질 대상인지를 보여준다.
소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의미의 춤사위가 좋다. 말이 서로 관계를 맺는 의미, 가상의 세계 속 문장이나 텍스트 안에서 서로 관계를 이루며 무한의 변주를 다양하게 만들고 공유하는 마들의 춤이 좋다. 글쓰기는 말의 이러한 두 가지 양상을 통해 무궁무진한 연주로 나를 사로잡는다. 그것이 내 필생의 업이다.(85)
내 경우, 르귄의 소설을 읽으면 실제 어려운 것과는 별개로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의도가 선명하지 않고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 때문이다. 뜻의 파악이 제대로 안되는데도, 문장들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이유가 어쩌면 선명하지 않은 그 모호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독자의 편지를 많이 받는 어슐러 르귄은 이 이야기가 뭘 뜻하는지 자신에게 묻지 말라고 말한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다. 여러분의 몫이다(p64)'. 분명 어떤 이야기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책을 읽는 독자와는 아주 다른 의미가 될 것이며, 또한 그 작품이 가졌던 의미는 시대가 변하고 개인의 경험과 생각이 변하면서 함께 변한다는 것이다. 예술과 과학은 다르며 열역학 제 2법칙은 언제 어디서 읽혀도 의미가 불면하지만, 허클베리 핀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말한다. '내 글이 오독되고 오해받고 오역되더라도, 그게 어때서(p69)'라고. '예술은 해설이 아니며, 예술가는 예술을 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p69)라고 덧붙이면서.
어느날 작가는 티셔츠를 만드는 회사에서 자신의 인용문 하나를 사용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창의적인 어른은 살아남은 어린이다 ('The Creative adult is the child who survived'). 창의성이라는 말이 기업적 사고에 점령당한 이후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게된 저자는 저 문장을 쓴 기억이 없고, 출처를 알아보려고 구글링해보니 르귄이 쓴 말이라는 것으로만 나오고 대체 그 출처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중 quotes-clothing.com에서 보다 긴 문장이 발견되었는데, 클로징에 Sincerely yours를 패러디하여 Falsely yours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짜 문장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작가는 공개적으 로 2014년 블로그 독자에게 부탁까지 했건만 했는데, 후에 이 책이 쓰여진 시점에서 그때까지도 굿리즈와 그래픽 아트협에 저 창의적 어른의 문장을 잘못 인용해 놓고 그 출처를 유명한 격언이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작가를 괴롭히는 것은 그 문장 자체가 의미하는 뜻이다. 그 말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그게 뭔 뜻인가는 관심도 없다.
'그저 시시하고 뻔한 말을 덥석 받아들여, 써먹을 문장으로, 심지어 전시용으로 사용하는 호기로움, 인용의 출처에 대해 딱히 신경쓰지 않는 호기로움, 인용의 출처에 대해 딱히 신경쓰지 않는 경솔함... 누가 뭐래 정보만 주면 됐지의 태도, 게으른 정신은 말과 생각 모두를 타락시킨다. '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이 점이 이 책의 많은 내용중 가장 명료하게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어서 제목으로까지 써놨는데, 다른 내용도 좋은 게 많아서 너무 길어졌다. 독자들은 양해하시길. 내가 르 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아는 분들은 길어짐을 용서하실듯. 과학 소설을 쓰는 작가가 마주치는 질문 중 하나는 과학과 소설이 서로 단어적으로 대척점에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은 사실이고 소설은 허구다. 하지만 과학과 과학소설이 다른 점은 과학이 과학이 소설을 꾸며주는 지시어라는 사실이다. 과학적인 허구. 이렇게 말하면 말이 되려나. 아무튼 여사님이 '진화론을 믿는다'라는 말을 불편하게 느꼈던 순간은 내게도 똑같이 불편했다. 과학은 사실이기 때문에 함께 오는 믿는라는 동사가 틀리게 사용되는 예라는 것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가설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과학적 증거는 진화론의 가설을 완전히 뒷받침한다. 이제까지의 증거가 그토록 철저하고 충분하더라도 이론은 이론이며, 추가적 관찰을 통해 방향이 달라지고 보완되고 다듬어지고 확장될 수 있다. 이제까지 진화론은 반증을 위한 엄청난 도전들을 이겨냈으며, 설명이 필요한 일들을 해석해준다. 그는 사실관계의 문제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그만 사용하길 바란다. 사실을 이야기할 때는 안다라는 동사를 써야 하고 종교나 신념을 말할 때에 믿는다는 말을 써야 옳다. 진화론에 대해서는 그것이 수많은 사실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하더라도 꾸준하게 변화하는 이론이기에 수용한다라는 표현이 옳다. 그가(나도 덩달아) 애타게 주장하는 것은 과학과 종교를 같이 섞지 말라는 거다. 과학은 과학의 영역이 있고, 그것은 사실관계의 지식을 다룬다. 종교는 종교의 영역이 있고 그것은 지식과는 관계가 없다. 과학의 영역에서 믿음은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해가 된다. 오직 지식만이 유효하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을 믿는가? 아는가?
믿음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믿음이 유용하면 가치가 올라가고 지식에 의해 교체되면 가치가 떨어진다. 또한 유해하면 부정적으로 변한다. 일반적으로 삶에서 믿음의 가치는 지식의 양과 질이 증대될수록 그 필요성이 감소한다... 우리의 지식이 전무한 영역...은 믿음에 기대게 된다. 종교나 영적 영역이라고 일컫는 전 분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오직 믿는 것 뿐이다. 그리하여 어떤 영역에 대해 믿음을 갖게된 사람들은 그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른다.(293)
오늘 아침 기사에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소위 운동권 출신 씩이나 했던 안희정 아내의 소식을 제목으로 읽었는데(당연하게도 그런 가십성 이야기에 정치적 음모설과 페미니즘을 섞어 두루두루 물타기하는 기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관련된 대목 한 구절을 조금만 인용한다.
여성의 주체성과 상호의존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남성 및 남성 지배의 혜택을 받는 여성들의 조롱 섞인 증오에 직면한다. 여성 혐오는 결코 남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남자들의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남자들만큼, 혹은 남자들보다 더 강하게 스스로를 불신하고 두려워한다.
고양이 파드의 입양 과정과 함께 사는 이야기는 따뜻하고 아늑한 감정을 준다. 파드 이야기는 모든 챕터에 걸쳐 조금씩 있고 일상을 이야기할 때에도 계속 등장한다. 식물을 포함한 전유기체에 대한 저자의 사랑과 관심을 엿볼 수 있지만 함께 사는 동물인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동반자로 하나의 개체로 교감하고 갈등하는 모습이 그려져서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동물을 키울만큼 부지런하거나 그럴 책임감은 없고 물컹물컹하거나 부드럽거나 혹은 꺼끌꺼끌한 동물의 몸을 만지는 것 자체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유튜브에서 돌아다니는 영상들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나의 소소한 낙이라 할 수 있다. 어제는 고양이가 자기 쓰다듬어 달라고 주인의 손을 자기 머리위에 얹는 짧은 동영상들을 뒤져보았다. 르귄 여사가 고양이 파드와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생쥐 사냥 이야기였다. 사료가 아니면 아무것도 먹지 않는 이 애완 고양이 파드는 본성에 끌려 쥐를 쫓고 잡기까지 성공하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이 부분을 르귄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파드가 생쥐를 데리고 나타났다. 눈에 띄게 움직임이 덜했지만 아직 살아있었다. 파드는 혼란스럽고 문제가 생긴 듯, 갈팡질팡해 보였다. 생쥐를 사냥하면 그렇다. 하드는 혼란스럽고 문제가 생긴 듯, 갈팡질팡해 보였다. 생쥐를 사냥하면 항상 그렇다. 본능이 내리는 명령에 사로잡혀 사냥을 하고 잡아서 트로피로 삼든 장난감이나 음식으로 삼든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가지고 온다. 하지만 어떤 본능이나 교육이 부족한지 죽여서 마무리하는 방법을 모른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 작가의 글을 좀 읽었고, 또 더 읽을 예정이고, 이런 만큼 이 작가에 대한 관심이 깊은 차에 이 책을 도서관에서 만났다.(코로나 19로 휴관이었던 우리 동네의 도서관이 열리고 처음으로 붙잡은 책이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사서 읽어도 좋을 글들이구나, 생각이구나, 오래 머물게 해 주는구나. 여든까지 살면서 이런 생각을 계속 할 수 있다면, 나도 이만큼 살아 있고 싶다고 여길 만큼이었다.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양이와 고양이가 아닌 것. 파드는 작가와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의 이름이다. 작가는 자신이 고양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파드에게 선택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글을 읽다 보면 그런 것 같아진다. 고양이가 선택한 작가라, 그리고 작가는 선택받은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글을 쓴다. 애정과 관심을 듬뿍 담아서. 작가라면 모름지기 이런 정도의 애정을 쏟을 대상이 하나 이상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독자로서 추측해 본다.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고양이가 아닌 것들에 대해 쓴 글은 다시 네 갈래로 나누어 놓은 작가의 생각들이다. 깊고 깊어서 좋았다. 요즘 유행하는 신변잡기의 가벼움이 보이지 않아 매우 좋았다. 작가가 자신과 자신의 삶과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다른 차원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솔직하다고 해서, 적나라하다고 해서, 다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버렸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감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이런 생각마저 갖게 되고 말았다.
그리 많지 않지만 해야 할 이야기는 다 담겨 있는 듯하다. SF 작가로서 문학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 여성이라는 존재와 처우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 80세에 이르면서 남은 삶 혹은 시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 미국과 미국인으로서 갖고 있는 생각 등등. 살아 있었다면 노벨상도 받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상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 그녀의 글을 더 읽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만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스시 책이 두 권 남아 있다. 아직은 아끼고 있다.
2010년 여든을 넘기며 블로그에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쓰기 시작한 어슐러 르 귄 작가. 2018년 88세로 영면에 들기까지 이어진 날카로운 사색, 반려동물 파드와의 일상이 더해져 감칠맛 나는 글이 담긴 노작가의 마지막 에세이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어스시 연대기, 헤인 시리즈 등 빛나는 작품들로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의 거장으로 불린 어슐러 르 귄. 저는 유려한 문장으로 묵직한 대서사시를 보여준 <라비니아>로 르 귄 작품을 처음 만나 반해버렸답니다. 거장의 판타지 소설에 빠져들기 전에 냥집사라는 동질감을 불러일으킨 이 에세이를 먼저 읽어보게 되었네요.
2010년 하버드로부터 받은 50회 동창회와 관련한 설문조사 에피소드로 시작합니다. 르 귄은 말도 안 되는 질문들 일색이라며 일침을 놓습니다.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질문들에 일일이 토를 다는 르 귄. 그 속엔 미국 정치, 경제 및 페미니즘 같은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르 귄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서 르 귄의 인내심은 폭발합니다. 질문의 보기는 골프로 시작합니다. 르 귄의 직업인 글쓰기 같은 창의적 활동은 한참 뒤에 있습니다.
전업작가인 르 귄은 은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질문에 대해 르 귄 스스로의 생활을 생각해보자면 '할 일이 없는 시간'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잠을 자고, 읽고, 쓰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고, 걷고, 여행하고, 이따금 영화도 보고, 고양이와 노는데 쓰는 시간은 여가 시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년 시기에 여가 시간이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직장에서 일하지 않는 시간을 뜻하는 여가시간. 그렇다면 은퇴한 사람들이 많은 여든이 된 그들에게 '남는(spare)' 시간 외에 뭐가 있을까 하며 말이죠. 늘 해왔던 너무나 쉬운 일들이 노년이 되면서 점차 어려워짐을 몸소 느끼는 노년 시기. 르 귄은 말이 명언입니다.
나는 시간을 남겨둘 수가 없다. 하버드 대학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다음 주면 여든하나가 된다. 내게는 남겨둘 시간이 없다. - 책 속에서
길고양이나 유기묘에게 간택당해 오랜 세월 고양이와 함께 한 작가. 그동안 간택 당하기만 했던 그에게 드디어 선택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동물 보호 단체 휴메인 소사이어티에서 한 살 넘은 턱시도 고양이가 눈에 들어온 겁니다. 귀여움 종결자라며 첫눈에 반해버린 고양이는 그렇게 르 윈의 반려 고양이가 됩니다.
묵직한 주제마저도 위트 넘치는 글맛으로 선보인 어슐러 르 귄. 반려동물 파드와의 에피소드도 르 귄 작가가 쓰니 색다른 맛이!!
노작가라면 모름지기 고상하고 우아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깡그리 없앱니다. 욕설과 과격한 표현을 담은 작품, 의미심장한 답변을 바라는 독자의 질문, 위대한 미국 문학이라 불리는 작품, 판타지 문학 장르에 대한 편견에 대한 대처 등 르 귄은 솔직하게 지릅니다. 블랙유머도 꽤나 나오네요. 암튼 노작가의 에세이라 해서 고리타분하거나 우수에 젖은 감성팔이일 거란 편견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어스시>에 관한 짧은 언급과 함께 판타지 글쓰기에 대한 힌트를, 영웅 외에는 잊어버리는 위대한 고전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의견은 베르길리우스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새롭게 조명한 <라비니아>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와 증오에 대한 이야기는 묵직합니다. 남자들의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불신하고 두려워하는 시대에 여성들이 추구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할머니가 된 르 귄 작가 역시 길거리에서 무관심, 혐오 혹은 적의를 담은 시선을 느낀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의 눈빛은 자신과 다른 동물 종을 바라보는 동물들의 눈빛과도 같습니다. 노인과 함께 살아보지 않은 아이들은 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인간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가치를 짚어줍니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는 불필요한 고통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노작가의 바람이 담겨있습니다.
탁월한 사냥꾼임에도 사냥감을 죽여야 한다는 것도, 죽이는 방법도 모르는 살짝 허술한 턱시도 고양이 파드. "내게 대놓고 반항하는 고양이는 처음이다."라며 한탄을 하다가도, 흠잡을 데 없는 본능과 기술도 아직 미처 다 배우지 못한 것뿐이라며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그러다 얼떨결에 죽은 쥐를 위해 르 귄 작가는 시를 짓습니다. 르 귄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작가 특유의 품격이 느껴지는 문장으로 만날 수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여든을 넘기며 자신의 노화에 대한 감정, 작가로서 하고 싶은 말들,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 그리고 일상의 단상들을 엮은 에세이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라고 밝히며 시작하지만, 정작 본인은 남겨둘 시간이 없기에 하나하나 다 중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더는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어 아쉽지만, 어슐러 르 귄 작가의 옆집 할머니 같은 면모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책이 있어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