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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_추리소설에 부치는 진혼곡 사고(事故) _아직도 가능한 이야기 작품 해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연보 |
Fridrich Durenm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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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니라 당신네들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진행 방식입니다. 이 대목의 사기극은 언어도단에다 파렴치하기까지 합니다. 당신네들은 사건 진행을 논리적으로 설정하지요. 마치 장기를 두듯 진행시킵니다.
--- p.19 「약속」중에서 당신네들 소설 속에서는 이 우연이라는 것이 아무 역할도 못하지요. 우연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에도 뭐든지 그것은 곧 운명이요 섭리라는 겁니다. 진실은 이렇게 옛날부터 당신네 작가들의 극작 규칙을 위한 먹이로 던져지고 있습니다. 이젠 제발 그놈의 규칙이라는 것을 팽개쳐버리십시오. --- p.20 「약속」중에서 “그럼 가보세요. 당신은 생명을 걸고 약속하신 겁니다.” --- p.40 「약속」중에서 이제는 기다림만이 그에게 유일무이한 방법이었습니다. 때로는 돌아버리지나 않을까 스스로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지만 말입니다. --- p.158 「약속」중에서 그는 세계를 비약시키는 법칙, 보통 방법으로는 우리가 결코 접근하지 못하는 저 법칙 근처까지 파고들어 갔던 겁니다. 물론 거의 그 법칙에까지 닿을 뻔하다가 실패했습니다만. 그도 그럴 것이, 유감스럽지만 이 같은 무자비한 대목이 역시 신(神)의 산물로서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p.190 「약속」중에서 마태는 가소로운 처지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산이 현실에서도 맞아떨어지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현실을 부인했고, 그러다 종내에는 허공으로 빠져든 겁니다. --- pp.190~191 「약속」중에서 그는 이렇다 할 사고력이나 지적인 활동의 소질을 갖추지 못한 한낱 소박한 인간이었다. 필요할 때면 약삭빠를 줄도 알고 자기 분야에서는 혼신의 힘을 다할 줄도 아는 일개 장사꾼, 게다가 먹고 마시기를 즐기며 재미있는 일이라면 홀딱 빠져드는 성품이었다. --- p.230 「사고」중에서 “그렇지만 나는 죄인이란 말이오!” --- p.284 「사고」중에서 지금 저는 선고를 내려주시길, 아니 형벌을 내려주시길 간청하는 바입니다. 이건 아부가 아니라 열광에서 나온 청원이랍니다. 왜냐하면 오늘 밤에야 저는 비로소 참된 삶을 영위한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니까요. --- p.287 「사고」중에서 트랍스는 행복했다. 그의 소시민적 생애에서 이처럼 충일한 상태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았다. --- p.292 「사고」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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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지양하는 동시에 극복한 추리소설
장르의 관습을 부수고 ‘우연’을 기입해 추리소설을 ‘아직도 가능한 이야기’로 만든 걸작!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전후 독일문학이 배출한 천재 작가, 스위스 국민 작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세계적인 극작가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런 그가 남긴 추리소설은 단 네 편이다. 극작가로 대성하는 시기를 얼마 앞두지 않은 때 ‘밥벌이’를 위해 추리소설을 썼고, 그 이후로는 다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쇄살인을 해결하려는 한 수사관의 참담한 실패와 예기치 못한 결론… 추리소설에 부치는 진혼곡, 〈약속〉 문예세계문학선 115 《약속》에는 뒤렌마트의 추리소설 4편 중 〈약속〉과 〈사고〉가 수록되어 있다(다른 2편인 〈판사와 형리〉, 〈혐의〉는 문예세계문학선 123 《판사와 형리》에 실렸다). 먼저 〈약속〉은 전통 추리소설이 내포한 허구적 동화를 깨뜨리면서 ‘우연’의 형태로 삶을 위협하는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상대해야 할 적수임을 강조한다. 〈약속〉은 본디 뒤렌마트가 영화 연출가에게 요청받아 시나리오로 쓴 작품으로 〈그 사건은 화창한 대낮에 벌어졌다(Es geschah am helligsten)〉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얽혀 허우적거리며 벗어나지 못하는, 참담하게 실패하는 수사관의 모습을 통해 뒤렌마트는 기존 추리소설의 인습을 깨고 미묘한 추리적 요소를 가미한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 〈약속〉은 뒤렌마트의 마지막 추리소설로, 부제는 ‘추리소설에 부치는 진혼곡’이다. 부제에는 기존 장르 규칙에 대한 반항심과 장르의 가능성에 대한 야심이 고루 담겨 있다. 한 소녀의 죽음에 담긴 비밀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유능한 형사가 마주한 파국을 그려낸 이 작품에서 우리는 전율과 함께 뒤렌마트의 장르적 도전을 마주하게 된다. 도대체 왜 평범한 외판원이 그토록 간절히 ‘유죄’를 갈망하는가? 전후 출간된 독일어권 작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은 〈사고〉 한편 〈사고(事故)〉는 우연한 사고로 운명의 덫에 갇힌 한 인간의 불행을 신랄하게 풍자하며 파고든 작품으로 1945년 이후 독일어권에서 발표된 작품 가운데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평균치의 선량한 인간 트랍스(Traps)는 그의 이름 그대로 스스로 ‘덫’으로 걸어 들어간다. 퇴직한 판사와 변호사들이 벌이는 모의재판 놀이에서 그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환희’에 젖은 채로 스스로에게 엄한 벌을 내린다. 뒤렌마트는 평범한 외판원의 비극을 통해 사고(思考)가 부재한 현대사회와 삶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의 문제를 고발한다. 뒤렌마트는 후일 이 작품을 방송극으로 개작 발표했고, 이듬해 독일전쟁맹인협회가 주는 방송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추리소설을 지양하는 동시에 극복한 추리소설’이라는 아이러니 뒤렌마트가 갱신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니라 당신네들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진행 방식입니다.” 〈약속〉의 작중 인물 형사가 또 다른 인물 추리소설가에게 건네는 말이다. 뒤이어 모든 사건을 게임처럼 말끔하게 처리하는 추리소설에 대한 비난을 토해낸 후, 형사는 이렇게 덧붙인다. “진실은 이렇게 옛날부터 당신네 작가들의 극작 규칙을 위한 먹이로 던져지고 있습니다. 이젠 제발 그놈의 규칙이라는 것을 팽개쳐버리십시오. … 현실을 향해 나아가려면 완전함을 대담하게 포기하십시오.” 뒤렌마트의 추리소설에는 딱 맞아떨어지는 논리, 장기 게임과 같은 정합성이 없다. 그 대신 ‘운과 우연’이 있다. 우리의 실제 삶이 퍼즐 맞추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삶의 진실이 장르의 규칙을 위한 먹이로 던져지는 관습을 거부하는 뒤렌마트의 시도는 빛을 발한다. 이처럼 장르를 재미로만 소비하기를 거부한 뒤렌마트는 장르 관습 바깥에서 이야기를 펼쳐놓음으로써 동시대인들의 삶이 놓인 비극적 현존의 구조를 밝혀낸다. 잘 쓰인 추리소설은 읽는 동안은 재밌지만 덮고 나면 금세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뒤렌마트의 추리소설은 그렇지 않다. 장르의 재미는 그대로 유지한 채 메시지는 심화했기에, 책을 덮고 나서야 시작될 또 다른 이야기와 질문들을 던져놓는다. 추리소설에 관한 부정적 통념을 한번에 반전시키는 뒤렌마트의 걸작을 통해, 우리는 이 장르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