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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길 잃은 이들을 위한 노래 11 조용한 식물 12 비는 어디로 가나 14 흐릿한 경계 16 하이힐의 재발견 18 연기(緣起) 20 수면 아래 23 시마 24 뫼비우스 띠 26 머그잔 28 포커스 30 하루가 이렇게 가기도 한다 32 빈자리 34 어디쯤 부서진다 36 가벼운 마음 38 제2부 풀잎이 우리가 될 때 42 지나갑니다 44 안경 46 시간을 키운다고 했는데 48 시선 50 퍼즐 52 새, 아이 54 빠른 길 56 아바타 58 소리 60 망초꽃 63 요즘 64 4월 66 기시감 68 저녁을 넣다 70 제3부 붕새와 소녀 74 도서관 75 만우절 78 팔레트 스테레오 80 궁금해서요 82 그림자 84 다행히 너는 아직은 86 오늘의 맛 88 그 동네 90 아귀 92 간격 94 손을 뻗다 96 끝물 햇살 98 작은 죽음 100 제4부 동부이촌동 102 짧은 스파크 104 방지턱 106 라스트 콘서트 108 자리 110 은사시나무 112 천사의 말 114 아는 사이 116 자식 118 문주란 120 못자리 122 VR 124 HTTP 상태코드 404 126 비 오는 날의 연습 128 이희경의 시세계 | 황치복 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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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작은 텃밭에
깻잎 몇 줄 심어두었습니다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잘 자라면 다행이고 말없이 사라져도 괜찮은 정도의 마음으로 햇빛은 골고루 내리고 비는 가끔씩, 너무 늦지 않게 왔습니다 며칠 뒤, 한 뼘을 훌쩍 넘는 키를 자랑하며 줄기와 잎이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름을 불러준 적도 없는데 도시는 여전히 바쁘고 나는 요즘 조용한 식물 하나를 알아갑니다 무언가를 잘 돌본다는 건 내가 나를 덜 다그치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누군가를 부르지 않고도 누군가에게 묻지 않고도 햇살을 감지하는 일 물기를 기억하는 일 그저 잘 있는 것, 그걸 알게 되는 오후입니다 --- 「조용한 식물」 중에서 창이 열리면 세상이 또렷해진다 흐릿했던 얼굴들, 알아챌 수 없던 표정들,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가 숨을 쉬기 시작한다 나뭇결, 돌멩이의 주름, 사람들의 눈썹 끝에 맺힌 미세한 떨림까지 감지한다 길고양이는 길거리를 떠도는 이야기를 전하고 흩날리는 낙엽은 허공을 맴돌다 한순간 작은 새 떼가 되어 날아오르고 비 오는 날 유리에 맺힌 빗방울들은 떨어지면서도 작은 우주를 머금는다 누군가는 붉은 하트를 날리고 누군가는 하얀 구름 위를 걷는다 홀로 선 소년의 머리 위엔 초록 싹이 자라고 어느 노인의 창가엔 바닷가의 여름이 출렁이고 속삭이는 연인들은 마주 볼 때마다 금빛 나비들이 서로의 입술을 오간다 꺼질 듯 깜박이는 네온사인 같은 생각들 서로 얽혀 길을 잃은 바람들 불현듯 터져 나오는 독백 같은 눈물은 안경 너머로도 선명히 비친다 내게 상처를 보여줄 때마다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아픔 앞에서 여전히 흐릿하다 너는 안경을 고쳐 쓰지만 나는, 안갯속에서 너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불안이 스며든 렌즈를 닦아낼 때 불안도 함께 씻겨 내려간다 그럴 때마다, 너의 마음은 조금씩 밝아진다 --- 「안경」 중에서 잘못 기억할 때가 있다 손목이 어깨를, 어깨가 입술을 닿지 않는 손을 내밀면 네온이 꺼진 골목에 짧은 스파크가 튀었다 켜졌다 꺼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누전으로 연결된 줄들이 떨어진 물방울을 따라 젖은 머리칼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종종 너를 닮은 속도를 타 보는데 유리창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물방울 같았다 플랫폼에 남아 있는 나 전철은 문이 닫히고 젖은 도로를 빠져나가고 잠이 깬 듯 말을 고르다가 스스로를 놓쳤다 한 번도 버릇처럼 들리지 않았던 말들 우리가 건네던 사소한 인사들 너무 늦게 알았다 그날, 가볍게 젖은 어깨로 돌아서던 우리는 서로를 피해 걷는 연습을 했지 버려진 우산 옆으로 비가 모였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던 날이었다 --- 「짧은 스파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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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에 남은 온기, 조용히 사라진 것들이 남긴 기척에 귀를 열어봅니다. 때로는 소리보다 더 큰 울림을 만들어 내기에, ‘없는 것들’이 ‘있는 것들’을 대신해 말을 걸어오는 순간에 닿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시가 지나는 자리라 믿기에 따라 걸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2025년 이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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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 시인은 부재를 통해서 자연의 섭리라든가 이치에 대해서 사유를 전개하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부재의 순간이 영원성과 통하는 비밀을 보여준다. 사소하고 자잘한 사건을 통해 깊은 자아의 세계를 탐구하거나 부재의 공간과 순간을 통해서 풍요로움과 영원성을 찾아내는 이희경 시인의 시세계는 결국 아이러니의 시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라비린토스와 같은 미로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 황치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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