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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지붕 없는 미술관 13/절망과 입을 맞추는 14/여자의 전설 15/스물두 번째의 겨울 1 16/스물두 번째의 겨울 2 18/그대 섦은 생애 20/유년의 햇살 21/꽃의 정한(情恨) 22/스물두 살의 전설 24/꽃들의 바다 26/여자의 바다 27/비밀의 화원 28/나의 초상 30/허드슨의 밤 32 제2부 나비가 된 화가 35/해바라기 36/화가의 봄날 38/봄의 화원 39/이상기후 40/맨발의 여자 42/오필리아 43/그 여자의 행상 44/환생하는 봄 46/꽃의 외로움 47/화가의 귀 48/그 여자의 선인장 50/아열대 51/천경자의 남자 1 52/천경자의 남자 2 54 제3부 화가가 사랑한 여자 1 57/화가가 사랑한 여자 2 58/화가가 사랑한 여자 3 60/풍경을 위작하다 62/자화상과의 해후 63/그 여자의 습윤(濕潤) 64/나비의 혼 66/전설의 화폭 68/꽃들의 전설 69/화가의 뒷모습 70/허드슨 강가에서 72/석산(石蒜) 무렵 74/화가의 혼(魂) 75/천경자의 사막 1 76/천경자의 사막 2 78 제4부 백 년 전 그날처럼 81/마흔아홉 번째의 겨울 82/백야 84/아프리카의 슬픔 86/불가사리의 꿈 87/시간 이탈 88/화가의 비애 90/붉은 가시나무 92/나부(裸婦)의 화가 93/사모아 사모아 94/여자의 우물 96/떠돌이 꽃 98/벽 앞의 여자 99/허드슨 강가에서 2 100/화가의 미술관 102 해설 김보람(시인) 103 |
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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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를 만나러 미술관 간다. 현관에 들어서면 부화를 기다리는 애벌레들이 허공을 떠다닌다. 나는 애벌레들의 꿈을 채집하여 귀에 꽂는다.
숲길을 거니는 화가의 실루엣이 기억의 색채를 불러온다. 숲의 정기를 빨아올리는 나비들의 날갯짓이 천장을 흔든다. 나무들은 노래하고 부겐빌레아는 왈츠를 춘다. 꽃향기 가득 일렁인다. 늑골을 파고드는 푸른 찰나가 내 고막의 빗장을 열어젖힌다. 여자의 정령이 화폭 주위를 맴돈다. 물결치는 사유가 메아리 되어 돌아온다. 갤러리에 눈부신 파도가 들이친다 --- 「화가의 미술관」 중에서 이사도라 던컨의 비가가 날아오르면 하늘 끝에서 미인도가 춤을 춘다 화가의 날개가 허공에 걸린다 메아리에 끌려와 나부끼는 저 거침없는 흔들림 지평선에 탁본 된 꽃의 붉은 울음 달무리를 복사한다 절망과 입을 맞추는 화가 벽 앞에 서면 유령이 손을 내민다 --- 「절망과 입을 맞추는」 중에서 어떤 외침도 몸부림을 꺾을 수 없었다 뜨거운 자갈길을 걸으면 늘어진 시계추가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편서풍이 불어올 때마다 뼛속까지 뻗어 나간 뿌리들 바람 앞에 순결성을 날려 보냈다 지상에서 움켜쥔 잔뿌리의 아우성이 땅속으로 파고드는 동안 수천의 빙어 떼가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올랐다 낯선 이마가 어지럽게 일렁이고 꽃으로 대접받지 못한 자화상 하나 떠내려왔다 가지 못한 길을 내려놓는 물살마저 경계를 풀고 늙어갔다 한 방향으로 허리 꺾인 숙명 같은 꽃들의 침묵이 뜨겁게 타오르면 아흔의 슬픔은 여인상 어깨에서 나부꼈다 이생에서 부서진 그리움은 흔들림에도 아름다웠다 --- 「나의 초상-천경자」 중에서 꽃이 되지 못한 여자는 어둠을 잉태한다 잠에서 깨어난 애벌레 한 마리 고치 속에서 듣던 천둥소리를 기억한다 적막을 뒤집어쓴 채 비상(飛翔)의 몸짓을 기억한다 하와이완 무궁화 속에서 나비가 부화하고 허물을 벗어 던진 생애는 통점으로 꽂힌다 여자는 애벌레의 환생을 기다린다 천상의 화원에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나비가 된 화가」 중에서 시간은 광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화실에 걸려 있는 여자의 일상은 타임캡슐을 삼킨 21세기 화원이었다 지천명에 꽃피운 바오바브나무의 생애 고흥 앞바다를 건너온 눈부신 혁명은 갤러리 지붕에서 출렁이고 화려했던 꽃들의 이야기는 철학으로 나부꼈다 시공이 흔들리고 꿈틀거리는 이상기후들이 무성한 소문들로 돋아났다 세상이 흔들어 놓은 여자의 삶은 뜨겁게 부풀어 올라 구멍 뚫린 거북 등껍질 속으로 길을 내었다 그렇게 벽을 빠져나간 시간들이 지나고 미술관이 온통 백색소음으로 물들어갈 때 시계는 푸른 뜰을 잃어버린 벙어리가 되었다 --- 「시간 이탈」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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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미의 시 속에서 ‘여자’는 한 사람을 넘어서 있다. 시인은 현실의 여성을 데생하듯 옮겨 적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의 상처와 욕망, 기력 없는 오후와 서늘한 마음, 소리 내지 못한 내면의 울림을 고스란히 신화적 징후로 끌어올린다. 시 안에서 여성은 더 이상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다. 서로의 고통을 뼈째로 나누고, 서로의 상흔을 거울처럼 비추며, 서로의 이름이 희미해질 만큼 겹치는 집단적 존재가 된다. 이때 천경자는 현실의 화가라기보다, 정경미의 상상력이 닿아도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무대처럼 작동한다.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천경자는 ‘되기(becoming)’의 경로다. 시인은 천경자의 얼굴을 통과하되, 그 얼굴에 갇히지 않는다. 공간을 채우는 것은 정경미가 오래 품어온 여성성의 원형들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존재(being)’나 ‘소유(having)’의 질서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되어가는’ 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확장해 간다. 전설의 자국을 품은 여성, 비극의 여운을 지닌 여성, 꽃으로 환생하는 여성, 슬픔을 등에 지고도 끝내 나비를 불러내는 여성까지. 그 모든 형상은 하나의 흐름으로 맞물린다. 이렇게 탄생한 ‘여자’는 현실을 벗어나면서도 현실을 감싸 안는 서사의 문턱을 밟고 서 있다.
뙤약볕 아래 두꺼비 한 마리 헛꽃을 입에 물고 화폭과 마주하며 살아온 아흔 평생이 말을 걸어온다 보랏빛 환상은 비를 부르고 우렛소리 지나간 하늘엔 태양의 텅 빈 동공 화가의 뜰에 쏟아지는 황금비 여자의 지친 손은 혼 빠진 꽃들을 쓸어 담는다 붓끝에서 흘러내리는 용암이 미라로 잠든 꽃들을 깨운다 화원으로 찾아드는 나비 떼 ― ?여자의 전설? 전문 그 대표적 예가 「여자의 전설」이다. 시는 첫 행부터 “뙤약볕 아래 두꺼비 한 마리/헛꽃을 입에 물고”라는 기묘한 장면을 내던지며 독자를 단번에 생경한 세계로 끌어들인다. 현실의 논리로는 함께 놓일 수 없는 “두꺼비”와 “헛꽃”이 한 프레임 안에서 맞물리는 순간, 시는 이미 신화의 문턱을 넘어선다. 이어지는 “보랏빛 환상은 비를 부르고/우렛소리 지나간 하늘엔/태양의 텅 빈 동공”에서 “동공”은 빛의 중심이 빠져나간 자리, 말로 붙잡기 어려운 공백(out of joint)의 감각을 드러낸다. 이때의 “태양”은 더 이상 생명의 상징이 아니라, 한때 격렬히 타올랐으나 지금은 중심이 비워진 감정의 잔흔으로 남는다. 그러나 여성은 빈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연의 기운을 흔들고, 계절의 숨결을 흐트러뜨리며 환상과 현실 사이를 가로지르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다. 마지막 연의 “붓끝에서 흘러내리는 용암이/미라로 잠든 꽃들을 깨운다”라는 구절은 변환의 순간을 포착한다. “용암”은 상처의 뜨거운 기운이자 창조로 향하는 움직임이고, “미라로 잠든 꽃”은 오래 봉인된 그늘과 욕망이 깨어나는 자리다. 숨죽인 불씨가 열(熱)이 되고, 고통이 불꽃의 이미지로 번질 때 정경미의 ‘여자’는 마침내 다시 일어난다. ― 김보람(시인) 도마뱀 꼬리에 반달을 그려 넣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천경자의 볼모가 되었다. 슬픈 꽃들의 전설이 나비를 불러 장자(莊子)의 꽃밭을 기웃거리는 사이 나는 천경자의 목덜미에 그려진 꽃잎을 보며 미인을 꿈꿨다. 2025년 12월 정경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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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나비가 된 화가』를 읽을수록 또렷해지는 것은 천경자의 삶이 아니다. 그 생을 통과하며 점차 자신의 형체를 드러내는 정경미라는 존재다. 시인은 천경자를 모방하거나 뒤따르지 않는다. 그녀의 세계를 한 겹의 막처럼 건너가면서 그 아래에 눌려 있던 자신의 언어와 감각을 서슴없이 끌어올린다. 천경자의 그림은 정경미에게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다. 오히려 조용히 틈처럼 열려 있던 차연(differance) 즉 의미가 머무르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빈자리에서 오래 숨죽이던 말들이 다시 빛을 얻는 공간에 가깝다. “붓끝에 끌려온 굽은 길들이 일어서는 날이다.”(「맨발의 여자」) 천경자를 거울처럼 통과한 자리에서 정경미는 이윽고 자기 초상을 다시 불러낸다. 외로워 보이던 종이 한 장이 스스로 창을 틔우는 꿈을 꾼다. - 김보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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