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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시 — 소멸
최석균 / 집을 삼킨 집 이주언 / 공중전화 박은형 / 구곡 아지매 김명희 / 문득, 임성구 / 소멸 연서戀書 김승강 / 흑과 백 너머 정남식 / 가숙의 날들 서연우 / 업무 안내 본문시 최석균 「뼈아픈 날」 외 8편 / 이주언 「오동꽃 질 무렵」 외 6편 / 박은형 「오동꽃」 외 6편 / 김명희 「식욕」 외 6편 임성구 「칡꽃」 외 8편 / 김승강 「그 저녁의 맛」 외 8편 / 정남식 「꽃」 외 8편 / 서연우 「산책길을 가로질러」 외 6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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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천변만화는 생의 파란만장과 대응된다. 그래
서일까, 바둑처럼 집이 많으면 이기는 줄로 알고 집짓 기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또 반집을 지나 만방으로 지나, 지는 건 매한가지라는 생각에 건곤일척 승부수 한번 던져보고 중도에 종국 을 선언하는 사람도 있다. 나를 복기한다. 집짓기에 급급한 행보 끝에 부실한 집 한 채를 얻었고 헐한 시로 서너 권 시집을 묶었다. 하 지만 아직 흑백을 가릴 줄 모른다. 한해의 삶이 한판 바둑이면 하루의 삶도 마찬가지, 과 연 평생의 집은 어디에 있고 승패는 무엇인가 ---「최석균, 집, 집착」중에서 너는 붉은 물감을 내밀었다 그것을 풀어보았지 나도 네게 붉은 마음을 내밀었다 그것을 풀어보았겠지 우 리의 화폭은 동일했으나 우리가 내민 색감은 자주 달 라지기도 했다 잘 익은 사과는 사과나무에 달린 채 썩 기도 했고 냉장고에서 썩기도 했다 썩기 시작할 때는 향그런 냄새가 나기도 한다 시큼해 지다가 서서히 문 드러진 마음이 되기까지 빠르게 혹은 느리게, 그래서 우리는 색의 변화에 더욱 민감했다 거무스레하거나 물컹해진 기분을 붉은 방 안에서 함께 나누었다 사랑 한다는 말은 하나로 표현할 수가 없어, 내 마음은 조금 씩 다른 깃발들을 흔들어 대니까 조금은 아픈 붉은 방이 있을 뿐이야 ---「이주언, 노을」중에서 어딜 가셨나 석공은 석탑 몸돌에 천 년 자물쇠 새겨 두고 세상에 쓰일 질문과 대답들 돌 모종이 되려는데 비 그쳤구나 지빠귀, 면경 같은 울음 빻아 사랑이나 도모할 뿐 명랑 서너 발 꿰찬 물소리 꼭대기 나무에 번갈아 지정석을 차리는 흰 구름 덧나버렸으면 싶은 초여름 세목들 사이 저물녘의 공기는 마음 깎기 좋은 칼날처럼 불고 열쇠도 없이 절 마당에 훤칠한 고적 한 짐 부리는 천 년 잠 긴 꿈 ---「박은형, 성주사」중에서 가슴에 끼고 다니던 문고판 한 질 폐지 더미 위에서 순 번을 기다린다 내 손으로 염하듯 묶으며 한 그루 나무 로 돌아가라 홀로인 죽음에는 꽃도 피지 않고 검은 새 도 울지 않는다 무연고 시신처럼 유골을 분쇄하는 기 계음만이 죽음을 묵도할 것이다 서가에 암암리에 퍼 진 곰팡이나 쥐 오줌 냄새 습한 여름 성정에 빌붙어 점 조직으로 기습한다 미물의 빠른 발 퇴로를 막는 건 흐 름을 막는 거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죽음 같은 거 죽 음이 내게 말 걸었던 첫 기억은 나무 상자였다 옻칠 냄 새가 역해서 뒷걸음치면 당신 이름자에 더 큰 못이 박 혔다 또 한 구 목록을 살핀다 얼마나 손을 많이 탔는지 순 누더기다 어디서 언제 태어났을까 찢어진 마지막 장 나는 책에 머리를 박을 듯 자주 졸곤 했지 ---「김명희, 순殉」중에서 세워 둔 삼지창이 달을 푹! 찔렀다 비명을 내지를 뻔, 비밀이 새 나갈 뻔, 일생을 밝게 비춘 웃음 뒤 저 고독한 울음 하나 ---「임성구, 삼지창에 꽂힌 달」중에서 너는 비가 온다고 해놓고 안 온다고 투덜댔다 애인 이 온다고 해놓고 안 오는 것처럼 너는 강아지와 공원 에나 가야겠다고 했다 비가 오면 할 일이 있었는데 비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는 비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떤 때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게 귀찮아서 비가 왔으면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비가 온다 비가 온다는 예보도 없이 비가 온다 애인이 온다 애인 이 온다는 말도 없이 애인이 온다 갑자기 오는 소나기 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너는 생각한다 창밖을 바라보 며 애인만큼이나 변덕이 심한 너는 날씨처럼 변덕이 심한 너는 ---「김승강, 날씨의 소녀」중에서 분홍 트렁크가 하늘을 날아왔다 터키항공 카파도키아행 입국대에 서서 무게를 다는데 15kg 상한선을 넘어 트렁크의 문을 열고, 옷을 벗기고, 덜어내었다 저울의 시간이 땀을 흘리며 지나갔다 천 가방을 꺼내 그의 어깨에 걸었다 분홍 트렁크는 비닐커버에 싸여 벨트를 타고 사라졌다 룸에서 메이트와 트렁크를 함께 여니 옷이 펄쩍 부풀어 튀어나왔다 기내에서 압사한 트렁크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의복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트렁크 그물에 걸려 잤다 그날 런웨이에 얼결에 서서 양 가죽옷을 입고 턴하기 전 포즈를 취했다 난, 난, 런, 런, 스톱, 팟, 새 재킷이 트렁크에 들어갔다 꿀집에서 산 꿀물이 흘렀는지 숙소에서 번개가 치고 전기 나갔다 트렁크는 어둠에 잠겨서 문을 닫았다 출국할 때 그의 트렁크에 넘치는 머플러를 넣었다 인천에서 트렁크를 그가 가져갔다 트렁크에 나를 넣고 떠나갔다 고속버스에서 트렁크는, 트렁크인 나를 싣고 트렁크는 나를 낳고 다시 떠나고 있다 집에 오니, 잠이 든 그대로 분홍 트렁크는 비닐 커버가 굳게 닫혀 있다 나는 내 분홍 비닐을 벗고 잠들었다 트렁크 안에서 나는 잠들었다 ---「정남식, 트렁크에 대한 기억」중에서 발을 디디면 큰뒷부리도요의 발자국이 발을 앞질러 놓는다 나는 아직 닿지 않았는데 발끝이 나를 지나간다 바닥은 마르기 전에 사라진다 부리가 찍히기 전 이미 지나가 있고 찍힌 뒤에는 비어 있다 바람이 돌아오면 지나간 자리가 아니라 지나가지 않은 자리가 먼저 지워진다 이미 놓여 있는 자국 위에 다시 발을 얹는다 겹치지 않는다 새들이 서로의 방향을 놓친 채 날아오르는 동안 내 안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박자가 먼저 울린다 손을 쥐면 잡히는 것이 아니라 늦게 놓친 것이 남는다 ---「서연우, 누가 그 몸속에」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