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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록의 울음이 흰 숲을 가른다
김재숙
문학의전당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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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전당 시인선

책소개

목차

제1부
바위 13/그늘 아래 쓴 글 14/상생 16/향기로 번역되는 언덕 18/산책 20/그림자 없는 시계 21/녹색 시간 22/머무는 파랑 24/오선지 위의 까치 26/별이 빛나는 밤 28/샛강의 속삭임 30/정박의 시간 32/나는 번지는 중 34/고장 난 라디오 36

제2부
작은 안부 39/계영배 40/재 너머 자전거 42/아이비의 생존법 44/비자림, 빛의 편곡 46/초록을 열다 47/느린 시계의 노래 1 48/느린 시계의 노래 2 50/느린 시계의 노래 3 52/꽃무늬 찻잔 54/바늘 끝에 맺힌 시간 55/날개의 시간 56/돌 위의 낮잠 58/고재 찻상 60

제3부
눈과 눈 63/빛 속에 접힌 소리들 64/검은 나비 66/오래된 책 68/대기자 70/작천정 71/책 대신 구름을 읽다 72/민들레 바람 되어 74/먼지의 하루 76/몬스테라의 말 78/플라멩코의 저녁 80/겨울 소리 82/초대받지 않은 관객 84/스탠드의 속삭임 86

제4부
봄을 데우는 굴뚝 89/고정관념 탈출기 90/남겨놓은 무늬 92/어제의 방심 94/억새평원 96/산의 방식 97/스투키 98/세월이 흘러 100/스트랜딩 102/라벤더 104/산책과 놀이 사이에 핀 꽃 105/설강화 106/금전수의 반란 108/고독은 코발트블루 110

해설 나호열(시인, 문학평론가) 111

저자 소개 1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동국대 사회과학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졸업했다. 2022년 《스토리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수채화공모대전, 한국 회화의 위상전 등에서 수상하였으며, 대한민국 통일명인미술대전 초대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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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4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88g | 125*204*8mm
ISBN13
9791158967819

책 속으로

말이 없다는 건
모든 것을 품고 있다는 뜻

한자리에 오래 있으면
기다림도 단단해진다

흘러간 물소리
부딪혀 상처 입은 것들까지

모른 척
등에 얹어 준다

그렇게 바위는
말보다 무겁고
침묵보다 깊어진다
--- 「바위 전문」 중에서

겨울빛을 사랑하다
신의 눈을 가진 화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눈발 속을 건너온 까치가
꿈속 가지 위에 내려앉는다
검은 날개와 흰 눈 사이
빛이 한 박자 울린다

정오의 햇살은 무너진 눈 위로 흩어지고
발자국 하나, 또 하나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돌담집엔 푸른 눈빛, 콧수염
겨울빛에 반사된 누군가 서 있고
나뭇가지 다섯 개를 잇댄 대문 위에
까치가 산다

까치는 날지 않는다
투명한 오선지 위에 앉아 겨울빛을 연주한다
눈송이 하나, 또 하나
숨결처럼 흐르는 선율

햇빛이 속눈썹을 파고들 때
손끝으로 공기를 긁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까치
빛 속으로 음표를 흩뿌린다

불현듯, 꿈의 수면에 파문이 일고
창밖에는 그가 사랑한 겨울빛이
푸른 그림자를 키우고 있다
--- 「오선지 위의 까치 전문」 중에서

그녀는 벽을 좋아한다
거칠고 차가운 표면일수록
더 단단히 매달릴 수 있다

누군가 길을 끊으려 해도
그녀는 옆에서 다시 방향을 만든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몸짓은
포기 대신 집념의 언어다

그녀는 혼자 서는 법을 모른다
함께 있어야 자란다
때로는 담벼락, 때로는 창틀
낯선 곳에도 서슴없이 몸을 기댄다

누군가 의존이라 하지만
나는 연결이라 부른다
붙잡음이 있어야 확장도 있는 법

어쩌면 삶은
서로의 표면에 스며들어
천천히 얽히는 일
--- 「아이비의 생존법 전문」 중에서

눈서리를 비집고
동백 하나 햇살을 들인다

순록의 울음이
흰 숲을 가르며 그림자를 씻는다

삭풍 속 소나무
가지 끝에 머무를 자리를 남긴다

발끝의 차가움
미소가 된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
마음은 마음을 배운다

눈송이 하나
세상의 체온으로 내려앉는다
--- 「눈과 눈 전문」 중에서

누구나 지워지지 않는
구멍 하나쯤 안고 살아가지요

구멍이 많아 불완전하다고 하지만
그 틈으로 빛을 받아들입니다

빛은 직선으로만 오지 않아요
벽을 돌아 흐르고
바람에 밀려 흔들리며
숨어든 자리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숭숭 구멍 난 자리는
결핍이 아니라 통로
바람이 지나가고, 햇살이 흩어지고
이름 없는 목소리조차 조용히 스며듭니다

나는 완벽을 닫지 않아요
결핍을 열어두는 법을 배웠거든요
그럴수록 잎맥은 멀리 뻗어가고
뿌리는 깊게 내린다는 걸
몸이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삶은
자신 안에 작은 틈을 내어
빛이 머물 자리를
슬며시 준비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 「몬스테라의 말 전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빛과 그림자,
바람과 목소리 속에서
시간은 조용히 노래했고
나는 그 리듬을 적어 두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지나간 것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
느린 시계의 노래처럼

이 시집이
흘러가는 하루 한가운데서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작은 그늘로 남기를

2026년 4월
김재숙

하이데거는 “존재는 시간이다”라고 하였다. 즉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마주친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응답하는 본질이 존재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별적 모든 사물들을 존재자라고 한다면 ‘존재’는 존재자들을 있게끔 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존재자로 살다가 어느 순간, 존재 자체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특히 예술적 감각에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은 “땔감도 못 된다는 목공의 말에/눈빛이 잠시 휘청거”(「대기자」)리는 순간에 일어나는 자각이 존재와의 조우임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조우는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다. 개별적 존재자인 나는 유한한 삶에 함몰된 나머지 회한이나 절망에 빠지기 쉬우며 짐짓 달관의 달콤한 환상 속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위무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아무튼 ‘존재’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지만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흘러가면서 머무르는 모순 관계 속에서 시간과 존재는 쉽게 장악할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이다.

김재숙 시집 『순록의 울음이 흰 숲을 가른다』에는 많은 화가들의 그림과 그 그림들을 소재로 삼은 시들이 등장한다. 김환기, 살바도르 달리, 모네, 고흐, 세잔, 르네 마그리트 등 서구의 인상파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지는 현실계 너머 혹은 그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역으로 추상을 통해 현상을 재현하는 시(詩)의 영역으로 이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재숙 시인은 자신이 목도했던 그림들을 통해 인식하게 된 관념들을 다시 자신의 생활 속에 이입하고 시화(詩化)하는 작업을 통해 삶의 의미를 규명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녹아내리는 시계 위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고
멈춘 채 꿈을 꾼다

뒤틀린 그림자의 끝에서
늘어나기만 하는 순간을
주워 담는다

기억은 바람에 흩어지고
실체는 유리 조각처럼 부서진다
거울 속 나를 찾으려다
문득,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초현실의 시계는
무한히 돌아가고 있다
― 「그림자 없는 시계」 전문

인용 시는 1931년 제작된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현상을 감각기관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꿈틀거리는 세계를 오가는 그의 그림은 녹아내리는 회중시계를 통해서 시간의 왜곡을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시간은 균일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환경에 따라―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참조―절대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시인에게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 나호열(시인, 문학평론가)

추천평

김재숙 시인의 시를 읽는 동안, 나는 자주 그늘 곁에서 서성거렸다. 햇살이 빠져나간 자리에도 기억이 남는다는 사실, 말이 끝난 곳에서 더 오래 울리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 시집은 조용히 일러준다. 시인은 풍경을 바라보되 소비하지 않는다. 풍경 속에 남아 있는 체온과 잔향,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끝내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시는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정박’에 가깝다. 계절이 바뀌어도 그 자리에 남아 누군가의 마음을 붙잡아 주는 방식, 그것이 김재숙의 시다. 이 시집의 문장들은 수채화처럼 번진다. 그러나 번짐은 흐릿함이 아니라 감정의 확장이다. 출근길의 신호등, 하얀 캔버스, 빈 공책의 빛 같은 사소한 장면들이 삶의 중심이 된다. 빠름을 강요하는 세계에서 그는 느림을 변명하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기에 놓치지 않는 것들—빛이 접히는 각도, 닳지 않은 슬픔,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그것들이 시의 재료가 된다. 아이비와 몬스테라, 스투키와 라벤더 같은 식물들 또한 장식이 아니라 ‘견디는 법’을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말로 위로하지 않고 존재로 위로하는 방식, 그것이 이 시집의 품격이다. 김재숙의 『순록의 울음이 흰 숲을 가른다』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시인의 시집을 넘어, 마음을 그릴 줄 아는 시인의 시집이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조용히 노래하는 한 소녀의 목소리처럼, 우리는 그 목소리를 따라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조금 더 단단해진 고요를 품고. - 정현우 (시인,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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