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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책소개

목차

제1부

책장·13/윷놀이·14/촉·16/산수유·18/갈대·19/나무의 귀·20/바람에게 물어봐·22/춘정·24/라일락·25/뿌리에 관하여·26/규화목과 마주하다·28/봄비·29/푸른 부리·30/춘분·32

제2부

문득, 이라는 인생·35/베짱이로 살기로 했다·36/자화상·38/전원일기·40/쓸쓸함에 대하여·42/너도바람꽃·43/길·44/캥거루, 족·46/기타 치는 남자·48/바통을 넘기다·50/숲에 들다·52/파도를 밟다·54/섬을 걷다·56/소금꽃·58/나무의 생각·60

제3부

키·63/콩밥·64/보리밭·66/봄을 뜯다·68/울음의 곡선·70/꽃의 몰락·71/스트라이크·72/무모한 외출·74/자두나무·77/폐타이어·78/떼창·80/경칩·82/벚꽃·83/백담사 오르다·84/내장에 물들다·86/당신·88

제4부

달맞이꽃·91/난청·92/떠났다·94/몸을 깨우다·96/화부(火夫)·98/양파·100/거리를 복사하다·102/슬픈 자의 식사법·104/민들레·106/모과를 자르다·107/꽃의 지도·108/허물어지는 것에 대하여·110/풍장·112

해설 백인덕(시인)·113

저자 소개 1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2006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상처들의 시간』 『자작나무에게 묻는다』 『콩나물은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가 있으며 〈안견문학상〉 〈황금찬문학상〉 〈평택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평택문인협회, 〈시원〉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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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3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88g | 125*204*20mm
ISBN13
9791158965884

책 속으로

유리문을 통과한 빛이
활자 크기로 재단되어 책 속으로 잠입했다
빛바랜 표지를 들추자
삼국지의 용맹도 대를 물리던 국어사전도 얼룩을 물고 있다
우수수 흩어질 것 같은 문장들,
여름 지나고 가을도 지났다
가끔 들른 구름과 대륙을 건너온 먼지를 기록하는지 누렇게 버석거렸다
그 많은 활자를 먹고도 살이 오르지 않은 책벌레는
여전히 책을 탐했지만
별책부록처럼 겉도는 짧은 지식은 그저 종이에 불과했다
궁지로 밀린 것들의 위험이랄까
크거나 작은 활자들 빛을 동그랗게 말아 쥔 채 낡아갔다
인생의 사원이 되어주던 책장에 기대앉아
활자들의 원성을 들었다
실타래처럼 엉킨 기호가 소멸을 저장하는 동안
염소가 뜯어먹었을 오후의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유리문 밖 고즈넉을 읽었다
---「책장」중에서

턱을 괴는 날이 많아졌다
무시로 흔들리는 호흡은
우기를 건너와 문지방에 핀 꽃처럼 푸르렀고
눅눅한 오후는 발 디딜 곳을 찾아 헤맸다

제멋대로 피어
저리 환하게 웃어도 소리 나지 않는 꽃도
시들지 않고서는 열매가 될 수 없음을,

뿌리 없는 뿌리가 흔들렸다
흔들리는 건 과거의 확신이 미래의 불안이 되는 것
그래도,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몇 년 만에 휘어지도록 체리를 매달았던 나무가
생의 단 한 번 뜨겁게 허공을 밝히고는
이내 말라 죽은,
알 수 없는 혼돈은
개똥철학의 미학도 그 무엇이 되지 못했다

저 철새도
허공에 뿌리를 심어야 돌아올 수 있고
나의 흔들림 또한 불협과 화해해야 옹이가 될 수 있음을
비 온 뒤 풀섶에 걸친 거미줄에서 읽는다

저무는 지금
빈 마음에 헛된 그리움만 박히는 건
오래전 사람이 내린 뿌리 때문일 게다
---「뿌리에 관하여」중에서

개구리 소리를 끌어다 덮는다
이리저리 뒤척여 소리를 옮겨보지만
잠은 오지 않고 개구리 울음만 가득 고인다
정원을 뛰쳐나와 벽 타고 오르는 초록의 노래들
한 놈이 시작하면 떼창이 되고
한바탕 놀고 나면 잠시 쉰다

며칠 전 이사를 했다
4층에서 11층 오르는 데 서른 해 걸렸다
층계는 높았다
숨이 턱까지 차는 날이 많았다
알에서 깨어난 올챙이가 앞다리가 쑥, 뒷다리가 쑥 개구리
되기까지
수시로 무너지는 신념에 푸념 반 다짐 반
장롱이 방에 들어가지 않아 처마 끝에 놓던 일이며
젖은 새 운동화를 벌건 연탄불 위에 올려놓던 아이,
개구리가 안전한 거처를 찾기까지 애면글면 숱한 날이 치받쳤다

개굴개굴개굴 노래가
잘살았어잘살았어잘살았어 푸른 격려 같아 턱을 괸다
달빛에 비친 날들이 환하게 핀다

이제 베짱이로 살기로 했다
---「베짱이로 살기로 했다」중에서

태양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
알이 굵어질수록
휘어지는 어깨 단속하느라 자꾸 빨개집니다
직박구리가 헤집은,
바닥에 닿을 듯 잘 익은 사과를 궤짝에 담습니다
풋사과에 종이의 집 입히며 했던 주문을
기억했나 봅니다

새보다 먼저 일어나
과수와 인사하고 채마밭에 인기척 내는 법을 배웁니다
토란 위 물방울 데구르 데구르 햇살 굴리고
청개구리는 잠시 휴식에 들어도 좋습니다
노랗게 쏟아진 감꽃 실에 꿰어 감나무에 걸어주고
닭장에서 슬쩍해 온 계란 서너 알 풀어 뚝배기에 앉칩니다
줄기만 무성하던 고구마며 씨앗도 못 챙긴 옥수수
백일홍도 한몫했습니다

사과 한입 깨물자
달콤한 햇살과 아삭한 바람과 소나기 같은 새콤함을 왈칵
쏟아냅니다
달의 절기처럼 넘겨지던 날이 입 안에 고입니다
이사 온 뒤 세 살 된 사과나무
축 쳐졌던 팔 번쩍 들어 올립니다
두엄 두어 포대 내고 등걸을 입혀야겠습니다

그나저나 땡감 같은 자식 농사는
언제 붉게 익을지 모르겠습니다
---「전원일기」중에서

낮달에 이끌린 달맞이꽃 여인숙으로 들었네
벌건 대낮 꽃 문 열린 달맞이꽃
태양이 따가워 고개를 들 수 없었네
뽀송한 솜털도 몸부림도
순간 몰아닥친 회오리를 피하지 못했네
잠시 쉬어가자는 말 몰랐네
요 위로 꽃잎이 얼룩처럼 번졌네
첫 망울 찢긴 아픔보다 세상 밖이 더 두려웠네
늙은 낮달 허리춤 들썩이며 태양 속으로 숨어들고
남겨진 몇 닢의 지폐 위로 눈물 흘렀네
오관을 떼던 늙은 주인 혀 차는 소리가 천둥보다 컸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피박 먼저 썼구먼
몸뚱어리 함부로 굴리면 못써
흑싸리 껍데기만도 못한 놈
달맞이꽃 달래던 바람이
처마 밑 거미줄에 걸려 지분거렸네

---「달맞이꽃」중에서

출판사 리뷰

삶이 진보하거나, 혹은 최소한 앞으로 나간다고 믿기는 어렵지 않다. 거창한 역사가 아니라 개인사를 되돌아보기만 해도 된다. 우리는 인생이란 마치 숙명처럼, 혹은 운명을 거부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때때로 거기 개입하는 불안은 단지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비롯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과거만을 지각하며 순수한 현재란 미래를 침식하는 과거의 파악할 수 없는 진전일 뿐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회상을 통해 감각적으로 되살려올 수 있는 것은 모두 지나간 일들이고 가장 먼 과거는 기원에 닿아 있다. 그 기원은 출발지로 의미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가라앉은 상처의 표상으로 인생과 더불어 성장한다.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원은 필연적으로 분리와 고립(고독)이라는 상처를 내재한다. 세계와 대면하는(갈등하거나 화해하려는) 인식으로 일어서고자 할 때 자아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혼자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 홀로서기는 먼저 자기 정체성과 독자성의 확보를 요구한다. 나아가 우리는 자아가 세계의 색인을 파악하기도 전에 무작정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어딘가에 뿌리내려야만 한다. 결국, 어디서 무엇을 꿈꾸든 불투명한 미래와 상처로 남은 기원을 동시에 보듬어야 하는 숙명적 존재인 까닭에 우리의 슬픔은 진보와 성장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한인숙 시인은 슬픔의 현상적 정서가 아닌 기원의 드러남을 겨냥한다. 그의 시는 세계에 이미 던져진 존재로서 어쩔 수 없이 자기 기억에 도사리고 있는 슬픔을 끊임없이 현재화하는 다양한 사태를 먼저 보여준다. 가능한 날것 그대로 슬픔을 불러내고자 하는 심리의 이면에는 도대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현실의 난감함이 그대로 들어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 뼈아픈 재소환을 통해 시간의 무늬로만 켜켜이 쌓인 현실을 언어적 현실로 치환하여 반어(irony)로 작동하는 시적 현실을 구축(構築)한다. 이런 시인의 응전(reaction)은 슬픔의 기원을 시작의 근원, 즉 창조성의 모태로 전환하려는 시인만의 개성적인 방법들을 통해 명확해진다.

시절을 당기느라 좀 더 수런거려도 좋다
갓길의 풀씨들
아무렇게나 튕겨져도 좋다
녹음이 짙어지면 풀들은 장지를 찾는다는 걸 알아채는 동안
인생 절반이 흘렀다
구애하는 새와
반사경에 보이는 내 옆모습이 한통속인 것 같은,
굽은 것이 만든 커브는 은밀하고
모퉁이는 어귀를 돌아야 속내를 알 수 있다
은사시나무의 떨림만으로 바람이 지나는 길목을 알 수 없듯
수많은 과오를 뒤척여야 인생은 완성된다
엎질러진 기억과 푸른 통증이 없으면 그냥 지나칠 순간들
길을 걷다 멈춰서니
붉게 물든 내가
거기, 있다
― 「문득, 이라는 인생」 전문

이 작품은 전형적인 고백 시의 양상을 보여준다. “엎질러진 기억과 푸른 통증이 없으면 그냥 지나칠 순간들”이 바로 지금까지 인생의 모습이었다. 제목의 ‘문득’은 일차적으로 우연한 계기를 지시한다. “녹음이 짙어지면 풀들은 장지를 찾는다는 걸 알아채는 동안/인생 절반이 흘렀다”라는 깨달음은 ‘문득’ 주어지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길을 걷다 멈춰서니/붉게 물든 내가/거기, 있다”라는 자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득’은 일반적인 믿음처럼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끊임없이 개입한 내적 필요가 갑자기 표면에 드러날 때, 즉 감춰졌던 원인과 결과가 한눈에 보이는 순간의 다른 이름이 ‘문득’이다.

우리의 눈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한다. 거울과 같은 보조 도구 없이 나를 보기 위해서는 유사성을 파악해서 닮은 무엇인가를 통해 보아야만 한다. 시인은 ‘풀’이라는 특별할 것 없는 대상을 비유적 상관물로 삼아 자신의 인생을 생각한다. 풀들의 절정이 곧 쇠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따라서 문득 파악할 수 있는 진리다. 하지만 시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자연적 진리를 바탕으로 “은사시나무의 떨림만으로 바람이 지나는 길목을 알 수 없듯/수많은 과오를 뒤척여야 인생은 완성된다”라는 개념 명제를 끌어낸다. 즉, 풀을 눈여겨본 것처럼 자신의 내적 필요에도 귀를 기울인 것이다.
― 백인덕(시인)

■ 시인의 말

딱따구리가 쪼아낸 소리가 숲을 가로질렀고
꽃은 서둘러 환해졌다.
앞산의 병풍바위는
제 몸속에 경전을 새기는지 여전히 묵언수행 중이다.
누구라서 저 오랜 경전 앞에서 경건하지 않을 수 있으며
저 풍상의 날들을 화석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둥지를 수선하던 새
소나무가 퍼 올린 샛강에 목을 축이고
산은 그만큼 깊어졌다.

2023년 3월
한인숙

■ 시인의 산문

수런거림이 담장을 기웃거린다. 샛강을 건너온 향기가 밤잠 설치게 한다. 베란다에 들이치는 달빛을 마시는 것만으론 봄이 너무 깊다. 몸 안으로 흘러드는 달빛, 아니 달빛에 취한 그리움이었을 게다. 누군가는 기름진 수사를 뜯어먹고 꽃과 열매의 행방을 연탄불에 뒤적이며 세상과 소통한다. 그 모든 게 은유였다. 봄날의 벚꽃 아래서 바람을 물어뜯고 달빛 뱉어내며 서로의 체온에 기대는 것도 은유였다. 황진이가 서화담과 나누던 세월 한 켠의 갈증이 붉게 피었을지도 모를, 그러나 꽃이 헐리는 것은 잠깐이다. 체납된 고지서처럼 환불되지 않는 향기 내지르며 서둘러 지고 있다. 이곳에선 어떤 은유도 함부로 구워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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