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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열애 13/숯 14/마지막 눈 16/멸치 18/중얼중얼 19/유리집 20/하동행 22/어떤 유전 24/눈동자 25/쌀 26/개여울에 앉아 28/계절 사이에 내리는 비 29/나무 30/심곡항 32/동행 33/마음의 오지 34 제2부 아침 달 37/쓰거운 것들 38/그것조차 묻지 않는 40/밤과 낮 41/그리운 소리들 42/시집을 사다 44/풍동리의 여름 45/양수리 46/변화와 변함 48/막버스의 기억 49/떨림 50/봄비 52/세상의 아침 53/머루나무 한 그루 심은 까닭은 54/빗물 56 제3부 동충하초 59/못 60/낙화 62/눈꽃 63/교동 182번지 64/석이버섯 66/미루나무 67/물수제비 68/고드름 70/바다 71/흐름에 대하여 72/은어 74/벽난로 75/그 마을 76/겨울 숲 78 제4부 실향민 81/만추 82/손 84/11월 85/사강의 노을 86/모기 88/말투 90/열쇠의 시간 91/가을 아날로그 92/미역 94/은비 내리다 95/낙지부인 96/세모 98/거울과 유리 100 해설 박호영(시인·문학평론가) 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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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 고향이 북이라는
오징어 배 선원 김 씨는 툭 하면 뱃고물에서 똥을 누었다 북위 38도 33분 바다 한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넓은 화장실에 크응, 힘을 주고 똥을 누었다 똥은 둥둥 잘도 떠내려가 휴전선을 넘나들었다 김 씨는 속이 다 시원해서 똥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 선장의 잔소리조차 들었다 세상에 나서 저렇게 멋진 똥을 본 적이 없다 파도를 타고 유유히 아버지의 바다로 가는 똥 김 씨는 행복하기만 했다 --- 「실향민」 중에서 지금 내리는 눈이 올해의 마지막 눈이라면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낼 것이다 모진 이별의 아픔이 시작되는 날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으므로. 휴가사유서에는 눈병, 이라고 적을까? 동료들은 안과에 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깜찍한 거짓말은 그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 나는 진짜 눈병이 난 것이다 회사를 나와 바닷가 찻집 창가에 앉아 떠나가는 그녀, 마지막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리라 맥없이 맥없이 바라만 보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눈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외치지는 않으리라 울지도 않으리라 그냥 조용히 얘기나 하자고 하리라 어쩌면 짧은 입맞춤도 하리라 지난 몇 달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정들어 버렸다고 없이는 못 살 정도가 되었다고 차마 말은 안 하리라 서서히 사라지던 어느 날의 노을처럼 어느 날의 안개처럼 가야만 할 운명 구차한 말은 필요 없으리 그저 하루의 휴가를 함께 보내는 일밖에 함께 걷는 일밖에 함께 젖는 일밖에 지금 내리는 눈이 올해의 마지막 눈이라면 나는 기어코 그렇게 하리라 --- 「마지막 눈」 중에서 아침에 무슨 달이냐,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아침 서쪽 하늘을 보라 거기 밤새 길을 밝히던 지친 얼굴 하나 있으리니 그 얼굴 수면 부족으로 창백하리니 야근을 끝내고 터벅터벅 걸어오던 아버지 --- 「아침 달」 중에서 시내에 나가 시집 다섯 권을 샀다 가을이면 당신 생각을 켜놓고 잔다는 시인의 시집과 산벚나무 꽃 필 때 당신에 대한 사랑을 내장부터 똥구멍까지 송두리째 꺼내 보여주고 싶다는 시인의 시집과 운석을 지구에 떨어진 싸늘한 심장이라는 시인의 시집과 후두두두둑 빗소리에 깝죽새의 울음이 사방으로 튄다는 시인의 시집과 아기 업고 사람 많은 터미널, 모서리를 오가며 울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시인의 시집을 샀다 어릴 때 눈깔사탕 숨겨놓듯 네 권의 시집을 숨겨놓고 한 권만 손에 든다 오래 오래 사탕을 빨아 먹었듯이 아주 아주 천천히 시집을 읽는다 시 한 편 끝날 때마다 책상 한편 놓아둔 시집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혼자 비밀 간직한 채 비식비식 웃으며 다니니 식구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본다 --- 「시집을 사다」 중에서 손을 잡는다 너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포갠다 국경선을 넘듯 힘겹게 저 보스포러스 해협의 배처럼 남루한 시절을 건너 클로버 가득 찬 들판으로 오, 클로버 가득 찬 들판으로 너의 손을 잡는 순간 지구에 꽃이 핀다 --- 「손」 중에서 나에게 가을은 노을이다 붉은 감잎 너머 노을 떨어질 때 보낸 엽서 한 장 사강 사설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다 우연히 찾은 갯마을에서 맛본 생굴 비린내 엽서에 묻어 있었다 프랑수아즈 사강과 이름이 같아서였을까 그 소읍의 모든 것이 좋았다 바다로 연결된 방죽 끝까지 걸어 오가기를 수차례 운명처럼 한 여인을 만났으면 하였다 사강을 닮은.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방죽 끝에서 노을 한 장 떨어지며 말갛게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노을에 내 그리움을 적어 보냈다 붉은 엽서였다 붉은 고백이었다 바다와 섬 너머로 찬란히 떨어져 내리던 사강의 엽서 해마다 다시 그 엽서를 쓰는 것이다 사강의 붉은 노을 한 장 --- 「사강의 노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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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철의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귀향 의식’이다. 귀향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이다. 연어가 아무리 먼 바다로 나가더라도 그들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듯이, 인간도 연어 같지는 못하지만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고자 하고, 어릴 적 대했던 모든 풍물들을 그리워한다. 이 그리워하는 대상에는 사람이나 자연물뿐만 아니라 ‘놀이’도 포함된다. 그러나 우리는 ‘고향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설사 고향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고향은 어릴 적 꿈을 키우던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 순수함도 잃었고, 자연물도 그 옛날과 같지 않고, 자기를 보살펴주던 많은 분들도 이미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 대신 낯선 풍경들이 주위에 가득 차 있다. ‘귀향 의식’이 생기게 됨은 당연하다.
그날 십자가 아래 종탑에서 새벽 종소리가 새처럼 날아가고 이윽고 후투티가 공중에 선을 그으며 자신의 몸을 울어댔다 두부 장수의 종소리가 울린 건 후투티가 언덕 벽의 자기 집으로 막 들어간 뒤였다 아침 식사를 끝낸 동네 꼬마 훈이가 세발자전거를 끌고 나오자 새소리 같은 따르릉 소리가 마당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고무줄 소리, 우물가 두레박 소리, 국수 치대는 소리, 어이 어이 애들 모여라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 거기에 화답하는 어이 어이 애들 모여라 남자는 필요 없고 여자 모여라, 소리 따로따로 놀다가 부아앙 소독차 소리에 함께 고함치며 신작로를 내달리는 아이들 마음 내키는 대로 예술적으로 쩔그럭대는 호박엿 장수 가위질 소리 그 어린 날의 그리운 소리들 - 「그리운 소리들」 전문 이 시는 시인이 직접적으로 귀향의 소망을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한 어린 날의 소리들을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귀향 의식’이 모티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기억 속의 소리들을 파노라마처럼 전개한다. 아마도 60대가 넘어선 사람들은 이 시에 나열된 소리들-새벽 종소리, 두부 장수의 종소리, 세발자전거의 따르릉 소리, 고무줄놀이하는 소리, 우물가 두레박 소리, 국수 치대는 소리, 엿장수 가위질 소리-을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그 소리들은 지금은 들리지 않는 사라진 먼 과거의 소리이지만, 이 시를 통해 다시 살아나고 우리를 추억하게 한다.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며 나도 과거엔 저런 소리를 들으며 자랐는데 그 소리들이 모두 어디 갔을까 하며 아쉬움과 허망함의 감정을 가질 것이다. 시인은 왜 이 소리들을 소환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릴 적 그 소리들을 듣던 때가 충족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때 충족함이란 물론 정신적 충족함을 지칭한다. 궁핍한 시대에 많은 것들이 부족했어도 그때가 만족하고, 아늑하고, 즐거웠다. 그러기에 어릴 적으로의 귀향을 소망하는 것이다. 귀향은 ‘잃어버려 있음’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이다. 귀향하는 자는 이를 통해 자기 발견을 도모한다. 자기도 모르게 본래적인 자아를 떠나 멀리 떨어져 나온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귀향 의식’의 근원에는 존재의 불안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불안이 부정적 감정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긍정적인 감정이다. 어느 누구도 불안하지 않은 자는 없다. 태어나는 순간 ‘내던져진 존재’, ‘죽음을 향하는 존재’가 된 인간은 자기의 현존을 불안해한다. 이를 쉽게 이해하자면 엄마의 품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유아기를 생각하면 된다. ― 박호영(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첫 시집을 낸다. 첫 발자국을 뗀다. 삶의 원형을 찾아 떠나는 문학, 그것이 있어 나의 인생길이 덜 쓸쓸하였다. 이 시집이 있어 여러분이 덜 쓸쓸하면 좋겠다. 2025년 10월 임명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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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시를 쓰고 시인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 속에 ‘시적’인 것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이라는 것은 아름답고 순수한 감정을 지칭한다. 한 마디로 서정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다. 임명철 시집 『너의 손을 잡는 순간 지구에 꽃이 핀다』에 실린 시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순수한 서정의 ‘시적’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흐르는 물처럼 잘 읽힌다. 얄팍한 기교나 현학적, 관념적인 시어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시인으로서의 기본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임명철 시인이 계속 좋은 시들을 선보일 수 있음을 반증한다.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그동안 임명철 시인이 보낸 인내와 인고의 시간을 생각하면, 이 시집은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 박호영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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