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순간, 모든 새로운 경험은 결국 쇼핑과 연결된다. 계절이 바뀌면 새로운 식물과 토분을 들여야 하고, 겨울이 오면 우리에겐 조금 더 따스한 러그와 실내화가 필요해진다. 일본을 다녀온 뒤면 식당에서 본 간장 종지나 상점 카운터에서 눈여겨봤던 트레이를 찾게 되고, 영화를 보다가는 로브 가운을 바꾸고 싶어진다. 그래서 조금씩 쓸 수 있는 돈이 생기기 시작한 나이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고 알아보고 또 샀다. 캠퍼스를 벗어나 지금까지 10여 년의 세월 동안 나의 삶은 무언가를 사기 위한 여정이었다. 언제나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쇼핑 목록은 내 삶의 이유였고,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과 갖고 싶다는 열망은 마누 지노빌리의 심장처럼 뜨거웠다.
--- p.5
쇼핑은 내게 아일랜드의 애런 제도부터 미국 포틀랜드와 캘리포니아의 시에라 산맥을 넘어 뉴욕과 파리, 뮌헨을 거쳐 일본의 오카야마현과 도쿄를 넘나드는 세계 여행이기도 했다. 새로운 브랜드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가령 그 브랜드가 탄생한 지역에 실제로 여행을 간 사람보다 그 동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큰 애정을 품게 된다.?
--- p.7
내일의 일은 알 수 없다. 더 정확하게는 온전히 나만의 힘으로 만들어갈 수 없다. 당장 새해부터 시작될 취업전선에서 어떤 전투가 벌어질지 역시나 모른다. 연인은? 올바른 정신세계를 갖고 있다면 당연히 계획해서 만들 일이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노력하고 도전할 뿐이다. 그런 만큼 온전히 내 힘과 정성으로 만들어가고, 가꾸고, 유지하는 오늘 하루가 내게는 매우 소중했다. 단순히 집이라서가 아니라 최대한 가꿔서 마련한 나만의 공간이 갖는 안온함을 원했다. 내 공간이 주는 휴식과 위로는 내 힘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이고, 더 나아가 내 세계관이 형상화된 정서적 왕국이다.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며 기거하는 공간이 아니라 내 정신세계와 연결된 다른 차원의 자아다. 그러니 내일을 위해 노력하는 만큼 오늘의 안온함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방을 가꾸는 것은 오로지 내 힘만으로 이룩할 수 있는 변화이며 삶의 의지와 애정을 담아내는 태도기 때문이다.
--- p.23
1인 가구에게 가구는 늘 마음의 짐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경제적인 이유인데, 집은 어쩔 수 없이 좁고, 언제 이곳을 뜰지 모르며, 한번 사면 바꾸기 어렵다. 그렇다고 오 픈마켓 최저가를 검색하며 저렴이를 들이자니 공간 심리 차 원에서 마뜩지 않고, 이케아에 전적으로 의존하자니 글로벌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내심 불편하 다. 값을 차치하더라도 디자이너의 원목 가구가 늘 정답도 아니다. 언제 거처를 옮길지 모를 도시 유목민 입장에서 경 량성과 기동성, 그리고 잠시 쓰다가 버려도 아깝지 않을 패스트패션의 가치 또한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 p.28
갓 체크인 한 호텔처럼 아늑하지만 살림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정돈된 살림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관리가 잘된 질 좋은 수건은 성실함과 직결되는 척도다. 살림살이에 잠식된 삶과 가꾸며 살아가는 삶 사이의 가장 치열한 전선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매일 접하는 것,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에 소홀한 경향이 있다. 그것이 비싼 돈을 들여 리모델링을 하고 세련된 가구를 들여놓고, 이런저런 소품으로 꾸민 식탁의?의자 위에 알지도 못하는 이의 몇 년 전 결혼 기념 수건이 널려 있는 이유다.?
--- p.62~63
자신의 취향을 전시하며 사는 삶처럼 피곤한 일도 없다. 너무 비싼 물건을 고를 필요도 없고, 아무도 모르는 공방의 특이한 제품을 써야 일상이 더욱 윤택해지고 특별해지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저 물 한 잔 마시더라도 언제나 변함없는 위안과 안정을 줄 수 있는지와 같은 일상성에 있다. 그러니 실용성이 너무 떨어지는 전위적인 제품이나 깨먹었을 때 심적 타격이 깊을 고가의 물건을 굳이 쓸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마시지는 말고 그저 머그잔과 유리잔 정도는 꼭 갖추고 계절과 음료의 성질에 따라 매치하며 살길 권한다.
--- p.118
살림에 대한 관심도 프렌치 프레스와 마찬가지다. 유행이나 최신과 상관없이 나만의 적당함을 찾는 게 중요하다. 살림은 경쟁의 영역도 아니고, 뽐내야 할 기술도 아니다. 어떤 비기를 갖고 있거나, 신묘한 꿀팁이나 혁명이라는 아이템을 품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아이템은 살림에 애정이 있다면, 더 잘해보고 싶다면, 연구하고 찾아보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인연과 같은 거다. 자취생들을 위한 최고의 세제, 최고의 행주, 최고의 청소도구, 이런 걸 알려주는 포스팅들과 광고는 그래서 부질없다. 그보단 살림과 공간에 애정을?가질 수 있게 울타리를 두르도록 돕는 것, 이것이 살림에 관심 있는 이가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다.
--- p.147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공간은 이것을 때론 풀어놓고 때론 숨겨놓는, 무대이자 미로다. 누군가의 집에 놀러가는 게 재밌는 것은 그 사람을 알아가게 되는 흥미로운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집에서 살림이 아니라 사람을 보게 된다. 다른 이의 집을 구경하는 재미는 얼마나 넓은지, 어떻게 멋지게 꾸며놓았는지를 보는 게 아니다. 다른 이는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 지켜보는 데 있다. 정답은 없다만, 스포츠팀이든, 아티스트든, 책이든, 독립잡지든, 장인의 공예품이든, 자신의 공간에 자기만의 수집품을 갖추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 자체가 바로 당신이란 인간을 설명하는 단서이자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 p.178~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