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 평범한 사람들이 일으킨 항쟁
5.18은 왜,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을까? 1979년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18년 만이었다. 그리고 곧 전두환을 비롯한 군사반란 세력들이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정권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섰다. 서울역에 10만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민주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민주화의 일정을 방해하려는 신군부에게 반격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신중론이 득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는 중단되었다.
광주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한 시위가 일어났다.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계엄령 해제’ 등을 요구한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열렸다. 그리고 5월 18일, 완전 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 전남대 학생들을 통제하면서 5.18은 시작된다. 공수부대원들은 “학교 출입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던 학생들을 진압봉을 휘두르며 마구 진압했다. 공수부대원들의 행동은 이전에 익숙히 봐오던 시위 진압 양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군의 만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도심으로 진출했다. 계엄군들은 금남로에서도 학생들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가톨릭 사제의 입에서조차 “M16 소총이 내 손에 있었으면 나는 전원을 사살했을 것”이라는 절규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계엄군들의 ‘상식 밖’의 만행이 벌어지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대학생들보다는 양복 입은 회사원들, 주변 가게의 종업원들, 노동자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들, 고등학생들이 더 많이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열흘간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5.18은 순수한 민주화 요구에서 시작되었고, 5.18에 가담한 사람들은 ‘북한군’도 ‘불순분자’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시민군을 만들고, 5월 27일 마지막 도청이 함락되기까지 싸웠던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군인의 총에 맞아 죽어간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가 울리며 함께 터져나온 총탄으로 평범한 이웃들이 죽어갔다. 애국가를 합창하며 태극기를 흔들던 국민을 국가가 죽인 것이다. [화려한 휴가]의 주인공 민우 역시 택시 운전을 하며 공부 잘하는 동생 진우를 뒷바라지하는 낙에 살았으나 이때 동생을 잃고 만다.”
5.18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일으킨 항쟁은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1968년 혁명에서도 보였던 현상이다. “흔히 대중들이 혁명적 이념을 갖고 봉기를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중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는 대항 이데올로기를 획득한 후에 봉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 평등, 인권 등의 보편적 이상(ideal)을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하고자 할 때 봉기가 일어나며, 이 과정에서 대중들의 힘이 조직될 때 혁명으로 나아간다.”
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는가
: 총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귀중한 생존 도구
“이어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거리 위로 격정에 못 이겨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뛰어나간 청년들에게도, 부상당한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든 사람들에게도 어김없이 조준 사격이 가해졌다. 공수부대가 물러감으로써 평화적인 해결이 이루어지길 바랐던 시민들의 소박한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이제 광주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흔히 역사 왜곡 세력들은 5.18을 ‘폭동’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총을 들고 군대에 대항해 싸웠으니 폭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을까?
이 책의 9장 [저항하는 사람들의 윤리]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당시 계엄군은 광주 시민을 적으로 여겼지만, 시민들은 군인을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당시 발표된 유인물 [대한민국 국군에게 보내는 글]에도 “우리들은 국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민주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되어 있다. 시민들이 식사를 하지 못한 군인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눠준 이유도 군인을 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당시 시민군이 발표한 성명서에 ‘총을 든 이유’가 명백하게 밝혀져 있다. 계엄군이 발포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총을 드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즉 “시민들에게 총은 타인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공수부대의 만행에 맞서 자신과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무기로서 귀중한 생존 도구”였다.
이 글은 시민들의 행위를 ‘반폭력anti-violence’으로 명명하면서 ‘시민들이 무장투쟁을 한 이유’를 설명한다. “이것은 무장투쟁이 곧 반폭력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무장투쟁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견지하려고 했던 윤리적 관점과 태도를 가리킨다. 대항폭력이 두 적대 세력 중 어느 한쪽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절멸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면, 반폭력은 저항 세력이라고 할지라도 절멸적 폭력 사용에는 반대한다. 또한 비폭력이 모든 폭력 사용에 반대하는 것과는 달리, 공수부대와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과 같은 극단적 폭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방어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더 나아가 반폭력 정치는 경찰과 군대의 절멸이나 물리적 패퇴가 아니라 그 명령체계를 마비시키는 것을 지향한다.”
즉 시민들은 상대방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총을 든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것이었다. 당시 배포된 《투사회보》에 “계엄군이 발포하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는다”라는 행동 강령이 적시되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5.18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광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민주화의 과제”
“광주의 진실은 저에게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고,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크나큰 부채감이었습니다. 그 부채감이 민주화운동에 나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성장시켜준 힘이 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5.18 37주년 기념사)
문재인 대통령은 5.18의 진실에 대한 분노와 부채의식이 자신을 성장시켜준 힘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10장 [5.18 공동체]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으로 5.18 공동체를 재해석하고 있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고립된 상태에서 생명을 걸고 싸웠고, 일시적으로 승리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많은 사람들이 5.18과 관련된 수많은 증언과 고백에서 부끄러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정서는 비단 광주 시민에게뿐만 아니라 광주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의 감정이었고, 그 부끄러움은 부채의식으로, 하나의 역사의식으로 공유되어 한국 사회를 움직였다. 5.18은 1980년대에 걸쳐 지금까지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의 죄의식의 원천이자 도덕적 정당성의 근거가 되었다.
3장 [진실을 향한 투쟁]과 7장 [5.18 학살의 애도와 민주주의]는 5.18 이후의 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5.18을 하나의 금기로 만들었다. 5.18을 발설하지 못하게 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진실을 규명하려는, 민주화를 이루려는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광주항쟁을 짓밟고 집권한 군부 세력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민주화운동으로,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자행한 시민 학살이 남긴 부정적 유산을 청산하고 올바른 역사를 복원하려는 과거사 청산 운동으로, 5.18의 기억을 재생시키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한 문화투쟁으로, 또 통일운동으로 표출되었다. 5.18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곧 ‘광주 알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대학가에서는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거나 순례하는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광주 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전개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다. 광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민주화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6월항쟁은 5.18의 바람에 대한 7년 만의 응답이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비로소 시민들이 봉기한 6월항쟁으로 무너졌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사회운동의 힘으로 성취되었다. 이를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기원을 이루는 것이 5.18광주항쟁이다. 12.12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내란 범죄를 자행한 군부의 학살에 맞섰던 광주 시민들의 고독한 저항은 6월항쟁에서 전국적인 응답을 얻었다.”
그들은 왜 5.18을 왜곡하는가
: 진실이 명백하게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
“거짓말은 처음에 부정되고, 그다음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괴벨스, 나치의 선전장관)
5장 [5.18, 진실과 거짓말]은 그동안 군사반란 세력과 극우 세력이 어떻게 5.18을 왜곡해왔는지, 그 양상과 배경을 밝히고 어떻게 왜곡에 대처할지를 밝히고 있다. 5.18이 일어난 지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들은 계속되고 있다.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 거짓이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되새겨봐야 한다.
군사반란 세력은 5.18이 일어나기 전부터 ‘북한 남침설’을 날조하여 국내 안보 위기를 조장했다. 독재정권들이 늘 써오던 방식이었다. 이 여론 조작의 목표는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 남침설’은 곧 허위로 밝혀졌고, 군사반란 세력은 5.18 당시와 그 이후에 더 이상 써먹지 않는다.
5.18 당시 군사반란 세력은 지역주의, 김대중 추종 세력, 간첩 등의 유언비어로 진실을 왜곡했다. 군사반란 세력의 5.18 왜곡 프레임은 무엇보다 먼저 공수부대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시위 진압 현장에 출동한 공수부대원들은 평범한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시위대를 ‘적’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에 세뇌당한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또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국민에게 전파했다. 언론은 광주?전남 이외 지역 국민들이 5.18을 간첩, 공산분자, 김대중 추종 불순 세력들의 지역주의적 선동이 초래한 폭동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저항하는 5월 민중을 격리, 차단, 고립시켰다. 군사반란 세력과 언론은 5.18의 진실을 왜곡하여 지역주의와 반공주의 프레임에 5.18을 가둬버렸다. 오랫동안 5월 민중과 광주는 한국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이 프레임은 이명박?박근혜 집권 시기 정부의 지원을 받은 뉴라이트 계열 극우 세력이 가담하면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몇몇 보수언론들도 이를 조장하고 있다. TV조선과 채널A는 이들이 주장한 “5.18 광주사태 자체가 김정일, 김일성에 드리는 선물”이라는 내용을 여러 차례 방송하기도 했다. 자유한국당의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이 프레임을 이용하고 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는 이유는 진실이 명백하게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발포 책임자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전두환 등 가해자는 반성도 하지 않았다. 가해 주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두환과 17년 형을 선고받은 노태우가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합의에 의해 특별사면을 받았다. 따라서 이제라도 국가가 책임지고 명백하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
‘모두의 5.18’로 가는 길은 있을까
: 함께 눈물 흘리며 공감할 수 있을 때
왜 5.18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모두의 기억이 되지 못했을까? 5.18의 희생 위에 6월항쟁이 일어나 민주화를 달성한 후 국가가 나서 5.18의 진상을 규명하고 주동자를 처벌했으며 보상과 기념이 이루어졌는데도, 왜 5.18은 광주만의 기억과 기념으로 축소되어가는 것일까? “국가가 나서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기념할수록 5.18을 향한 국민의 관심은 점점 더 식어가고 있는 것이다.”
6장 [‘모두의 5.18’로 가는 길]은 어떻게 세계인이 홀로코스트의 역사에 공감해갔는지를 살펴보면서 ‘광주의 5.18’이 어떻게 하면 ‘모두의 5.18’이 될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홀로코스트가 세계인이 공감하는 역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나도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심리적 동일시, 즉 공감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소설, 시, 만화, 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이 큰 역할을 했다.
홀로코스트가 세계인이 받아들이는 역사가 되었듯이, 5.18도 모두의 5.18일 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5.18을 1980년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에도 일어날 수 있는, 그렇지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감성으로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고 공감할 수 있을 때, 5.18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동시에 모두의 5.18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즉 5.18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인식하고, 나 자신이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공감할 때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 “우리 모두 차마 그들을 보고 매몰차게 돌아설 수 없었던 영화 [택시 운전사]의 김사복과 함께 눈물 흘리며 그들과 함께하고자 할 때 5.18은 우리 모두의 5.18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모두의 5.18’이 되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사회에는 아직 ‘악’이 건재하다. 책임자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를 위해 5.18을 악용하는 세력들도 있다.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민중들의 희생은 안중에도 없는 세력들이 있다. 그들이 있는 한 아직 5.18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계속 5.18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