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11월 15일 |
---|---|
쪽수, 무게, 크기 | 336쪽 | 425g | 150*225*30mm |
ISBN13 | 9791190398039 |
ISBN10 | 1190398036 |
발행일 | 2019년 1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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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36쪽 | 425g | 150*225*30mm |
ISBN13 | 9791190398039 |
ISBN10 | 1190398036 |
일러두기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해제 연표 |
각설하고,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믿지 말아야 할 신을 믿는다는 '불경죄'와 선량하고 건전한 그리스 청년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에 대해서 '변론'을 적어놓은 글이다. 물론 아시다시피 소크라테스가 직접 글로 남긴 내용은 아니고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적어놓은 내용이다.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가 하지도 않은 말을 적었다는 의심은 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위해서 변론을 했지 '변명'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느 날 자기 친구가 델포이 신전에서 받은 신탁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 신탁이라는 것은 "가장 지혜로운 자는 소크라테스다"였단다. 델포이 신탁은 두루뭉술하고 애매해서 그 참뜻을 살피기 어렵다고 하는데,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소크라테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나 '권력'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밉보이고 말았기 때문에 '사형판결'까지 받은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지혜를 알아보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바로 '산파법'이라는 대화술이다. 산파란 '출산에 임박한 산모가 건강한 아기를 적절한 방법으로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므로 소크라테스도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에게 '가장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공세를 펼치는 대화술을 써먹은 것이다. 이를 테면, 용감한 장수에게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퍼붓고, 엄청난 부자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꼬리에 꼬리를 물며 또 묻고 다시 묻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나서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에 던지는 말은 늘 "그것 보십시요. 당신도 진정한 용기(행복)를 모르고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나는 용기(행복) 따위는 잘 모르겠소'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당신은 그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이오"라고 상대를 골리는 말로 끝맺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부아가 치민 상대가 "그럼 소크라테스 당신은 잘 알고 있다는 말이오?"라고 되물으면, 아주 얄밉게도 "나도 잘 몰라서 당신에게 물으러 왔습니다", "흥, 그렇다면 당신도 모르고 나도 모르니 서로 비긴 셈이구려", "그건 아니지요. 당신은 잘 모르면서 안다고 설레발을 쳤지만, 나는 애초부터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당신보다는 꼭 한 가지를 더 알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내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신탁은 맞는 셈이지요"라고 대답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책의 두 번째 내용인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친구 이름을 제목으로 적어놓았다. 끝내 재판에서 '사형판결'을 언도 받은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간곡히 권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절친의 권유도 뿌리치며 '탈옥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들려주는 내용이다.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유한 까닭은 세 가지다. 첫째는 충분히 살릴 수도 있었는데 소크라테스를 죽게 둔다면 욕을 먹게 될 것이고, 둘째는 소크라테스가 죽는다면 적들의 의도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셋째는 소크라테스가 죽게 된다면 이는 자식들에게 아비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탈옥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수많은 대중들이 뭐라고 생각하고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탈옥 문제를 논하려면 그에 걸맞는 전문가나 지혜로운 사람들의 이성적인 논증을 거쳐야 하는데, 그 역시도 오직 '탈옥문제'에 대해서만 논해야하지 '다른 이유'를 들며 탈옥을 한다면 자신의 명예는 물론이려니와 정의롭지도 못하기 때문에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절친을 설득하는 내용이다.
만약 내가 '크리톤'이었다면, 소크라테스의 싸다구를 날리면서 어설픈 혓바닥 놀리면서 개수작 떨지 말고 너보다 덜 떨어진 것들도 다 하는 탈옥이나 하라고 한 방 먹일 것이며, 기껏 간수까지 다 매수해가지고 친히 탈옥하라고 권하는 성의를 봐서라도 얼른 그 혓바닥보다 가벼운 궁둥이를 바짝 쳐들고 두 다리를 바삐 놀려서 감옥 담장이나 빨리 넘으라고 엉덩이를 쭈삐 차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극구 사양한다며 주둥이를 놀린다면 강냉이 세 개쯤 빠지도록 후드려 팬 다음에 뒷덜미를 질질 끌며 탈옥시킬 것이다. 뭐, 가끔은 말이 안 통하는 친구는 이렇게 맴매를 하면 말 잘 듣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소크라테스는 만만치 않다. 자기는 오래 전부터 '아테네의 법'에 복종하기로 한 사람이기 때문에 탈옥을 해서 어디를 가든 '법을 깨버린 사람'으로 욕을 먹을 것이고,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그런 취급을 받아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불의를 불의로 갚는다면 그거야 말로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를 두고 '박정희 독재정권'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교묘한 말로 자신들을 '정의로운 세력'으로 세탁하려고 하였다.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언어도단'이다. 분명 '아테네의 법'도 불의한 세력이고 '독재정권의 법'도 불의하다. 하지만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이는 정의로운 소크라테스가 할 말이지, 정의롭지 못한 '독재세력'이 자신들을 위해서 할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당한 권력이 부당한 방법으로 부당한 말을 갖다붙여서 저지른 불의한 짓은 정말이지 끔찍할 따름이다. 그러니 행여라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집권세력을 옹호할 요량이라면 당장 때려치라고 말하고 싶다. 저승에서 소크라테스도 깜짝 놀랄테니 말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파이돈>이다. 파이돈은 노예 출신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이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고서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한 유명한 이야기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탈옥도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비록 죽지만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혼이 불멸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그 유명한 '이데아'가 등장한다. 플라톤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이데아' 말이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데아'를 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데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실재인 탓에 사멸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은 사멸하지만 그 속에 있는 '이데아'는 사멸하지 않기에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비록 현재의 소크라테스는 죽어서 저승의 문턱을 넘을 테지만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죽지 않고 저승을 넘어 다시 이승에 태어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윤회사상'인 셈이다. 다만 현실의 우리가 '저승의 기억'을 갖지 못한 까닭은 '레테(망각)의 강'을 건너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지만, 영원 불멸인 '이데아'를 기억해내는 순간 잊혀졌던 저승의 기억조차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내 몸이 죽는 것을 그리 애달프게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란 헛된 육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감각 따위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순수한 사유와 변증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이데아, 즉 '참된 지혜'를 좇으라는 것이 핵심인 셈이다.
마지막 이야기인 <향연>은 '에로스'에 대한 썰을 풀어내었다. 그래서 읽기에 따라서는 쬐끔 야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철학자의 야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특정 근육'이 불끈거리거나 피가 쏠리는 현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길 바란다. 우리 말에 '사랑'에 해당하는 말을 그리스어로는 '세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단다. 바로 '필리아', '아가페', '에로스'인데, 필리아는 '친애하는', 아가페는 '경애하는', 에로스는 '욕망이 담긴 연애 감정'으로 해석할 수 있단다. 여기서 필리아와 아가페는 '욕망이 담겨 있지 않은 사랑'이지만, 에로스는 '매우 강렬한 욕망'을 담고 있는 사랑이기에 특별히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연애하는 욕망(에로스)'는 무엇으로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흔히 '에로스'를 육체적인 열망으로 이해하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한 진정한 뜻은 '예찬'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 그리스에는 '스승과 제자의 에로스'를 가장 이상(理想)적이고 이성(理性)적인 사랑으로 보았다. 이를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노련한 스승과 어린(젊은) 제자의 에로스'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쉽게 말해 '동성애'를 가장 이상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물론 정신적인 사랑뿐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까지 '완벽'에 기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스승이 제자를 사랑과 정성으로 가르치고 제자가 스승을 사랑과 존경으로 배우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먼 옛날에는 남자와 남자가 한 몸인 사람도 있었고, 여자와 여자가 한 몸인 사람도 있었지만, 남녀가 한 몸인 '남녀추니'도 있었는데, 이렇게 한 몸인 사람들이 가장 '완벽한 존재'였기 때문에 신의 능력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제우스는 이렇게 신에게 대드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완벽한 인간'을 해체하여 '부족한 인간'으로 영원히 분리시키려 했고, 이렇게 '부족한 인간'들은 서로의 짝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스승과 제자의 에로스'를 완벽한 인간으로 되돌아가려는 강렬한 욕망으로 그려놓았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삶을 가장 아름답게 본 셈이다. 그것이 '이데아'가 되었든, '에로스'가 되었든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사상을 배우면서 '이데아'는 곧잘 배우지만 '에로스'는 좀처럼 배우지 않는 까닭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완벽한 에로스'라는 것은 불건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부로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싶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그리스는 '인간의 몸'을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며 남자나 여자나 천쪼가리 하나에 의지해 홀딱 벗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기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천쪼가리' 하나만 걸치고 거리를 활보했다가는 철컹철컹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분들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소크라테스가 <향연>에서 말하는 '에로스'를 곡해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쓴 리뷰입니다
1.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이여, 내 생각에는 오직 신만이 진정으로 지혜롭습니다. 그리고 신께서 우리에게 신탁을 주시는 이유도 인간의 지헤라는 것에는 가치가 거의 또는 전혀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께서 소크라테스라는 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나를 하나의 본보기로 사용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인간들아, 소크라테스처럼 자기가 지혜에 관해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가 너희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이다."
- p.23
강제적인 죽음 앞에서 삶의 욕심을 버릴 수 있을까. 억울하게 죽어가는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을 견디어 내고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성자가 아니라서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나의 모든 걸 걸었을 때는 특히. 소크라테스는 그래서 위대한 사람일 것이다. 그가 신을 부정했든 안 했든, 그는 또다른 사회의 분란을 막기 위해 기꺼기 죽음을 택했다. 그가 덤덤히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라면, 그건 분명 자신만의 분명한 철학이 있었고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분명한 가치관을. 아무리 오랫동안 노력해도 그의 가치관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저 산 너머너머에 있는 그의와의 대화는 플라톤에 의해 쓰여졌고, 그도 소크라테스의 모든 것을 담아내지는 못했을 것이기에. 그래서 내가 쓴 "New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해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 너머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직관적으로 짐작하고 쓴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소크라테스를 즐긴다. 그의 무대를 즐기고, 그의 대화를 즐기며,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가끔 내 머리로 넘어오는 이해되는 말들을 즐긴다.
2.
그런데 만일 내가 죽음이나 그 밖의 다른 길이 두려워서 신께서 정해주신 천직을 버리고 이탈해버린다면, 그것은 정말 두렵고 끔찍한 일입니다. 그리고 내가 죽음이 두려워 신탁에 복종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누군가가 그런 나를 , 신들을 믿지 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지혜를 뽐내는 자라고 고발하여 법정에 세운다면, 그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 될 것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어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지헤로운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지혜롭지 못하며, 무엇을 아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모든 복 중에서 죽음이 최고의 복일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마치 죽음이 최악의 재앙임이 확실한 것처럼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난받아야 할 무지가 아닐까요?
- pp.35~36
나는 정말로 무지한 사람이다.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들에는 지식이란 게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이번 리뷰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이 책을 100프로 이해했다면, 나는 정말 리뷰를 이보다 100배는 더 잘 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무지한 나를 좋아한다. 모르는 것을 어설프게 아는 척하기보다는 모르는 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드러낼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느낀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은 그래서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무지하기에 죽음 이후에 가는 천국이 행복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천국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기에 나는 지금 행복할 수 있다면, 또 다른 궤변이 될까?
3.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 떠나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오직 신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 p.59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떠났다.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인 크리톤은 그를 탈옥시키고자 하나 소크라테스는 응하지 않는다. 조금 더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
4.
이 책은 소크라테스가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유(소크라테스의 변명), 그리고 크리톤의 탈옥제안을 거절한 상황에서의 대화(크리톤), 그리고 사형당일날의 대화(파이돈), 아가톤이란 비극작가가 아테네의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베푼 연회에 참석했을 때의 대화 (향연)등 총 4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를 주도하는 인물은 역시 소크라테스이지만, 소크라테스의 주변인물의 사상 등도 엿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사형이 선고된 당시 , 소크라테스의 심적 상태와 그가 왜 죽음을 택했는가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서 많은 의문점이 해소되기도 했다.
5
"그렇다면 동일성은 저 서로 동일한 사물들과 닮았을 수도 있고 닮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소.
"하지만 닮았든 닮지 않았든,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지. 자네가 어떤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을 보고 어떤 다른 것을 생각해냈다면, 이 둘이 닮았든 닮지 않았든, 필연적으로 그것은 기억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라네."
- p.125
New 소크라테스 (22) 편안한 대화하기
카 : 우리 끝나고 대학로 가자
타 : 대학로?
카 : 사람 많은데 가고 싶어서
파 : 아 그래서?
당신은 신통한이기도 하고 이상한이기도 하신 분인가요?
나는 그들에게 또 말했다.
아니요.
그럼 누구신가요?
나는 그들에게 또 말했따.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편안하지 않아요.
나는 그들에게 또 물었다.
편안함은 어떤 것인가요?
과연, 나의 "New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닮아 있는가? 닮든 닮지 않았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의 상관관계를 통해 나는 어떤 다른 것을 생각해낼 수 있을 거란 기대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높은 것도 아니요, 더 잘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기존의 사상의 바탕 위에 새로운 것을 덧잎여 창조적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철학도 사상도 즐기다. 그러다보면, 무언가를 만날 것이다. 거기는 고통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을 또 다진다. 리뷰도 독서도, 포스팅도 즐기면 그만.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다보면, 언젠간 천국에 닿아있겠지. 소크라스는 그렇게 희망을 주고 떠났다. NEW 소크라스테스는 고통이 아니라, 완전한 희망이다.
- 이 리뷰는 리뷰어클럽 서평단자격으로 현대지성에서 도서를 증정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저술한 "대화" 편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어떤 저술도 남기지 않았기에 우리는 후대 사람들의 기록으로 그를 만나 볼 수 있다. 안타까우면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고발되어 자신을 변론하고 사형 집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라던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향연은 사랑을 주제로 사랑의 본질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혜와 진리를 사랑한 인류의 스승"이라 불리는 소크라테스와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처음 고전을 접하거나 서양 철학으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곁눈으로 흘려 보고 지나칠 수 없는,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만나는 가장 큰 어려움은 기존의 책들이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이 어렵다거나 높은 사고를 요한다거나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번역 자체가 중역인 경우가 많아 "말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난해하다는 것이다. 마치 몇 년전에 인터넷의 번역기를 통해 웹 사이트를 번역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피로함은 책을 읽는 내내 지속되고 결국에 가서는 특히 고전과 서양 철학에 첫발을 떼는 사람들에는 상당한 어려움과 다음 발을 떼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때로는 전공 서적의 번역서보다 오히려 원서를 이해하는 것이 쉬워 번역서를 버리고 밤새 원서를 읽던 기억처럼 이러한 책들을 읽다 보면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배우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그러던 중 그리스어 완전 완역본이 나왔다. 책의 첫 문장 첫 단어가 "아테나이'가 아니라 "아테네"로 되어있다. 완역본의 위엄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어를 그대로 번역하는 것도 의의가 있겠지만 책을 읽고 내용을 알고 거기로부터 사고를 펼쳐 나가는 데에는 가독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책은 누구나 편하게 소크라테스에 입문할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잘 되어 있다. 마치 수년 전에 이무영 선생님께서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라틴어 직역본을 출간했을 때만큼이나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소크라테스로 입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책으로 시작해 고전과 철학의 세계를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