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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타일 위의 물방울ㆍ13 공포영화ㆍ14 호주머니 속에 귤을 넣고 몰래 먹었다ㆍ16 숏컷ㆍ18 삼 분 동안의 감옥ㆍ20 해마와 물음표와 갈퀴ㆍ22 콜라병 속의 내가ㆍ24 꽃병ㆍ26 양변ㆍ27 파국ㆍ28 불안ㆍ30 왁스ㆍ32 사랑하는 이치로에게ㆍ34 태양의 고도ㆍ36 화이트 크리스마스ㆍ38 검은 구름ㆍ40 라스베가스ㆍ42 컴퍼스의 거리ㆍ44 제2부 거미ㆍ47 사직서가 운다ㆍ48 예감ㆍ50 버지니아 슬림ㆍ52 투명한 방문ㆍ54 길고양이ㆍ56 환상통ㆍ57 비커 속의 나와 장미꽃과 금붕어ㆍ58 방울토마토ㆍ60 여전히 나는 숨이 그립다ㆍ62 자화상ㆍ64 호박(琥珀)ㆍ66 은행잎ㆍ67 쉼ㆍ68 부러진 구두ㆍ70 열애ㆍ72 무서운 딸기ㆍ74 제3부 비빔국수ㆍ77 습작 노트ㆍ78 이상한 슬픔ㆍ80 우울ㆍ82 요요ㆍ84 지폐 속 얼굴ㆍ86 너를 앓는다ㆍ87 숟가락ㆍ88 빗방울ㆍ90 숨바꼭질ㆍ92 여름날의 향기ㆍ94 로션ㆍ96 바늘ㆍ98 펫ㆍ100 블루문 맥주ㆍ102 봄ㆍ104 빨간 장갑ㆍ106 해설 이정현(문학평론가)ㆍ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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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길다는 건 좋은 것이죠.
머리숱이 많다는 것도 좋은 것이에요. 자를 수 있는 머리가 없었다면 난 유방을 잘랐을 테니까요. 어느 날 환자가 내 가슴을 움켜잡았죠. 난 주사를 놓으러 다가갔을 뿐인데 그놈은 그냥 한번 잡아봤다고 웃으며 말했죠. 성추행 당하셨어요? 네. 누가요? 제가요.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죠. 뭐, 뭐, 뭐라고요? 짧게 잘라주세요. 남자 머리처럼 아주 짧게요. 내 머리카락은 검은 비가 되어 미용실 바닥을 적셔요. 철벅 철벅 서글픈 소리로 머리칼이 울어요. 이봐요. 내 머리카락을 밟지 말라고요.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기분이 드니까. 다음날 정신과를 찾아갔죠. 하지만 의사의 처방전엔 난 한낱 여자일 뿐이었어요. 나와 같이 자고 싶다나요? 더 짧게 잘라주세요. 남자 머리처럼 아주 짧게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더 더 더 더 더 짧게, 나를 거세시켜 달라고요. 2인치의 머리로 거리를 나섰어요. 아직도 내가 여자로 보인다구요? 다음엔 진짜 가슴이나 엉덩이 한쪽을 도려내야겠군요 --- 「숏컷」 ―――――――――――――――――― 콜라 같은 날 낳고 엄마는 행복했을까. 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들이 다가와 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다. 넌 콜라라며 콜라가 사는 나라로 가버리라고 한다. 나는 모래더미 속에 얼굴을 묻는다. 나만 홀로 캄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는 콜라병 속에 날 가둔다. 콜라병 속의 내가 콜라병 밖의 엄마를 본다. 엄마는 콜라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빛을 꿰어 넣는다. 엄마의 눈물 같은 빛이 콜라병 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울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간다. 사이다 같은 아이들이 내 주위를 맴돈다. 넌 콜라라며 톡 톡 톡 쏘아댄다. 돌멩이를 던져댄다. 난 콜라병 속에 다시 나를 가둔다. 엄마가 만들어준 콜라병. 아프지 않을 콜라병. 콜라병 속의 내가 콜라병 밖의 세상을 본다. 툭 툭 툭 틈만 나면 나를 흔들어대는 세상. 나는 흔들린다. 세차게 흔들린다. 반항하듯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기포를 천장까지 끌어 모으며. 누군가 내 생의 한가운데 빨간 딱지를 붙인다. 나는 위험하다. 뗄 수 없는 빨간 딱지를 붙인 나는 위험하다. 엄마는 기포를 숨긴 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난 언제든 분출하기 위한 꿈을 꾸며 산다.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대며 내 몸의 탄산을 끌어 모은 채 자유롭게 뚜껑 밖으로 흘러가는 꿈을 꾼다. 누구의 유리잔에도 담겨지지 않는 꿈. 플로리다에서 건너온 한 흑인 남자와 함께 콜라의 비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꿈. 콜라병 밖으로 주르륵 흘러나오는 슬픔. 아무도 모르는 뚜껑 속의 내가 세상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다. 위험한 콜라가 새어나가고 있다. --- 「콜라병 속의 내가」 ―――――――――――――――――― 나는 지금 예민하다. 당신을 삭히기 위해 온몸의 거품을 끌어 올려야만 한다. 당신은 불안을 잊는다. 나는 홀로 감정을 곱씹는다.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 당신이 남긴 감정의 진실 언제쯤 불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온몸의 거품을 끌어올린다. 나는 아직 예민하다. 아직 나는 당신을 처리 중이다 --- 「양변」 ―――――――――――――――――― 1년 4개월 동안의 동면을 견뎌낸 사직서. 사직서가 팩스 속에서 몸부림치며 깨어난다. 그리고 천천히 30초의 시간을 읽어 내려간다. 하얀 침대 시트 위에 누워 있던 환자. 꿈틀거렸던 환자의 손. 그 손의 치욕이 죽기보다 싫었던 30초. 끝내 편집하고 싶은 슬로우 비디오의 영상. 그 30초가 내게 먹구름을 데려왔다. 그 30초가 내게 잡풀 같은 괴로움을 주었다. 사직서가 사직서 속의 나를 고스란히 읽어준다.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던 날의 나를 읽어준다. 30초의 필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내 실명과 함께 음성으로 재생된 5분. “이것은 분명한 프라이버시의 침해입니다.” 문제제기를 해야만 했던, 사직서가 운다. 울며 외친다. 수차례 항변했지만 끝내 묵살되고 말았던 말들. 나의 입장을 변호하는 사직서가 최후의 변론을 한다. 팩스가 사표를 받아먹고 비명을 지른다. 삐―이―익― --- 「사직서가 운다」 ――――――――――――――――――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려먹었다는 생각 칼날 같은 빗방울은 내리고 나의 뇌리를 뚫고 들어오는 빗방울의 생각들 나의 자궁까지 쳐들어오는 칼날 같은 생각들 알코올도 수면제도 없이 그 어떤 치명적인 무기도 없이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다는 생각 무엇으로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오염된 빗줄기가 내리고 꽃도 나뭇잎도 빗방울에 젖는다 나는 하염없이 추락하는 빗방울 마침내 바닥까지 닿아 온몸이 골절되는 빗방울 나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피와 식은땀으로 얼룩진 밤 오염된 빗방울의 일그러진 형태들 울부짖는 빗방울들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려먹었다는 생각 --- 「빗방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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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자기 부정으로 적히는 시들이 있다. 이런 시의 인물들은 시인의 페르소나가 아니라 시인의 육화된 모습으로 다가온다. 어둡고 불편한 기억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겹치는 시의 인물들은 한 사람의 내면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황중하의 첫 시집 『아직 나는 당신을 처리 중입니다』에 수록된 시들이 그러하다. 시 속의 인물들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헤매고, 불쾌한 기억을 되새기며 고통을 자처한다. 직설적인 시의 언어는 화자의 경험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3부로 구성된 시들은 대체로 비슷한 흐름을 지니고 있다. 호명되는 기억들은 현실의 불안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불안은 자기 부정으로 진화한다. 「자화상」에서 화자는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불행했고 불행하고 또 불행하다. 내가 그린 나의 얼굴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러 겹 덧대어 그린 불안한 선들과 우울한 형태들 내가 믿고 싶은 진실은 언제나 스케치의 뒷면으로 사라진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황홀한 진실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를 향해 열려 있지만 늘 깜깜했다. 어둠 속에 추락한다. 상처 입은 채 깨어난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끼며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본 도화지 속 나의 얼굴 그것은 내가 그린 타인의 거짓말 처음부터 나의 불행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자화상」 전문 시집에는 줄곧 한 여성 화자가 등장한다. 샤워실 벽면의 타일을 보면서 ‘나’는 “퍼즐처럼 흩어진 얼굴”(「타일 위의 물방울」)을 떠올린다. 그녀의 기억에서 호명되는 것은 아버지다. 타일 붙이는 노동을 했던 아버지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샤워실의 물방울은 “땀방울”과 “푸른 꿈”으로 치환된다. 곧이어 쉽게 떨어지는 타일을 보면서 ‘나’는 “흩어져버린 타일 조각 속엔 아버지의 꿈이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궁핍함으로 비롯된 고통을 암시한다. 아버지는 마냥 따뜻한 기억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부엌일을 하지 않는다고 호통(「비빔국수」)을 치고, 늦게 들어온 딸에게 “네가 술집 여자”(「해마와 물음표와 갈퀴」)냐고 소리를 지르면서 말문이 막히게 한다. 한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통과했을 익숙한 풍경이다. 가정에서 겪은 억압과 소통의 부재는 일터에서도 반복된다. 간호사인 ‘나’는 환자에게 성추행을 당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죠”(「숏컷」)라는 말로 압축된다. 상담하려고 만난 정신과 의사에게 ‘나’는 그저 “같이 자고 싶은 여자”에 불과하다. 급기야 ‘나’는 가슴과 엉덩이를 도려내고 싶다는 잔혹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자신을 “한낱 여자”로만 규정하는 세상의 시선은 감당할 수 없는 폭력이다. - 이정현 (문학평론가) 먼지처럼 떠돌던 언어들이 돌아왔다. 모두 무엇이 되기를 갈망하는 표정이었지만 그 세계를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애인들이 보내는 슬픈 전언이었다. - 시인의 산문 "두 발로도 걸어갈 수 없는 길이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손을 잃어버렸다. 수면 아래의 세상에서 수면 밖의 세상을 그리워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 가라앉는다. 더 깊이 가라앉는다." 2021년 5월 황중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