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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불멸의 독서ㆍ13/황금빛 나무를 그리다ㆍ14/수박이 아프다ㆍ16/입 밖으로 날아간 물고기ㆍ18/The Love is somethingㆍ19/시를 찾아서ㆍ20/라스코 벽화ㆍ22/마르셀 뒤샹의 체스판ㆍ24/연꽃 화엄경ㆍ25/로열 플러시ㆍ26/수선화 웃음으로 그가 오신다ㆍ28/카사블랑카ㆍ30/마음의 창ㆍ32/자화상ㆍ34 제2부 살아야지 살아야지ㆍ37/CROSS ROADSㆍ38/그때 그 여름은 없네ㆍ40/희망의 전언ㆍ42/La sete di vivereㆍ44/잠자는 뮤즈ㆍ46/아다지오ㆍ48/1935년, 〈제비〉다방 스케치ㆍ50/우리 함께 알람브라 궁전으로 갈까요ㆍ52/몰도바ㆍ54/중세 속으로 들어간 여자ㆍ56/즈 스위 말라드(Je suis Malade)ㆍ58/동백꽃이 피어나는 겨울 아침ㆍ60/즈떼므ㆍ62 제3부 사랑 앞에서는 모든 공간과 시간이 사라지는 법ㆍ65/반쪽 심장ㆍ66/이클립스ㆍ68/태양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ㆍ70/고망(古莽)의 나라ㆍ72/보이지 않는 나무ㆍ73/Drawing in the Airㆍ74/유월의 바퀴살ㆍ76/봄꿈ㆍ78/우수(雨水)ㆍ79/이 많은 토끼풀을 언제 다 먹을 수 있을까ㆍ80/누가 나를 이 부름나무 아래로?ㆍ82/쿠마에의 전언ㆍ84/압화(押花)ㆍ89/푸른 별, 나의 물독ㆍ90 제4부 허공 백지ㆍ93/클라인 병 만들기ㆍ94/함제미인ㆍ96/만복사(萬福寺), 봄꿈ㆍ98/백성 스님의 학춤을 보고ㆍ100/모란 한 송이에 담긴 기억ㆍ102/태엽이 나를 감고 돈다ㆍ103/12월은 나무가 뚝뚝 부러지는 달ㆍ104/다음 생에는 무채색 당신을 만나겠습니다ㆍ106/통도사에서 읽는 시ㆍ108/벽암록 흉내 내기ㆍ110/저승과 이승과의 거리 30cmㆍ112/사랑ㆍ114 해설 김정배(문학평론가, 원광대 교수)ㆍ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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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밑 간질이던 산들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내 가슴에 묻혀 있던 말 수십 년이 지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온 최초의 문자들 오디세우스가 먼 길을 돌아와 페넬로페에게 사랑을 고백하듯 강물에 젖어 희미해진 문장들을 흰머리의 내게 읽어주고 있다 꿈같은 시간들을 다시 살고 있는 --- 「불멸의 독서」 중에서 수박을 먹으며 너를 생각한다 너를 생각하면 수박이 아프다 수박이 붉은 눈물을 흘리며 운다 뜨거운 양철 지붕 밑 이마 맞대고 파먹던 붉은 심장 보랏빛 새벽이 오기 전 무쇠 칼에 베어지던 청춘을 기억하며 운다 술 취한 배처럼 흔들리던 신념 그 무너진 기슭, 어느 무덤가 초록의 인광으로 빛나던 사랑, 그 이름을 불러보지만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네 다디단 심장을 먹은 내 입술만 피처럼 붉다 너와 같이 수박을 먹던 한여름 밤도 붉은 눈물을 흘린다 유성이 떨어진다 --- 「수박이 아프다」 중에서 너를 처음 만난 순간 너는 내 사전 속 프롤로그에 쓴 시 주황색 오렌지 노란색 아침바다 불타는 장미였다 지중해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오딜롱 르동의 〈이브〉처럼 카페에 앉아 있는 천진한 여인 탁자 위에 얹힌 오렌지주스 잔이 엎질러지는 순간 누가 천 일의 사랑을 예견할 수 있었을까 그녀 가슴을 찌르고도 남을 수천수만 불타는 가시를 수천 년 역사의 철제 궤짝 속에 녹슬어가거나 이제는 재가 되어버린 문장들 흐르는 물결 속 반짝이는 햇살 흰머리에 이고 푸른 심연 속 침묵으로 잠겨드는 늙은 여인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나던 태양은 사라지고 없어도 이제 그녀는 노트르담 성당 성화처럼 고요하다 사제의 옷자락 같은 지중해의 물결 위로 참회의 저녁 종소리 번진다 남은 백지에 마지막 물그림자를 그려 너에게 띄우는 정유년 새해 내 가슴속 낡은 사전은 너에 대한 상징이었을 뿐 이제 더 이상 펼치지 않을 것이다 --- 「태양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중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도래한 50일 동안 나는 고망(古莽)의 나라에 들어 밤낮없이 잠만 잤다 해와 달이 없으니 여기가 저기고 저기가 여기였다 흰 구름에 실려 가는지 바람에 실려 가는지 애드벌룬처럼 하늘을 둥둥 떠다녔다 머릿속을 비워버리자 몸은 공기처럼 가벼워졌다 팔뚝은 시냇물을 안은 미루나무 방죽이 되고 머리칼은 종달새 날아오르는 푸른 보리밭이 되었다 누군가 부는 버들피리 소리가 가슴에 들어와 알록달록 꽃을 피웠다 이 나라에는 없는 생소한 말, 꿈밖에서 들리는 환청 소리 코로나라는 헛말은 무구한 꽃향기에 묻혀 달아났다 블랙홀 속으로 사라졌다 말간 우물 속 하늘에서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태어났다 새 눈이 열렸다 해와 달을 가슴에 달고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초록 들판을 펼치던 50일간의 꿈같은 나라, 지금 여기 --- 「고망(古莽)의 나라」 중에서 눈앞에 핀 꽃이었으나 볼 수 없던 꽃 오늘 문득 유리창을 통해 내 눈에 들어온 꽃 뜰 한구석 돌 틈 사이 피어난 보랏빛 작은 초롱꽃 먼 데를 볼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소중한 사람은 늘 가까이에 있었구나 온몸을 쟁쟁 울리며 내 열 손가락에 피어나는 초롱꽃, 당신 --- 「사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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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일종의 척독(尺牘)이다. 시간과 시간이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곁눈질의 서간문이다. 마음을 드러내되 다 드러내지 않으니, 시를 읽는 마음이 때로 애달프다. 간절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짧은 편지 형식의 글에 시의 진심을 담고, 함축된 메시지를 전하다 보니, 그 간절함 또한 배가 된다. 정영숙 시인의 이번 시집 또한 이와 닮았다. 그녀가 시인의 말을 통해 전한 함제미인(含?美人). 눈길 고운 미인이라는 뜻으로, 수선화가 언제 고운 자태를 드러낼 것인가의 의미를 담는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함제미인과 관련한 황산(黃山) 김유근과 자하(紫霞) 신위의 이야기를 마냥 지나칠 수 없다. 황산이 신위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매화의 일은 이미 지나가고, 수선화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너무 적막하여 마음을 가누기 어려운 아침입니다.”(梅事已?, 水仙未花, 正是寂寥難遣之辰.) 뜻을 풀면, 분매(盆梅)의 매화꽃은 이미 시들고, 구근에서 올라온 수반 위 수선화 꽃대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디에도 마음의 적을 두지 못한 황산의 애달픈 그리움과 갈망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런 와중에 황산은 문득 신위가 생각났음을 고백한다. 김소월 시의 한 구절처럼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가는 길」)진 셈이다. 이에 신위는 한 수 더 떠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수선화’와 관련한 시 세 수를 황산에게 지어 보낸다. 이중 둘째 수의 내용은 이렇다. “얄미운 매화가 피리 연주 재촉터니, 고운 꽃잎 떨어져 푸른 이끼 점찍는다. 봄바람 살랑살랑 물결은 초록인데, 눈길 고운 미인은 오는가 안 오는가?”(無賴梅花 笛催, 玉英顚倒點靑苔. 東風吹?水波綠, 含?美人來不來.) 신위는 황산에게 매화는 가고 수선화는 오지 않은 주춤한 정경 속에서, 수선화가 필 때 만나자는 약속을 전한다. 서로 간의 함축적인 약속이 담긴 척독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함제미인에 대한 옛 문헌의 에피소드는 황산과 신위의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정영숙 시인의 이번 시집을 대변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자 약속의 상징이기도 하다.
매화 지는 밤 고월(孤月)로 떴습니다 당신이 다니시는 고샅길 비 오면 허리까지 차는 골가실 냇물 밤 이슥토록 푸른 대숲 비추는 매화꽃 흩날리는 밤 타다 만 비파 줄로 남았습니다 달 밝은 밤, 맑은 술 한 잔에 행여 그대 긴 손가락 울릴까 험한 재 굽이굽이 힘들 때 혹여 둥근 음에 쉬어 가라시며 청아한 피리 소리 휘영청 고월에 걸리는 밤 천년 벼루 속 푸른 달빛 찍어 그리는 흰 화선지 속 함제미인(含?美人)이고 싶습니다 ?? 「함제미인」 전문 이 시집에서 함제미인에 대한 의미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나’와 ‘당신’ 혹은 ‘그대’를 통해 서로를 구분하는 듯 보이지만, 인용한 시에서 함제미인은 수선화의 기본적인 의미를 그대로 수용한다. 수선화는 대표적인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상징이다. 자기애적 욕망을 투영하는 꽃으로 불린다.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기 미모에 반해 빠져 죽었다는 전설을 함의하기도 한다. 그 자리에 피어난 것이 바로 미소년과 같은 이름의 꽃, 수선화(나르키소스)인 셈이다. 이 작품 또한 앞에서 언급한 황산과 신위의 이야기가 내포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다른 질감의 의미를 도출해낸다.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듯 시인 또한 “천년 벼루 속 푸른 달빛 찍어 그리는/흰 화선지 속/함제미인(含?美人)”을 갈망해낸다. 주지하듯 정신분석학 혹은 신화적 관점에서 나르시시즘은 자기애적 욕망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시인은 이를 자신이 지나쳐버린 미래의 시적 욕망과 앞으로 마주할 사랑의 노래로 치환시킨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매화’와 ‘수선화’가 피는 그 사이에서의 감정은 이 시집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이다. 함제미인에서 등장하는 매화 또한 그 사이에서 어룽거리는, 일종의 약속의 도정이자 시적 그리움이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되찾아야 할 과거의 나의 모습이거나 너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매화의 열매는 남녀의 결합을 상징하는 주화(呪花) 또는 주과(呪果)로 인식되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그렇다면 정영숙의 이번 시집에서 ‘매화’와 ‘수선화’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매화와 수선화가 시인의 심리 상태를 적극적으로 담보하는 상징물임을 고려한다면, “어느새 눈물 젖은 매화 꽃잎”(「압화」)이라든가, “매화꽃 흩날리는 밤/타다 만 비파 줄로 남”거나 “매화꽃 환한 봄날/눈부셔 앞이 보이지 않”(「만복사(萬福寺), 봄꿈」)는다는 표현은 시인이 지닌 심리적 기제를 그대로 은유화시킨다. 대표적으로 「만복사(萬福寺), 봄꿈」 같은 작품에서는 조선 전기 김시습이 지은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에 스민 양생의 사랑 스토리를 시적 차용하여 기다림과 애달픈 마음을 극대화한다. 시인은 여기에서도 매화를 두고 “눈처럼 새하얀 저 꽃잎은/세월의 긴 망치로 하얗게 두들겨 편/삼천 년 기다림의 은빛 서간”이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시의 전개방식은 마치 황산과 신위가 나눈 서간문의 내용처럼 정확한 의미의 일치를 보인다. 나아가 황산의 척독에 신위가 시를 지어 보냈듯이 시인 또한 그 마음을 함제미인의 뜻에 담아 전하는데, 가령 “검은 나뭇가지 위 눈꽃으로 피어난 매화 꽃잎”(「입 밖으로 날아간 물고기」)은 시인이 갈망하는 시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의 변별점으로 작용한다. 이미 시인이 언급한 것처럼 괴테의 시 「첫 상실」의 의미를 빌린 “아, 누군가 그 아름다운 나날들을 되돌려주오!”(「수선화 웃음으로 그가 오신다」)라는 메시지로 자신만의 족적을 남긴다. ■ 시인의 말 당신이 내 가슴속에 살아있어 노래는 끝이 없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새로운 기호의 여러 빛깔 당신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입도 사라지고 매화꽃마저 지고 없는 계절 눈길 그윽한 수선화, 함제미인(含?美人)이고 싶다. 수선화 꽃향기에 노래 실어 보내면 먼 당신 납매(臘梅)로 빚은 매화주 한잔하러 오십시오. 2022년 2월 정영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