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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전당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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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36인치 캐리어 13/문화생활 14/가능성에 대하여 16/맨해튼 레스토랑 18/부재 20/한여름 밤의 꿈 22/메멘토 모리 24/얼굴 없는 희망 26/호텔 나나 28/봄, 다시 30/인간관계론 32/중심 34/현재진행형 36/무의식의 바다 38

제2부

먼 곳 41/원주역 1 42/그 무렵 44/흐르는 시계 46/욕망의 시차 48/태백역 50/골목길 52/42번 국도 54/원주역 2 56/ㅁ자 여관 58/춘천 별곡 60/술자리에 대한 예의 62/안부 64/입춘 66

제3부

가을 숲 69/오래된 집 70/그날 이후 72/어느 날 아침 74/집으로 가는 길 76/호루스의 눈 78/사하라 버스 80/근대 갤러리 82/폭풍주의보 84/서곡리 통신 86/겨울 한낮 88/시월의 꽃밭 90/그때 92

제4부

간신히 95/누워야 해서 96/어떤 일 98/나선형의 시간 100/생활의 배경 102/우연의 꼬리 103/기억의 포자 104/노천카페, 12시 106/10월 108/뭉크 109/사각의 숲 110/여기서부터는 112/노을이 오는 카페 114

해설
우대식(시인) 115

저자 소개 1

강원 원주에서 태어나 2023년 《강원작가》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강원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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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1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88g | 153*224*10mm
ISBN13
9791158966737

책 속으로

밝음을 사기 위해
볕이 좋은 지중해로 가기로 한 것인데

가방의 크기만큼 밝아진다고 해서
초대형 가방을 사고
가방에 넣을 목록들을 작성하다가

고인 물과 고여서 썩은 사람을 넣어 가져왔다고
초등학교 때 선생님한테 손바닥 맞는 꿈을 꾸고는

나중에 가방에 고인 것들이 우르르 몰려나올 때
눈물이 나올까 봐 걱정도 되는 것인데

낯선 땅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내가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이제 우리입니다
---「36인치 캐리어」중에서

장마가 시작되자
전신주가 넘어지고
봉천내 다리까지 흙탕물이 차올랐다

원주천변 위를 맴돌던 새 떼가 날아올랐다
깨진 유리가 밀짚모자 위로 리어카 위로 핸드백 위로
여자아이의 손목 위로 새처럼 날았다

유리들이 바닥에 보석처럼 반짝이던 날
거리는 문화적으로 북적였다

극장 간판은 시속 100킬로미터로 흔들리는데
극장 안 사람들은 정면을 향해 안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뒤통수만 봐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골목에 살았고
골목의 시작과 끝은 똑같아서
골목 사람들은 서로 알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골목 끝에서 극장까지 가는 세상이
영화 속 세상보다 작았지만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여자아이는
날마다 극장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 무렵 여자아이는 고추장 항아리만큼 자랐다
---「문화생활」중에서

소리는 언제나 현관문 여는 소리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눈물과 주름이 늘어난다고 했다

한 발 한 발
나무 계단에 닿는 슬리퍼 소리가 점점 무거워진다

그녀의 불행이 모두의 잘못인 것처럼
아까부터 LED 전등이 그녀의 소리를 듣고 있다

슬리퍼 소리
물 내려가는 소리
약병 뚜껑 따는 소리
옷장 문 여닫는 소리

그녀는 침대로 가기 전에
전등을 꺼달라고 말해볼까 하지만
그녀의 소리들은 야위어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그녀가 방문을 닫고
딸각, 문고리를 거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어둠이 살금살금 기어가 불을 끈다
---「얼굴 없는 희망」중에서

버드나무 이파리처럼 반짝거리거나
때로는 도시의 네온사인처럼 일렁거렸지

언젠가부터 뿌연 물속에 있는 것들을 보기 시작했어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엉켜 있었고
혈흔이 묻은 손가락 밴드가 엔젤피시처럼 보였지

누군가의 손톱에서 떨어진 분홍색 네일아트가 벚꽃처럼 휘날리기도 했어

어제저녁에 먹은 연어가 떠올랐지
열도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빛은 사방으로 퍼져 길을 알 수 없게 되었어

내게 열두 개의 지느러미가 생기기 시작했지
---「무의식의 바다」중에서

미술관에서 철사를 구부려 만든 뭉크를 만났다

하얀 벽에서 여자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부자리까지 울음소리가 따라왔다

피 같은 노을 따라 철길을 가는 여자아이가 울었다

얼굴에 손을 대고 큰 소리로 울었다

유년의 모빌이 흔들렸다

---「뭉크」중에서

출판사 리뷰

해설 엿보기

안유경 시집 『호텔 나나』는 첫 시집답게 다양한 층위의 내용들이 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초현실적인 자아 분열과 내적 서사, 지나간 것들에 대한 추억과 일상의 이면적 의미에 대한 탐구 등 상당 기간 시를 쓴 문학적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쩌면 첫 시집이 가진 매력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무엇과 싸울 것인가,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탐색이야말로 왜 글을 쓰는가에 준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언제나 빈방이 많아
건물이 아주 낡았기 때문이지

해 질 무렵
호텔을 나와 흐릿한 간판 아래 서 있으면
민트색과 핑크색 물방울이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한낮에 꾸는 꿈을 꾸는 것 같아

방금 호텔 앞에 빨강 포르셰가 서고
노랑 레깅스에 흰색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고양이 걸음으로 호텔로 들어갔어
한쪽 어깨가 몹시 기울어진 남자가 그 뒤를 따라갔지

어제는 몸이 풍선처럼 부푼 여자가
귀밑 애교머리를 넘기면서
장딴지가 굵은 남자에 떠밀려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없어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쇠창살에 뚫린 조그만 구멍으로 아주 낡은 말소리와
열쇠가 매달린, 202호라고 쓴 나무 판때기가 불쑥 나오지

주인 여자는 호텔처럼 백골이 다 된 듯해
언젠가, 언제나 푸른 꽃인 곰팡이가
이곳을 완전히 덮어 버릴지 몰라

어떤 이들은 사랑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오겠지만
어떤 이들은 이별하기 위해서도 오겠지

창문 밖으로 자동차 바퀴에 다리 잘린 고양이가
집채 같은 몸을 끌고 가는 게 보였어
― 「호텔 나나」 전문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호텔 나나」는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포착된 시적 화자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빈방이 많”고 “건물이 아주 낡”은 ‘호텔 나나’의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민트색과 핑크색 물방울이 공중에서 날아다니는,/한낮에 꾸는 꿈을 꾸는 것 같”다는 호텔에 대한 묘사는 ‘호텔 나나’가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상상 속 꿈의 공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호텔에 드나드는 인간 군상은 과장된 옷차림과 몸놀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진다. “노란 레깅스에 흰색 하이힐을 신은 여자”, “한쪽 어깨가 몹시 기울어진 남자”, “몸이 풍선처럼 부푼 여자”, “장딴지가 굵은 남자” 등의 인물들은 풍속화의 도구적 인물처럼 그려진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없”다는 진술은 매우 의미심장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인물에 대한 과장과 인물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상통한다. 이 시에 나타난 사랑이란 심드렁한 일상일 뿐이며 심지어 부조리하다는 수식조차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호텔 나나’의 운명이 “언젠가, 언제나 푸른 꽃인 곰팡이가/이곳을 완전히 덮어 버릴지” 모른다는 진술은 심각한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시적 화자가 인식한 사랑이란 심드렁한 일상이며 “줄 수도 없고/받을 수도 없는”(「봄, 다시」) 관념인 것이다. “자동차 바퀴에 다리 잘린 고양이가/집채 같은 몸을 끌고 가는”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기표 주변을 어슬렁대는 실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호텔 나나’는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탐구는 자아의 분열된 양상을 보여준다.

― 우대식(시인)

시인의 말

잊는다는 것이
결핍이 된다는 것을
소렌토에 가서 알았다.

나의 바다
나의 하늘이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한 시절
뜨거운 나뭇잎이
발등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2023년 11월
안유경

추천평

등에 나선형 집을 지고 있는 달팽이는 두 개의 더듬이 끝에 달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방 한 칸이 전부인 집을 지고 다니며 세상을 살아간다. 안유경의 첫 시집에는 달팽이의 집이나 방과 비슷한 곳에서 더듬이를 치켜든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저물 무렵 철길 옆에서 제자리뛰기를 하며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녀와 안방 윗목의 불어터진 국수 한 그릇, 녹슨 철 대문 안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엄마, 달팽이처럼 잠을 자는 소녀, 볶은 콩을 깨물며 쥐들이 돌아다니는 골목길의 어둠을 밝히려다가 고추장 항아리만큼 자라기도 하는 소녀, 그 골목길을 빠져나온 소녀는 어느덧 인간의 품위라는 말을 떠올리는 스무 살이 되었고 살아남은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 슬픔을 등에 짊어진 채 달팽이의 여행은 계속된다. 쪽잠이나 잘 수 있는 동굴 같은 방에 엎드려 누군가의 소리를 듣기 위해 방바닥에 귀를 기울인다. 배낭에 돌을 채우고 냉동실에서 복어 알을 꺼낸다. 있는 힘껏 더듬이를 치켜올린 채 세상의 출구 없는 달팽이 여관에 투숙한 사람들을 바라본다. 2호실 여자의 눈물은 모두 말랐을까, 4호실 남자는 기타를 두드리며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그러다 일순 화면이 바뀌고 202호실 창문 밖으로 다리 잘린 고양이가 집채 같은 몸을 끌고 가는 모습이 보이는 호텔이 떠오른다. 나는 이 호텔을 세상의 고단함을 건너온 이들이 머무는 달팽이 호텔이라 부르고 싶다. - 김도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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