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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잃어버린 발자국 13/숲의 계보 14/나뭇잎 일력(日曆) 16/장미꽃의 질투 18/도둑눈 19/십이월 20/밴드의 삶 22/의자 24/고사목 25/곰탕 우리는 시간 26/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 28/유령 30/보름달의 이유 32/석류 34 제2부 목판화 37/명탐정 카톡 형사 38/사계절 얼린 가을 40/바람의 사랑법 42/거리 두기 44/영근터에서 45/가시 같은 말 삭제하기 46/내비게이션 48/나의 소풍 50/날개의 이유 51/가죽 소파 52/즐거운 외도 54/가죽 구두 56/귀가 58 제3부 무화과 61/자화상 62/상수리 열매 64/어머니 생각 65/김장김치 66/가을 햇살 68/그리운 손맛 69/제삿날 밤 소묘 70/대추와 아버지 72/월급 73/신사임당을 만나다 74/망가진 우산 76/텃밭에서 77/보석 로시 78 제4부 피아노 81/오 분만 더 82/사과의 숲 83/야자에게 84/각오 86/뒷이야기 87/레퀴엠 88/별 헤는 첨성대 90/아침을 여는 기도 91/잠들지 못하는 숲 92/애벌레의 꿈 94/동백꽃 95/목련 96/수선화 97/바오바브나무에게 배우다 98 해설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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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숲을 지나면 마을이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무작정,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숲에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지고 없는 나무들의 죽은 그림자들이 발목에 잠기고 나무는 잎들을 버리고 나서야 드러날 것이다 낡아진 옷을 그대로 걸치고 숲속에 이르러 어린 새를 잡은 손들이 나무들 사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새의 목청이 소리 없이 숲을 흔들고 옹이진 나무의 눈물 자국이 새들의 발톱이 되었다 예전에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나 숲에는 고래가 살지 않는다고 여기에는 새들이 살고 있다고 날아다니는 새에게서 파랑의 향이 나서 먹어보니 바다의 짠맛이 숲에서 출렁인다 새의 눈물은 숲속의 온도를 잠식하고 숲 사이로 창백한 구름이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죽은 그림자를 따라 새의 눈물을 만져보았다 나무는 서로의 발톱을 손으로 착각하여 붙잡았고 부러진 새의 깃털은 안간힘으로 날아 보려고 했다 나뭇잎은 길 잃은 어린 새들의 발자국이 되었다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은 파랑을 쏟아 놓는다 물이 이마에 흐른다 우리는 숲을 가로질러 마을로 들어갔다 ---「숲의 계보」중에서 지난겨울 누군가 화단에 검정비닐을 씌우고 흙으로 덮어 놓았다 흙 속에 무엇을 숨기었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나는 지나갈 때마다 그 답을 찾으려고 관심 있게 보았다 햇살이 화단에 내려와 두런거리며 종일 놀다 돌아가고 생명수 같은 봄비도 밤새 내려서인지 이불을 걷어차듯 흙을 밀어내고 여린 싹들이 뾰족이 나왔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는데 새싹 너를 보아서는 정답을 모르겠구나 조금만 더 관찰한 후 정답을 맞히려다 화단을 가꾸시는 할아버지께 여쭤보니 튤립이란다 각양각색 예쁜 빛깔로 화사하게 웃으며 반겨준다 화단의 흙은 무지개를 품고 사나 보다 어떻게 색깔을 알고 빨강 노랑 분홍 꽃을 피워낼까 꽃이 지고 나면 어떤 색을 품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텐데 할아버지는 내년에 색깔별로 심으려고 결심하신 듯 꽃대마다 자기 색의 이름표를 목에 걸어 주었다 새봄이 되면 혹시 구근이 색깔을 잊을지라도 흙은 기억하리라 그리하여 갖가지 색으로 꽃들을 피워낼 것이다 아,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중에서 네가 내게로 오기 전에는 누군가의 소식이 궁금했어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며 지냈었다 세상이 급변하고 GPS로 나의 행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21세기에 네가 태어났다 30년을 소식을 모르고 지내던 고향 친구들이 너의 예리한 능력에 소환되어 한자리에 모여 동창회를 하였다 너는 가제트보다 더 멋진 명탐정이다 숨어 있으려 해도 손바닥 안에 있는 손금처럼 찾아낸다 너는 능력이 출중하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들 한다 마음씨가 좋아 누구에게나 선물도 잘 보낸다 물건도 잘 사고 현금을 보내주기도 한다 연인들이 밤새 사랑의 대화를 하도록 도와준다 해외에 있는 가족과도 옆에 있는 것같이 대화도 한다 각종 이모티콘을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보내기도 한다 지나친 정보를 보내주어 불편을 주기도 한다 막 잠이 들려는 순간 카톡 카톡 하며 잠을 깨운다 함께 지내지 않으면 많은 불편이 따를 것을 알기에 명탐정 카톡 형사 너를 해고시키지 못한다 ---「명탐정 카톡 형사」중에서 말캉한 식감을 유리그릇이 삼켜버리고 나면 한 번도 내 입안에 들어와 꿈틀거린 적 없었던 숨결 나는 왜 지금도 사라진 키스의 온도를 믿고 있나 집을 버리고 달아나지 못한 배고픈 검은 고양이 죽음 직전의 유언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컹한 식감 낮은 담장 안엔 한 번도 꽃 피우지 않은 오래된 무화과 열매 칼끝으로 물컹한 심장을 열어 보았다 한 번도 꽃 피운 적 없던 두려움의 무게를 잠재우고 봄이 오면 날고 싶은 욕망으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무화과」중에서 당신을 만난 지 어느덧 이십 년이 훌쩍 지났지만 한결같이 근엄한 모습입니다 여전히 내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떨리는 두 손으로 당신 가슴 마음껏 만져보고 싶지만 마음뿐이고 설렘뿐입니다 일방적이어서 더 좋은 사랑도 있지요 마초 같은 저 근엄함 속에 비발디의 사계가 숨겨져 있다니요 나의 손길로 사계 중 봄이라도 꺼낼 수만 있다면 당신에게 미소를 되찾아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서투른 나의 손길에 당신은 영영 말문을 닫아걸지도 모릅니다만 용감한 자가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지요 이제 용기를 내어볼 생각입니다 내 손가락 끝에 꽃이 피는 날까지 당신을 괴롭혀 볼 생각입니다 ---「피아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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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엿보기
이혜숙 시인의 첫 시집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생각하는 시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왜 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탐색이 필요할 것이다. 시의 정의는 어찌 보면 각각의 시인들이 펼쳐놓은 시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르겠다. 대략적으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자연의 완상(玩賞)을 넘어 궁극적으로 시인 자신에게 내포되어 있는 자아의 확고한 정립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시류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혼자 떼어보는 화투놀이나 혼자 두는 독장기와 비슷하다.”(유종호)는 시 쓰기는 종종 과장된 깨달음에 경도되기도 하면서 전인적 인격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모순을 범하기 일쑤이다. 오래전 어느 연구 결과를 보면 우리는 자신이 타인보다 도덕적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많은 시인들은 도덕적 존재로서의 자각을 시에 들여놓는 일에 힘을 쏟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죽은 듯한 고목을 보았을 때 시 쓰기를 멈춘 나를 보는 것 같았네 죽은 듯이 보이는 나무가 움을 틔우기 위해서는 뿌리가 살아 있어야 하네 꽁꽁 언 땅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정신은 살아 있어야 하네 나의 뿌리는 어디로 갔나 나의 심장은 왜 아직 잠자고 있나 노구에 꽃이 피운 저 고목처럼 나도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리라 ― 「각오」 전문 다시 이혜숙 시인의 이야기로 되돌아 가보자. 시인은 「즐거운 외도」에서 스물두 살에 만난 시를 삼십육 년쯤 지나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고 적고 있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행복인 줄 알았”는데 “가슴속에 감추어 두었던 그를 향한 그리움이/내 심장을 뜨겁게 담금질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라고 칭한 시는 일상적 행복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며, 일상 속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과도 맥이 통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라는 존재는 의식 속에 수많은 타자를 포용해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용인하고 있는 행복은 태어나면서부터 받아들여만 하는 관습과 환경에 적응하면서 얻어야만 하는 무지개와 같다. 시인은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러 그러한 행복을 성취했다. 그럼에도 시(시 쓰기)를 행복에서 벗어난 즐거운 외도라고 정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어느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보장받은 상태에서 우리는 더 많은 행복의 버킷리스트를 만들 수 있다. 멋진 집, 맛있는 음식, 여유로운 여행 등등에서 정신적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인의 자각은 그러한 물질적 풍요를 얻기 위해 내팽개쳐 두었던 불편한 자아의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열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열망은 원망이나 증오의 해소가 아닌 따뜻한 사랑을 찾아가는 여로가 시의 실체이고 시 쓰기인 것이다. 시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이혜숙 시인에게 들어온 시마(詩魔)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순수한 자아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일 따름이다. ―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시인의 말 몇 년째 텃밭을 가꾸는 재미가 컸습니다. 그렇게 시의 밭을 가꾸는 재미도 배웠습니다. 소녀 시절 시인의 꿈을 꾼 적이 있었는지, 잊어버린 지 오래인 그 꿈이 나비가 되어 텃밭을 날았습니다. 늦은 시집이지만, 작지만 큰 기쁨이 되면 좋겠습니다. 2024년 9월 이혜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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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오던 반가운 소식이다. 학창시절에 지녔던 순수하고 맑은 꿈과 희망이 변함없이 간직된 시집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에서 가장 한국적인 여인의 밝고 고운 내면을 본다. 고등학교 때 맺어진 사제의 인연으로 나는 이혜숙을 잘 안다. 늦깎이로 힘겹게 공부를 하면서도 간간이 시를 접하는 모습에서 시인의 가능성을 보았었다. 산과 들녘이 어우러진 여주 땅에서 유년과 여고 시절을 지내온 이혜숙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꿈 많은 소녀였지만 현실이, 생활이, 늘 발목을 잡았었다. 그렇게 가슴에 숨겨왔던 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저간의 노력 또한 나는 안다. 이혜숙의 시인으로서의 집념과 욕망은 단순히 명예나 이 한 권의 시집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더 높은 이상을 꿈꾸며, 몇 권의 시집이 계속 탄생될 것임을 그날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오늘의 이 기쁨과 감동을 오래 간직하며, 좋은 시인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 이강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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