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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SO 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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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그림자론(論) 1 ― 시 쓰는 일은 그림자와 마주하는 것
시집의 맨 마지막에 배치된 산문 ?그림자론?을 먼저 살펴보는 것은, “이 시집을 관류하고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가 ‘그림자’라는 사실”인 까닭이며, 이 세상에 빛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동시에 사물들로 이 세상이 채워져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그림자이다. 그림자 없는 사물들은 실감을 확보하질 못한다. (...) 직진하고자 하는 빛의 결곡한 욕망을 사물들은 완강히 가로막는다. 그때 그 자리에 그림자가 생긴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빛이 사물에게 진 자리에 그림자가 맺힌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자는 빛과 사물의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묵언의 말을 건네고 있다. (...) 시 역시 그림자와 같지 않을까. 빛의 방향과 사물의 모서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세계에 현현해 있는 모든 현란한 것들의 표정을 지우고, 그 자세만을 담으려 한다는 점에서. 시 쓰는 일은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이다. 빛은 어깨 뒤에 있고 그림자는 내 앞에 있을 때에 시 쓰는 일이 가능해진다. ― '그림자論' 위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자론’ 그 자체가 김소연의 시론(詩論)이자 시작법(詩作法)인 까닭이다. 그림자는 “빛과 사물의 관계”를 침묵으로 말해 준다. 그렇게 시와 닮은 그림자를 앞에 두기 위하여, 빛을 등 뒤에 두고서, 김소연은 그림자를 말하기 시작한다. II 그림자론(論) 2 ―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그림자는, 어떤 자세에서부터 시작된다. 김진수의 표현대로, 그림자는 자세를 통해서만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비가시성”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 '빛의 모퉁이에서' 그 자세는 빛을 등진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빛을 등진 곳에서 그림자가 지기 때문이다. 이를 김소연은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빛이 사물에게 진 자리”로 표현한다. 그는 “아득한 빛”을 등지고 앉아 “뒤에 두고 온 것들”을 노래한다. 뒤에 두고 온 것들이 너무 많았네 해 지는 쪽을 등지고 앉은 사람처럼 그 뒤의 아득한 빛들이 당신을 비추고 있었네 ― '그날이 그날 같았네' 그림자와 같은 시를 쓰기를 거부하는 시인, 즉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자 하는 자는, “지독하게” 환한 빛으로 인하여 밤-어둠으로 이끌려가게 되는 역설을 겪는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 ?빛의 모퉁이에서? III 사랑의 흔적 ― 불귀(不歸),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그림자와 같은 시를 쓰기를 거부하는 시인, 즉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자 하는 자는, “지독하게” 환한 빛으로 인하여 밤-어둠으로 이끌려가게 되는 역설을 겪는다. 사랑의 가역 작용―그래도 미숙한 질료인 마음에는 흔적이 남네 생각하고 생각하여 상처 내지 흉터라 부르지 않고 흔적이라 불러보네 ― ?흔적? 한 사람이 달을 베고 누워 있다 심장을 훤하게 켜놓은 채 반듯하게 누워 있다 (...) // 누군가 늑골에 손을 넣어 두꺼비집을 내린다 ― '불귀 6' IV 적막과 햇빛 사이 ― 지금은 시를 쓸 시간 햇빛이 난간에 매달린 적막을 떼어낼 때 세상이 살아 있다는 건 모두 거짓말, 떨어지며 절규하는 적막 덕분에 고막이 터진다 지금은 시를 쓸 시간 ― '적막과 햇빛 사이' 시인은 ‘순간’과 연애하는 자들이다.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지각할 뿐 아니라 그 흐름의 어느 한 때를 떼어내서 그 시간과 노닥거리며 수작하는 자들이다. 이 시인은 지금 어떤 순간과 연애하고 있는가. 가끔 방 안에 ‘푸르스름한 적막’만이 자욱할 때가 있다. 햇빛이 잠깐 자취를 감추어서 예기치 못한 적막과 고요를 선사하는 그 때다. “고요해서 다 들리는 시간”이고 “적막해서 다 보이는 시간”이다. 시인은 아예 이 시간과 차 한 잔 하고 있다. “침묵으로만 말해질 수 있는 이 순간들이, 침묵함으로써 돌아앉아 시를 써온 나와 함께, 찻숟가락을 입에 물고 마주보며 웃는다.” 아마 이럴 때 김시습도 시를 썼겠지, 홍랑 매창 옥봉 같은 이들도 그랬겠지. 그래서 화자는 말한다. “지금은 시를 쓸 시간”. 글쎄, 왜 아니겠는가. ('2005년 제4분기 문예지 게재 우수문학작품 선정평' 중에서) 그림자가 진 적요함 속에 시가 흐른다. 지금은 시를 쓸 시간, 아니 시를 읽을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