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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제1부 살청과 유념 사이 10 詩 어게인 12 시온에서 길을 잃다 14 튤립이 오는 동안 16 광복동, 1980 18 둥근 잠 19 질경이의 길 20 다대포 일몰 22 바닐라 슈를 굽는 잠시 동안 24 Full Moon Service 26 슬픔을 굽는 시간 28 꽃길 이후 30 시 빚 32 칸나에게 전화를 걸다 34 제2부 사파, 경계 너머 36 별의 기원 38 통도사 자장매 피면 40 팬덤의 정석 42 단지 몇 번 찔렀을 뿐 44 맹독의 봄 46 호모 마스쿠스 48 극지를 꿈꾸는 시간 50 노인의 사원 52 수어 하모니 54 비자림 정령 56 특별한 수업 58 AI 전성시대 60 제3부 슬도의 저녁 62 북정동 B-04 64 떠돌이별의 기억 66 태화 오일장 68 암각화, 고래 70 대왕암 71 정자항 풍경 1 72 정자항 풍경 2 74 달과 고래의 노래 75 낙원반점 76 간절곶 편지 78 본성 80 울음을 떠올리다 82 파래소 바래소 84 부겐빌레아 85 제4부 무가 뽑힌 자리 88 그 여름의 끝 90 아카시아 피는 오월 92 작천정 벚꽃 93 알레그로 94 망초꽃 피면 96 천년 잠 97 가을을 인출하다 98 목향장미가 있는 풍경 100 까암빡 102 기림사 법당 104 욕심 솎아 내기 105 지심도에서 106 ▨ 엄하경의 시세계 | 김효숙 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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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에서 길을 잃다
겨울이 와도 철새는 보이지 않네 돌아오지 않는 철새처럼 그때의 나는 어디에도 없네 발목 잘린 기억들이 하굿둑 아래 흐르지 못한 물길 위, 부유물로 떠 있네 낙동강 칠백 리 흥건히 적시던 핏빛 노을은 미세먼지에 가려 흐린 물감처럼 번져가네 칼바람 흔들던 갈대밭 위로 화들짝 날아오르던 고니 청둥오리 저어새 흑두루미 이제는 찾아올 곳을 잃었네 듬성듬성 남은 갈대 길 버려진 과자봉지에 비둘기들이 코 박고 부스러기를 쪼고 있네 아득하여라 자취도 없이 사라진 시온 섬 샛강 나무다리 건너며 손가락 걸었던 더운 피 청춘들의 뜨거운 약속,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늘어선 고층아파트 옥상 위에 갈 길 잃은 손톱달로 걸려 있네 단지 몇 번 찔렀을 뿐 밤이다 당신들의 밤은 낮보다 길어 독술을 연마하기에 딱이다 혀끝 벼려 필살기 준비하는 당신 오늘의 표적 찾아 모니터를 노려본다 매의 눈과 신박한 독설만으로 상대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기에 이 전쟁은 아주 경제적이다 묘수가 떠오르지 않을 땐 다른 동맹의 현란한 독설에 ‘좋아요’만 신나게 달면 된다 컵라면 식은 국물 들이켜며 치명적인 독을 골라 신속하게 날릴 준비 끝냈을 때 드디어 표적 하나 접수한다 여기저기 마구 찔러 보다 마지막 일격! 목표물이 스러졌다 단지 몇 번 찔렀을 뿐* 이라 중얼거리며 당신은 증거인멸 중인데 여린 꽃잎, 상처 많은 꽃들이 막힌 출구 앞에서 소리 없이 지고 있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 Full Moon Service 문득, 밤하늘에 떠 있는 환한 달을 보고 아! 탄식할 수 있도록 누군가 날마다 새로 만든 달 하늘에 띄우고 있다면 박하 향 싸한 가을 하늘에 뭉게뭉게 떠 있는 포근한 구름이 몽실몽실 양털을 깎아 하늘로 날려 보낸 거라면 조각배 위에서 모닥불을 피워 아버지와 단둘이 아무런 불화도 갈등도 없이 갓 잡은 송어 도란도란 구워 먹을 수 있다면 잠든 나 가만히 내려다볼 수 있다면 내 꿈속에서 주인공이 되어 언제나 해피 엔딩으로 아침을 맞을 수 있다면 수많은 나 차례로 끄집어내서 그때 왜 그랬냐고 따져 물어볼 수 있다면 헬륨 풍선 쥐고 허공에 한 발 내디뎌도 추락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면 아, 그보다 전시장 나서면서도 그 싱싱한 상상 놓아 버리지 않을 수 있다면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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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
잃어버린 말들을 꺼내봅니다. 마음에 오래 담아 두었던 기억들에 온기를 담아 다시 길 위에 서 봅니다. 때로 흔들리겠지만 걸음 멈추지 않겠습니다. 2026년 엄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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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하경의 시에는 기교나 수사보다 순결성과 정직함이, 아이 같은 감수성으로 작고 연약한 대상을 만나는 투명한 마음이 살아 있다. 비하하고 조롱하는 말의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면서 만난 엄하경의 언어에는 깊은 슬픔과 토로할 수 없는 상처가 조용히 숨어 있다. 삶이라는 내적 대지를 딛고서 저 환상 같은 이미지에 자아를 접속한 엄하경의 시적 수행은 언제나 현존에 기반한 것이다. - 김효숙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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