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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많은 그녀들
안유경
문학의전당 202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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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전당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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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나의 국숫집 13/낮달 14/가을볕 아래 16/깜빠뉴가 있는 풍경 18/미병 20/밥을 먹었다 21/가을 22/참외 24/양초를 사러 가기로 했네 26/그러면의 배경 28/아침의 매뉴얼 29/어느 날 30/책임을 묻지 마라 32/세 개의 새벽 34/오늘의 미션 36

제2부

몰타 39/저물녘 40/어둠 42/벼랑 44/꿈의 국적 45/부서지는 골목 46/오래된 인사법 48/숙희 50/꿈 51/루시의 오후 52/롯지가 보이는 언덕 54/이후로도 오랫동안 55/부표 56/박쥐 58

제3부

하루의 효과 61/노인이 온다 62/축제는 끝났다 64/나의 가을 66/자정의 노래 67/노인이 간다 68/족(族)에 관한 사유 70/문화극장 72/물방울무늬 73/밤들이 노니다가 74/나의 5월 76/하루 77/유년의 모빌 78/아스피린 같은 80

제4부

끝나지 않을 이야기 83/1981 84/내겐 너무 많은 그녀들 86/아침 다섯 시 87/붉은 순간들 88/제노사이드 90/동백 92/우기 93/금지령 94/노을은 붉은 화장을 하고 96/아무 날 98/벌써 100/손이 닿는 곳 101/노랑 도시 102/서곡리 1752번지 104

해설 백인덕(시인) 105

저자 소개 1

강원 원주에서 태어나 2023년 《강원작가》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강원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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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1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76g | 125*204*7mm
ISBN13
9791158967246

책 속으로

가게 앞에 빨간 우체통 하나 세워놓고
국숫집을 하고 싶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곳에
사방이 뚫린
포장마차 하나 지어놓고
주머니 가벼운 사람도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멸칫국물 가득한 가마솥 걸고
구수한 사투리와
조금은 짓궂은 농을 고명으로 올려
커다란 대접에 양껏 담아주는

깡통 하나 천장에 매달아 놓고
삐뚤거리는 손 글씨로
한 그릇에 천 원이라고 써 놓은
그런 국숫집을 하고 싶다
--- 「나의 국숫집」 중에서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논밭은 더 이상 수확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이제부터는 긴 잠을 잘 수 있다.

새소리가 들린다. 고양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양철 대문을 두드린다. 옅은 꿈들이 지나간다.

양은 밥상 위에서 색동 조각보가 빛난다. 무거운 솜이불을 윗목으로 밀어놓고 밥을 먹는다. 괘종시계가 두 시를 알리면 골목을 빠져나온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 아는 사람들이 있는 약속 다방, 언덕 위 성당, 하염없이 걸을 수 있는 철길이 있다.

바람이 분다.
나는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무도 내가 견디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때가 되면 다리에 켜진 전등을 보며 골목으로 돌아온다.
--- 「가을」 중에서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두 손을 모으고 창밖을 본다

장바구니를 들고 종종걸음을 걷는 여자
잰걸음으로 자전거에 올라타는 남자

깨금발로 걸어가는 계집아이
빨간 붕어가 든 비닐 가방을 들고 가는 노인

사람들 사이로 흩날리는 벚꽃을 본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이
차를 마시면서 눈물을 닦는다

온몸에 가득한 주름과
팔에 시퍼런 멍을 가진 노인이
링거병의 눈금을 본다

링거액이 반쯤으로 줄어들 때마다
아픈 몸을 비틀면서
흰 벽에 달린 둥근 시계를 본다

오후 7시
또 하루가 갔다고 중얼거린다
--- 「노인이 온다」 중에서


영화는 우리들의 문화였고
영화관에서는 모두가 배우였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도 언젠가는 퇴역 배우가 된다는 것을
--- 「문화극장」 중에서


유리창에 납작 붙은 검은 나방이
나이 들어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옥수숫대 흔들리는 소리
사이사이 흔들리는 말들

살려고 죽는
죽으려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

여섯 시간을 떠든 여자가
도저히 녹을 것 같지 않은
영양제 캡슐을 한 움큼 털어 넣는다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 「끝나지 않을 이야기」 중에서


나무 계단 꼭대기에서 그녀들을 보고 있었어 분홍 실크 스카프를 목에 두른 그녀들은 출입구에서 연신 입가에 웃음을 모으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거렸지 사람들이 기타를 들고 무지개 모자를 쓰고 들어왔어 그녀들이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으로 들어왔지 한낮의 태양처럼 타오르는 그녀들과 수증기처럼 맴도는 사람들의 관계는 몇 개의 단위로 나뉘었어 눈빛은 계절로 표시되었지 그녀들은 봄이 오기 전 늦겨울이라고 썼어 축하 케이크를 자른 그녀들은 행복이 무르익어야 해서 기타를 쳤지 그녀들의 목에서 나풀거리던 실크 스카프가 어색해질 때쯤 그 가득했던 골목이 허무하게 느껴졌어 에어컨은 돌고 있는데 더운 바람이 불어왔지

--- 「내겐 너무 많은 그녀들」 중에서

출판사 리뷰

세상에! 가장 큰 비극은 뭘까, ‘비극’이라는 그 ‘말’ 자체다. 인생의 신비를 묻는 간절한 외침에 “모두 죽었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보낸다”라고 했던 고대 인도 현자의 일갈(一喝)도 결국 ‘말’이었다. ‘운명’, ‘행위’, ‘성격’은 이제 삶을 극적으로 만드는 우세 인자(因子)로 작동하지 않는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이후, 우연(임의성)과 차이(변별성)만 가득한 인식의 세계가 열렸다. 심지어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세계에 속한 모든 것은 그것이 지금 그러한 것으로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지금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존재한다 한들, 그것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라고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언어 행위에서 기표가 대상을 지시하면 의미가 발생한다는 경로는 늘 허위거나 결코 닿지 못하는 착오일 뿐이다. 발화는 흩어질 뿐, 생각처럼 의미의 그물망을 펼치지 못한다. 말하거나, 말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현대적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삶이란 내 존재 근거이면서 나를 의미 없게 하는 저 세계, 결국 ‘대타자(The Other)’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의 문제로 축약된다. 나는 ‘자기(The Self)’라는 자아의 이상형으로 세계와 응전한다. 시인의 말이 아픈 이유는 양태가 아니라 그 원리, 기원이 고통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유경 시인은 사유함으로써 ‘차이’를 지향하고, 언어가 배치된 뉘앙스를 통해 뜻밖의 깊은 울림이 공명이 되는 한순간을 겨냥한다. 시집 내내 ‘골목’을 말하는데 그 대비가 보이지 않는다. ‘골목’이라는 시공간을 ‘지금 여기’의 존재 조건으로, 사건으로 형성하고 의미는 다르게 해석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방법론이다. 비약하자면, 시인은 ‘골목/순간들’, ‘붉은(노을)/어둠(암막)’, ‘나/그녀들(숙희)’ 같은 위태로운 비교를 거듭한다.

화병의 양귀비꽃이
붉은 치맛자락을 펼쳐 보인다

펼쳐 보인다는 것은 몰두한다는 것이어서
테이블 위에 노트북과 커피잔이 하루를 진열하고 있다

나는 백발이 되어 문학상을 받았다
나의 문학도 붉게 펼쳐지고 있다

내 속의 나는 책 속의 니체를 불러들이고
붉은 얼룩이 있는 나의 시를 불러들인다

고통의 삶을 예술이 구원할 수 있다고 니체는 말했고
나의 시는 바닥에 묻은 토마토케첩을 닦으며
인간의 품위를 떠올렸다

원동성당 앞 건널목에서
장미 꽃다발을 들고 서 있던 붉은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붉은 장미를 갖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붉은 꽃 한 다발이 화병에 꽂힌다
- 「붉은 순간들」 전문

필자의 관심은 온통 “화병의 양귀비꽃”이 ‘붉음’의 대표 이미지였다가 ‘장미’가 되지 못하고 그냥 “붉은 꽃 한 다발”이 되는 심리 과정, 아니 시차적으로 깨어나는 인식에 있다. 시인은 “나는 백발이 되어 문학상을 받았다/나의 문학도 붉게 펼쳐지고 있다”고 진술한다. 나아가 시인은 “고통의 삶을 예술이 구원할 수 있다고 니체는 말했고/나의 시는 바닥에 묻은 토마토케첩을 닦으며/인간의 품위를 떠올렸다”라고 한다. 모두 다 ‘붉음’이라는 색의 상징으로 환원한다. 전 세계적으로 국기에서 가장 애용하는 색이 빨강이다. 심장을 비유하다 애국심의 환유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시인이 양귀비와 장미 사이에서 상기하는 니체의 말이나, 바닥에 흘린 토마토케첩은 ‘인간의 품위(세상이 정한)’를 지켜주기 위한 관례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말로 루틴 같은 인식에서 깨어나 시들해지는데, 문득 기억의 한편에서 “붉은 꽃 한 다발”이 나타나 현실을 가득 채운다. 현실이 아닌데 더 생생한 ‘꿈’이 현실감을 부여한다.
- 백인덕(시인)


꿈은
밤이 되면 다시 살아난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들고
반가운 사람들이 찾아온다.

거울을 보면
늙어 가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2025년 11월
안유경

추천평

안유경 시인의 이번 시집은 ‘미병(未病)의 시집’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병은 “숨을 쉴 수가 없”(「미병」)을 정도로 힘들지만, 막상 병원에 가면 병을 특정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시인의 미병은 “기억의 집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다시 세 번째 골목을 찾는”(「부서지는 골목」) 공간 탈주병, “오래된 청동거울 같았다/백 년을 산 이끼식물 같았다”(「나의 가을」)라는 인식에서 보이는 시간 탈주병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병은 생로병사와 같은,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그날 나는 어디에도 없었네”(「양초를 사러 가기로 했네」)라는 자기 부재와, “나는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알고 있다.”(「가을」)라는 자기 견딤을 토로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이 붉은 노을을 보며 “매 순간이 마지막이었던//삶의 하루들”(「노을은 붉은 화장을 하고」)을 떠올리고, 동백을 보며 “뒤돌아보지 않고//툭,/홀로 떨어지네”(「동백」)라고 노래하는 것은 실로 큰 울림을 줍니다. 시인에게 미병(未病)은 비병(非病)이기도 합니다. - 이홍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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