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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단비의 서(序) 13/쇠똥구리 14/송화 16/겨울 공화국 17/영원의 꽃 18/낙타 20/통증 21/가을 앞에서 22/어느 한 밤 24/물억새 25/깃대를 꽂으며 26/연의 밀어(密語) 28/갈잎의 비명 29/쥐똥나무를 보며 30 제2부 돌의 외침 33/변신 34/잠의 주문 36/갱년기 37/나의 겨울 산 38/서고사 가는 길 40/한살이 41/오월의 꽃 42/노을 단상 1 44/떼로 피면 45/얼음의 소리 46/샛별 48/별똥별 49/말살이 50 제3부 시인이란 53/노을의 경계 54/기원 56/함성 1 58/함성 2 59/지금 우리는 60/겨울 들녘에서 62/부활 64/파도에게 65/사월의 제주 66/나와 너의 거리 68/광야 70/말의 비행 72 제4부 토담 75/아빠의 자리 76/엄마의 노을 78/엄마를 봄 80/삶터 82/고향 83/바람의 뜰 84/그날이 오면 86/봄을 꿈꾸며 88/활어 89/눈물 90/첫사랑을 위하여 92/간구 94/석류 96 해설 백인덕(시인) 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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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눈으로 보인 지금 이 순간을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시인하는 사람 참시인이란 마음속 우물에 깊이 갇힌 수정 같은 말들을 쉼 없이 퍼내어 마른 땅을 적시는 농부 살아 있는 시인이란 깊은 생각 속에서 건져 올린 파닥거리며 날뛰는 물고기를 그물로 잡는 어부 ---「시인이란 전문」 중에서 이름도 시원찮은 쇠똥구리 질펀한 사바나에 어둠이 쏟아져도 누군가 내지른 더러운 바닥의 똥을 물구나무서서 굴려 가며 새 생명의 동그란 삶터로 쉼 없이 만들어 간다 낮의 밝음과 세상을 볼 눈이 있어도 뛰어난 지식과 언변을 가진 목청 좋은 사람에게 주눅 들고 가던 길을 잃고 종종 헤매기도 하는데 아름드리나무도 없는 사바나의 청소부인 녀석들은 밤이나 낮이나 길을 잃지 않는다 땡볕에 제 한 몸 숨길 그늘도 마땅찮은 초원에서 어쩌다 무거운 발꿈치에 밟힐지라도 평생 똥만 알고 사는 꿋꿋한 쇠똥구리는 길을 잃지 않는다 밤하늘의 강물처럼 흐르는 싸라기 같은 잔별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쇠똥구리는 생명의 길을 찾아 떠난다 ---「쇠똥구리 전문」 중에서 태고의 삶을 떼어낸 고인돌 오래전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 흘러간 삶을 돌아본다 우리네와 다른 눈을 가졌나? 그들을 무엇을 보았길래 그토록 열망하며 수천 년 비바람의 채찍에도 꿈적하지 않는 저 돌들을 떼어냈을까? 망치는 영원한 시간을 노래하지만 해와 달은 모든 것을 빛바랜 꿈으로 구겨 넣으며 역사를 갈무리한다 세워지지 못하고 나뒹구는 꿈을 잃은 돌무더기 사이로 한철 피고 지는 여린 들꽃들을 보며 이끼 낀 그 돌들의 외침을 듣는다 ---「돌의 외침 전문」 중에서 빚을 독촉하는 채권자인 듯 온몸을 오로지 빛을 향해 가지를 뻗는 구부러진 겨울나무들 다닥다닥 붙은 마른 잎을 떨구는 가을빛 바다를 본다 나를 닮은 겨울 산에 오른다 양지뜸에 웅크린 철 이른 봄풀을 보며 얄팍한 주머니에서 어쩌다 튀어나온 몇 푼으로 이만하면 괜찮은 나이려니 스스로 위무하면서 등 굽은 땅에 나이테를 늘리며 꾸역꾸역 살아온 벌거벗은 나를 본다 남은 진액을 뿌리에 그러모아 간신히 겨울나기로 사는 나무처럼 그저 세상이 변하여 좋은 날만 오기를 바라는 용기 없는 소시민으로 내가 늙어가고 있음을 오롯이 나를 찾은 산에 오르다 두툼히 깔린 마른 잎을 딛고서 햇빛을 꽉 깨문 입술로 시린 바람을 견디는 키 작은 광대나물꽃들을 본다 ---「나의 겨울 산 전문」 중에서 무너져 내리는 어깨를 햇볕은 감싸 안으며 토닥입니다 군데군데 구멍 난 틈으로 가끔은 비바람이 머물며 살을 헤집기도 하건만 앙다문 입술로 그 자리를 견디며 서 있습니다 어깨 위에 쪼르르 앉은 새들 가슴에 품은 제비꽃 무리 발치 아래 둘러준 민들레꽃들도 오늘을 견뎌줘 참으로 고맙습니다 철철이 다른 여든 해를 훌쩍 넘기며 구부러진 등허리에 숨소리는 가쁘게 오르지만 뒤축 닳은 신발 끌며 마당으로 나서는 아버지 발걸음 뒤로 늘 햇살이 머무는 그곳이 마음의 양지입니다 ---「토담 전문」 중에서 넌 에덴의 열매라 물 댄 동산에 심은 나무에 달려 무르익어 벌어진 열매 껍질 밖으로 알알이 맺힌 씨들의 쏟아짐이여 에봇에 박힌 보석 석류 같구나! 넌 그리스도의 열매라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려 채찍 맞아 찢기고 창에 찔린 인자의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온 생명의 붉은 핏방울이여! ---「석류 전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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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선언은 언어는 사물과 사건을 지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특히 시적 언어는 대상에게 이름을 부여할 때 그 고유함을 침해하지 않고, 오히려 온전히 빛나도록 '내맡김(Gelassenheit)'의 방식을 따른다. 시적 언어가 작동할 때 세계는 기능적 대상으로 고정되지 않고 새로운 의미 지평을 열어 보여준다. 하이데거는 후기 사유에서 ‘사신(四神, Geviert)’이라는 구도를 제시했다. 하늘(Sky), 땅(Earth), 인간(Mortals), 신적 차원(Divinities)이 서로 얽혀 하나의 장(field)을 이룬다는 개념이다. 인간의 거주는 이 네 범주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농부의 들판에는 땅의 비옥함, 하늘의 빛과 비, 인간의 노동, 그리고 풍요를 기원하는 경외가 동시에 스며 있다. 이런 경험 속에서 세계는 도구가 아니라 동반자로 다가온다.
고은주 시인은 존재의 망각을 거듭하는 시대의 경계에서 오히려 ‘내맡김’이라는 방식을 통해 시적 거주의 조건과 양상을 만들어 간다. 특히, ‘본다’라는 지각 작용을 통해 정동(affection)을 불러일으키면서 이때 발생하는 ‘소리(외침)’에 주목함으로써 은폐되었던 존재를 경계 선상에 본래 모습으로 떠오르게 한다. 찢긴 궁창 아래로 구름아, 구름아 단비를 뿌릴지어다 검은 땅이 말갛게 씻겨지도록 땅이여, 붉은 흙이여 닫힌 입을 벌리고 내린 빗물을 가득 삼켜 닳지 않는 샘들을 뿜어낼지어다 하늘과 하늘들이여, 푸르게 열릴지어다 마른 포도나무 가지에 푸른 움들이 돋고 한여름 방울방울 땀방울 맺히듯 열리는 참 포도를 위하여 골짜기 깊은 산허리 날빛을 들이면 치마처럼 두른 무성한 안개 걷히고 젖줄 같은 강물이 흘러 마르지 않는 땅이 드러날 때 씨 맺는 알곡과 기쁨의 나무들이여 시들지 않는 열매를 낼지어다 ― 「단비의 서(序)」 전문 계절만큼 확실한 시간의 지표도 없다. 자전과 공전은 추상 개념에 가깝지만, 계절의 순환은 시간의 경과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특히, 사계절이 있는 기후와 24절기를 만든 농경문화의 역사에서 그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이 문화 전통에서 ‘단비’는 주로 봄,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내리는 비이거나 한여름 태풍 사이 가뭄에 내리는 비를 의미한다. 이렇게 계측과 생산이라는 멍울을 씌우는 것이 사물의 도구적 이해다. 시인의 ‘단비’는 모든 도구적 활용을 벗고, ‘땅(대지)과 하늘’의 소통 매개로 호명된다. 거기에 ‘서(序)’는 ‘연다’와 ‘요체(중심적인 내용)’라는 뜻이니, 위의 작품은 하이데거 ‘사방론’의 고은주 시인의 변형이라 할 것이다. 시인은 대지와 하늘이 비, 바람으로 서로를 찢지 않고, 대립이 아니라 상생으로 열린 세계를 한결같이 바란다. 이 대지가 “골짜기 깊은 산허리”일지라도 “날빛을 들이면” 언제나 “젖줄 같은 강물이 흘러 마르지 않는 땅이 드러”나고 “씨 맺는 알곡과 기쁨의 나무들”이 자랄 것을 바라고 믿기 때문이다. ― 백인덕(시인) 시인의 말 긴 밤 지나고 천 개의 눈을 뜨는 아침을 맞아 이제 겨우 첫발을 뗐을 뿐, 아직 갈 길이 멀다. 2026년 3월 고은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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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주는 요란하지 않으며 티 내지 않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인이다. 하지만 시에 대한 열정과 심연은 매우 절제된 활화산의 시심을 가지고 있다. 시는 메타포이기에 사물을 승화시켜 라포의 대상으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들은 이러한 메타포를 통해 가족에 대한 애잔한 사랑부터 사회적 아픔까지도 아우르는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또한 삶을 마주하는 숭고한 의지까지도 깊은 울림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낙타 등에 솟은 ‘혹’을 가족들의 생계를 짊어진 “아버지는 낙타가 되어 간다”(「낙타」)고 형상화하는 과정도 매우 탁월하다. 꽃이 피고 열매 맺는 화려한 결과물 뒤에 숨겨진 ‘뿌리’의 노고를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면서 “너는 진정 영원한 꽃이라”(「영원의 꽃」)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심상에서 우리는 고은주 시인의 시심이 얼마나 맑고 깊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고은주의 이번 첫 시집 『천 개의 눈을 뜨는 아침』은 고통을 견디고 생명을 피워내는 과정을 아름다운 시어로 형상화한 수작들의 집합체라 할 것이다. - 김경수 (문학평론가, 《착각의 시학》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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