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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패총 13/이석 14/거미 16/묵을 쑤다 17/눈물의 전염 18/생리증후군 20/둔덕 22/절벽 묘지 23/게으른 씨앗 24/연어 26/추락 주의 구간 28/이주 29/정적 30/반딧불이 32/소망의 집 33/오르골 34/난시 36 제2부 낙과 39/핸드 드립 40/문어 42/육필 44/다육 45/미모사 46/안개주의보 48/깨진 그릇 49/규화목 50/택배 52/풍매 54/수첩 55/폐어 56/해풍 58/MRI 59/간월도 60/해물칼국수 62 제3부 코끼리들의 장례식 65/짓다 66/고장 난 시계 68/석류 70/압화 71/낙타 72/눈티 74/유리 닦는 사람 76/매향(埋香) 77/뇌우 78/동충하초 80/소동 82/부전나비 83/탐구생활 84/인터뷰 86/내 위치는 88/몸과 마음 90 해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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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그물이 시무룩하게 출렁인다
마지막 먹이조차 기억하기 어려운 허기 그 턱에 깨물려 꽤 많은 시간이 몸부림쳤다 오랫동안 절망을 반복해 오며 거미는 공중에 점점 커다란 육체를 늘어뜨렸다 더 멋진 솜씨로 수예를 뽐냈다 굶주린 그의 목구멍을 꼭 닮은 바람의 편물을 펼쳐놓고 정교하게 허공을 메워갔다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이 되고 싶어 매듭처럼 줄곧 고정돼 있기도 했다 침샘이 뻐근하도록 숨어서 노려보는 여러 개 인내심 많은 눈동자 마주하는 날에는 누구도 이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충분한 양의 외로움에 포위되었다 몸을 뚫고 들어오는 이빨 푸짐한 이 울음 --- 「거미」 중에서 잠은 늘 꿈을 남겨서 성가셔 온종일 아무런 징조도 없는데 괜한 의심이 생기거든 오늘 밤은 송곳니를 벗어두고 자고 싶어 내 그림자를 보고도 사납게 물어뜯었으니까 이거 봐 스타킹에서 망치랑 톱이 나와 보름 전 불 사그라든 몸 쇳물 대신 가득 울음을 끓여 고함을 치며 함부로 불똥을 던지더니 뱃속에 고로(高爐)가 있다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해 어떨 땐 누가 나를 향해 소화기를 쏘아 주었으면 했어 할머니 또 수도꼭지를 틀어놓았네 이부자리가 온통 이끼야 미끄럽고 비려 이맘때 가시밭엔 잇꽃이 피었던가 손가락을 짚어봐 근데 엄마 대문은 잠근 거야? --- 「생리증후군」 중에서 씨앗은 화분 속에서 공상을 오물거린다 말라비틀어진 어미의 젖에서 굴러떨어져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 이게 뭐람 대관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씨앗은 연신 하품이 나왔다 오래전 풀 한 그루를 뒷바라지하고 늙어버린 흙이 혀를 찼다 이보게, 모든 것은 열매로 이어진다네 많은 씨앗들이 그것을 증명해 왔다고 흙은 두런거렸다 씨앗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숱한 밤들이 그윽하게 입김을 불어주었건만 머리맡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떡잎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직 때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글러 먹었다는 얘기 흙의 근심을 모를 리 없다 씨앗은 애써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어졌다 흙이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근성이 부족해서 도대체 뭐가 되겠나 참으로 딱하군 그래 못마땅할 때마다 하는 소리가 건너왔다 씨앗은 철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비어가는 제 속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 「게으른 씨앗」 중에서 가까이 다가갔을 겁니다 그렇게 바짝 들여다보고 있으면 금방 지치고 말지요 초점을 한곳에 모으고 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인상을 찌푸리는 건 그 때문입니다 길을 걷다가도 자주 발목이 접질렸어요 그런다고 어디 눈 하나 깜박이기나 했게요? 거울을 볼 때마다 눈두덩 가득 고인 충혈을 눈감아 주었습니다 당신이 번져 보이는군요 파스텔처럼 뭉개진 확실하지 않은 확신을 따라왔습니다 새의 안구처럼 그저 애벌레만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가장 허술한 도수를 주세요 굴절이 심한 게 좋겠습니다 교정을 안 했습니다 병든 눈입니다 --- 「난시」 중에서 새끼를 들어 올려 냄새를 맡는다 조그만 얼굴을 어루만진다 곁에 있던 코끼리들 차례로 받아 든다 무리는 긴 여정을 떠나왔다 어린 것은 결국 일어서지 못했다 멈춰 흔적을 기억하고 있다 곧 폭풍이 올 것이다 나이 많은 코끼리부터 하나둘 앞장선다 경험이 그렇게 일러주었으므로 --- 「코끼리들의 장례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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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엿보기]
크고 힘센 것들이 따로 있어서 그것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하늘 아래 피조물 중에 그런 것들은 없다. 설사 크고 힘세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쳐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세상은 온통 작고 약하고 쓸쓸한 것들의 집합이다. 그러니 만일 누군가 이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을 알고자 한다면, 작고 약하고 쓸쓸한 것의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 이것을 제외하고, 이런 속성을 제외하고, 인간의 ‘의미론’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며 따라서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은 절반만 옳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가득 차 있되, 이것들은 절대로 인간이 아닌 상태(초인)에 이르도록 극복되지 않는다. 문학은 극복되지 않는 결핍들의 상세한 목록이며, 그것들보다 불과 조금 나은 미래를 가정할 수 있을 뿐이다. 문학은 이런 점에서 희극보다는 근본적으로 비극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비극이 갖추어야 할 조건 중의 하나로 주인공이 반드시 ‘위대한 사람(great men)’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위대함’이란 물론 인품이나 사상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나 권력의 크기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자면 비극에 걸맞은 주인공은 노예나 평민이 아니라 왕, 왕자, 장군, 귀족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 이후 셰익스피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학의 주인공은 거의 예외 없이 귀족들이었다. 그래서 그 귀족들은, 주인공들은, 그렇게 크고 힘센 것들이었나? 전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비극의 효과란, 신분상 가장 우수한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을 비극적으로 몰락하게 함으로써, 무한 능력의 소유자처럼 보이는 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이 결국 유한하고 (한심할 정도로) 덜떨어진 존재들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잘나 봐야, 잘난 체 해봐야, 인간은 결국 그 모양, 그 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고대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서양 비극의 강력한 메시지이다. 바지락 한 사발 얻었다 찬 없는 부엌이 소란해진다 부르르 들썩이더니 살이 열린다 밥상 모서리에 당신과 마주 앉아 쌓아 올린 조개껍데기 쓸어모아 마당 한쪽에 던져놓고 들어온다 희끄무레 짚어지는 이 저녁이 그리워 지끌거리는 날 있을까 층층 파묻힌 끼니 띠를 이룬다 ― 「패총」 전문 홍정연에게 세계는 작고 약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것들의 집합이므로, 스펙터클(spectacle)은 오히려 세계의 본질을 가리는 ‘빤짝이 옷’에 불과하므로, 그리고 가장 일상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것이므로, 홍정연은 굳이 스펙터클을 시적 소재로 삼지 않는다. 위 작품에서 홍정연은 기껏해야 마주 앉아 남에게 얻어온 바지락 한 사발이나 까먹는 커플의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보여준다. 홍정연에겐 스펙터클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장면이 시가 된다. 이 사소한 일로 “찬 없는 부엌이 소란해”질 정도로 이들의 삶은 작고, 조용하고, 평범하다. 그럼에도 이들 삶의 이 순간이 전 우주에서 오로지 이들에게만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며, 그래서 매우 절실한 것임을, 시인은 “이 저녁이 그리워 지끌거리는 날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대신한다. 이 작고 특별할 것도 없는 저녁이 너무 그리워 지끌거리는 시간을 앞질러 그림으로써, 시인은 이 사소하다면 사소할 장면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게다가 “패총”이라는 제목(이들의 이 평범한 삶이 유적이 될 수 있다니!)은, 조개나 까먹는(?), 이 작고 평범한 시간을 인류 문화의 유구한 역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제목 덕분에 커플의 사소해 보이는 일상은 보편적 인류의 다층적이고도 역사적인 자산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조개를 까먹든 무엇을 하든, 인간이 하는 일 중에 하찮고 사소한 일이란 없다. 그것은 모두 역사, 문화, 사랑, 그리고 상처의 의미로 무거운 기호(sign)들이다.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어쩌면 이곳의 풍토가 좋지 않았는지 모른다. 나는 오래 썩었고 불화와 불일치들을 사랑했다. 그것이 나의 힘이었고 나는 울보가 되었다. 2025년 12월 홍정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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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연 시인은 이 세계가 작고 약한 것들의 집합이고, 그 유한성이 이 세상 모든 내러티브의 근원적 동력임을 잘 알고 있다. 세계는 결핍의 존재들이 무수한 층위에서 마주치고 섞이며 충돌하고 변화하는 시장이자 각축장이다. 홍정연은 그 결핍들이 만드는 다양한 주름들 안에서 세계의 가동 원리를 발견하고, 결핍 때문에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공포를 노래한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것이므로, 홍정연은 굳이 스펙터클을 시적 소재로 삼지 않는다. 그는 사소해 보이는 것들의 목록을 열거하지만, 그것들을 향한 공감을 애써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연민과 공포를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 놓을 뿐이다. 그렇게 독자들은 무수한 결핍의 존재들 속에서 다름 아닌 자신을 읽게 될 것이다. -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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