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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곡선·13/고비의 배후·14/시간이 당신을·16/사람을 쓰는 일·18/적당한 비율·20/누진세·22/구조·23/신암 일기·24/슬픔을 계산한다·26/피곤은 이제 피곤하다·28/수필을 위하여·30/자연산 밥 냄새에 대한 기억·32/고요·34/날이 풀렸다·36/저녁에게·38 제2부 나는 슬픔을 독학했다·41/바람의 주소·42/어디를 살아도·44/다음 장면을 주세요·46/나를 만지다·47/기억은 해석일 뿐이다·50/헤어진 다음날·51/이월된 쓸쓸·54/기회가 있었다·56/비극은 개선된다·58/세월·60/검은 물·62/입장·64/당신의 마음·66/나는 통증으로 출입한다·68 제3부 뫼비우스의 띠·71/실천이란 무엇입니까·72/낮엔 거의 현실·74/멸망한 후·76/핑크 핑크 Pink Fink·78/감정증후군·80/괴물이 되어 간다·83/조금씩 지워지는 세상·84/이해하면 섬뜩한 인생·86/비의 전성기·88/쓸쓸한 오후·90/그대에게·92/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 아무거나 한다·94/절벽·96 제4부 오차 범위 안에 있는 오해들·99/설사하는 말·100/소란과 고요·102/나비 글씨체·104/구석에게·107/나는 아직 자연을 벗어날 수 없다·108/폐가와 폐허·110/불후의 명자꽃·112/영혼의 크기·114/꽃나무 선승·116/합리적인 환상통·118/화를 채굴하는 일·120/검은 감정들·122 해설 우대식(시인)·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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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우 시는 조금 쓸 줄 알지만 사람을 쓰는 일에는 젬병이다 어젯밤에도 사람을 만나 쓰다가 비문이 생겼고 그 비문 때문에 싸웠다 문장은 오해와 헛소문으로 길게 이어졌다 사람을 쓰다가 꾸겨서 버리는 일 생각의 휴지통에서 꾸겨진 사람을 다시 펴서 살펴보는 일 저 꾸겨진 사람의 문장을 포기하면 나도 끝나는 것이다 끝나진 않지만 사는 일에서 단맛은 빠지는 꼴이겠지 다음날 전화해서 사람을 만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밤새 고민해서 완성한 문장 하나씩을 슬몃 눈빛으로 교환한다 몇 분 동안 말 대신 눈이 일을 한다 감정을 써서 마음 한 켠 얻는 이 지난한 문법은 천 년이 지나도 개정판이 나오지 않는다 창밖에서 바람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미소를 속기로 기록해서 입구와 모서리에 바른다 ---「사람을 쓰는 일」중에서 오래 살수록 삶의 누진세가 붙어서 가는 순간 눈부신 이 생의 발전소에 납부해야 하는 소비한 삶의 전력량에 대한 납부액은 많을 것이다 가야 하는데 숨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면 완불을 못한 채 체납하고 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리라 ---「누진세」중에서 신암에 들어와 커피 집 차린 지 십 년이 지났다 나의 상업은 기술도 없이 웃는 것 무엇을 이기려는 마음을 매일 거세하는 것 좋은 기분은 노력하면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노력이란 내 감정 절반을 덜어내는 일이었다 내일의 날씨를 매일 검색했고 종교도 없이 지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날들이지만 오히려 십 년 후의 내 모습은 잘 보였다 지금의 모습이 십 년 후의 모습이라고 믿었기에 내 헛헛한 웃음의 주기가 길어질수록 남은 생의 표정은 단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신암에 살면서 배웠다 내가 부풀어서 그늘이 없이 구석이 없이 터지기 직전의 그 무엇이 되었을 때 그 압력은 내가 매일 만들어냈던 헛헛한 웃음에서 온다는 것을 느꼈다 화려한 슬픔을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신암 일기」중에서 고장 난 질문을 수리하느라고 한 생을 보냈네 꽃대는 질 때 왜 물음표 모양으로 꺾이는 걸까 누군가에게 무릎 꿇었을 때 뒤통수에서 일어나던 불길은 무엇을 태운 걸까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는 하루들이 있었네 대부분의 질문들은 불구였네 불구라서 더듬거리고 구부러졌네 울분도 없이 비명도 없이 답이 있는 쪽으로만 기어갔네 세월이 흐른 후 답이 질문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질문은 자신이 고장 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네 자신에게 없는 부위는 불구가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네 아무것도 없어서 치욕을 지나올 수 있었고 고통을 텅 비게 할 수 있었네 텅 비어서 모든 것이 출입할 수 있었네 ---「고요」중에서 당신에게서 조금의 마음을 얻어 왔습니다 오늘 내가 얻어 온 이 마음은 처음이 아니라 두 번째 마음도 아니라 매일 얻어 온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 마음들이 설풋 내 것인 듯도 합니다 아니, 내 마음이라고 착각한 채 평생을 살았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내 평수에 꼭 맞아서 덜컹대지 않았습니다 내 피부에도 붙어 있는 그 마음이 자연스러워서 몸을 씻으며 피부를 닦아도 따갑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 몸에서 당신의 마음을 걷어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뼈로 옮겨붙은 당신의 마음을 발골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다시 나를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당신과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마음에 담긴 나의 생로병사를 얻어 오기 위한 속임수라고 생각해주세요 ---「당신의 마음」중에서 올봄에 핀 명자꽃은 작년에 피었던 명자꽃의 유언을 실천합니다 내년에 올 명자꽃은 올봄에 피었던 명자꽃의 유언을 이어받아 명자꽃 무리의 집성촌에서 또 실천될 겁니다 실천이란 무엇입니까 점심엔 국수를 삶아 먹었습니다 혼자 끼니를 때우는 일이 심심해서 창밖 푸른 잎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벚나무를 보았습니다 저 벚나무는 십 년 넘게 푸른 잎을 실천 중입니다 나는 먹고 남은 국수 국물을 들고 나가 벚나무 근처에 흩뿌 렸습니다 그곳에서 국수 국물도 실천됩니다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칼자루 없는 칼을 쥐고 그를 미워합니다 하루를 실천하기 위해 누우면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납니다 실천이란 무엇이고 실천은 어떤 냄새를 가졌을까요 실천에게 배후가 있을까요 나는 방금 태어난 햇살을 실천하기 위해 두 손을 내밀었습니다 ---「실천이란 무엇입니까」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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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의 시집 『실천이란 무엇입니까』는 완성된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 그리고 삶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깊은 회의에서 출발한다. 대개의 문장이 완결적 형식으로 끝나더라도 문장 속에는 늘 물음의 고뇌가 짙게 묻어 있다. 그것은 그가 나와 대상이 어떻게 닮았는가보다 어떻게 다른가에 주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나는 구조 없이 일생을 보냈다”(「구조」)는 선언은 내용을 담는 얼개로서 완성된 형태의 삶으로부터 먼 곳에 그가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현실에서 가시화된 어떤 형식의 구조도 그에게는 생경하고 낯선 것으로 인식된다.
“나는 쓸모없이/집을 돌아 보일러실로 갔다/왜 여기 왔는지 모른 채 한참을 서성이다/옹벽에 서 있는 긴 빗자루 쥐고는 건물 외곽에 붙은 거미줄을 없앤다”(「구조」)는 시적 진술에서도 일상을 낯선 풍경으로 환치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에게 구조화된 일상이 없다는 것을 뜻하며, 그래서 만나게 되는 낯선 풍경에 늘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는 실패한 삶의 형식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시 속에 집요하게 호명하는 당신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타자이다. 당신이라는 포괄적 상징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는 일은 그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이라는 간이역을 경유하지 않고 나의 세상으로 직항하는 노선은 애초에 없었다는 얘기 당신을 만져야 내가 만져지는 얘기 만나면 서로 혀를 나누는 키스를 이제 포옹으로 대신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얘기 그리고 적당히 통속해진 당신이 보기 좋았다는 얘기 그것이 슬퍼질 때, 눈물 대신 주먹을 꽉 쥐게 되더라는 얘기 밥값을 서로 내려고 살짝 밀쳤다는 얘기 당신이 사라지기 전 거리에 내리는 첫눈 첫 세상 반짝이는 불빛들 ― 「곡선」 전문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신”은 “나의 세상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이 유일성이 단지 환상이나 상상의 세계로서가 아니라 “적당히 통속한” 그리고 “밥값을 서로 내려고 살짝 밀”쳐내는 구체적 현실로서의 세계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관계를 예민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신”이라는 추상적 실체가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추론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의 구조가 없는 삶을 견인해 가는 시적 화자에게 “당신이라는 간이역”은 절대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일상의 세계로부터 이탈한 자가 누리는 위무와 회의의 세계는 시를 쓰는 것이며, 당신을 만지듯 끝없이 시와 접촉하며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자의 위치에 시가 있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당신과 헤어진 후/당신이 보이고 당신을 알았기에 이제야/안 보이는 당신을 보고 모르는 당신을 알아간다/지금 내 육체 어느 구석으로도 명랑은 들어갈 수 없다/너무 많은 당신이 보인다”(「헤어진 다음날」). 마치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처럼 당신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은 처연하면서도 시적 화자의 행로를 짐작케 한다. 헤어진 후에야 당신이 보였다는 고백은 시적 화자의 시선이 보다 본질적인 세계에 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대식(시인) ■ 시인의 말 영원한 하루가 탄생하기를 기도했다. 기도 외에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2023년 3월 김대호 ■ 시인의 산문 생활을 상징으로 하는 자는 망명한 자이다. 외부에서 내부로 다시 내부의 외부로 그렇게 생활을 꾸려 나가면서 연필을 깎아 벽지에다가 ‘생활’이라고 낙서한다. 낙서한 생활은 낙서하는 순간 상징이 된다. 상징으로 어떻게 생활을 꾸린단 말인가. 생활 앞에서 생각 중이다. 수돗가에서 생각 중이다. 파리를 잡고 나서 생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