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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창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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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집을 다시 펴내며•5


1부 구제역

돌로 만든 책 / 12
가죽 풍구 / 22


2부 해방이 아니라 결박이다

해방이 아니라 결박이다
밀수출 / 30
두 형제 / 34
하곡 수집령 / 38
도정 금지령 / 42
공출량 조사 / 44


3부 결박을 풀다

영천아라리 / 48


4부 백년 살결박을 받다

인종 청소기 / 80
배내기소 / 97
임 형사 / 100
옥장이 아버지 / 102
탈출 / 104
새벽 북소리 / 106
면죄부 장사 / 112
입산 / 114
평토장 / 117
기막힌 유품 / 118
99동지회 / 119
어떤 내력 / 120
사회주의자 나무 / 122


5부 10월 묘비명

진혼가 / 126


발문
영천 시월항쟁의 격렬한 증언과 진혼의 노래(이하석) / 132


후기 / 141

저자 소개 1

195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92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식민지 농민』 『숨어서 피는 꽃』 『밥상 위의 안부』 『다시 격문을 쓴다』 『오래된 책』 『시월』 『영천아리랑』이 있다. 일제강점기 작가 백신애 작품과 생애를 추적한 『방랑자 백신애 추적보고서』와 『원본 백신애 전집』을 엮었으며, 영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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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52쪽 | 128*205*20mm
ISBN13
9788966552061

책 속으로

4

풀만 먹는 형편에 보리 공출 강행한 장군의 정부나
일본제국에 충성했던 군수와 경찰놈들이나
한민당 비호 아래 재산만 불린 지주들 세상이나
갈아엎지 않으면 농사꾼 앞날은 보이지 않았다

보릿겨 범벅으로 연명하다 강쇠바람 불어오는
그해 중양절 새벽
파천황의 시간이었다
소작인들과 머슴에 대학 나온 지주 아들들까지
군수 처단! 공출 거부! 선포하고 일어섰다

그러나 반역의 시간이었다
테러리스트! 반란자!
낙인찍힌 사람들 알과녁으로 세워지자 도망가
보현산에서 울던 새들이 팔공산에서 우는 새 만나듯
그렇게 어울려 패거리 지어 야산대가 되었다

두 칸 오막살이 추녀 끝에
스무 살 아내 피울음 시퍼렇게 걸어둔 채
빨치산으로 쫓기는 농사꾼들 사냥한
피의 문장 단풍을 나는 읽는다
헌털뱅이 폐허에 휘날리는 눈보라로
첩첩 밀봉된 칠십여 년,

엄나무 가시 밟고 새들이 깃을 접는
이 나라 산들은 제 이름 버리고 오로지 빨치산이다
쥐 파먹은 삶의 이유 던져버린 초록 전사들
외롭고 낮고 쓸쓸한 붉은 삐라 10월
순도 구십구 점 구, 날것의 문장이었던
구들장으로 만든 책
_「돌로 만든 책」 부분


호박잎 말린 걸 담뱃가루에다 섞은
독한 연기 연거푸 빨아들이며
그 아우 등 뒤에서 형도 속으로 울었다
해 바뀌자 쏟아지는 눈보라 속으로 느닷없이
농사꾼은 두당 네 말 닷 되씩만 남기고
최고 가격 삼백칠십오 원으로 정해 놓은 나락
백오십 원에 공출하라는 것이었다
내놓지 않으면 백이십 원에 빼앗아 간 뒤
군정 재판 받으라는 날도둑놈들 협박 속에 사느니
여기 와서 다리 뻗고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는
아우님 처지가 차라리 나는 부럽구나
큰골 증조모 산소 아래 자욱한 다복솔 어디쯤
어렵사리 묻어둔 그깟 나락 두 가마,
풋바심 보리 날 때까지 일곱 식구 목숨 줄이라
자네 형수 모르게 꺼내 줄 용기 차마 없으니
내 등짝에서만 콩이 튀는구나
우야겠노, 그래도 우야겠노
저 알량한 쌀이라도 가져 가 밥해 먹는 동안이라도
송곳 같은 무슨 수라도 설마 안 생기겠는가

-「두 형제」 부분


읍내 얼금뱅이 지주 수렁논 몇 뙈기에
풀 거름만 겨우 넣는 농사,
골목에서 개똥이나 줍는 신세였다
네 식구 목구멍은 늘 막막하기만 했는데
어느 날 얼금뱅이 지주가 쥐여 주는 고삐 잡고
배내기소 한 마리 몰고 왔다

엇부루기 똥오줌이 더 많은 양식이 되고
한 해만 지나면 새끼 낳아
어미소는 돌려주고 송아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 송아지 힘껏 키워 쟁기 끌면
며칠씩이나 일해 주고야 겨우 빌려 쓰던
일소 얻는 구차스러움도 사라지는 것이다
읍내 지주는 소 코뚜레기만
바지게로 두 짐도 넘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열두 살 큰놈은 바지게로 져다 날랐고
열 살 아이도 꼴망태 메고 나가면서
소는 자라서 첫 새끼가 들었다

그해 가을 응원경찰이
도망가는 농민조합 김성렬을 뒤쫓다가
소 뱃구레에 총알을 몇 방 박아버리고 말았다
나락 베다 총소리 듣고 달려가 보니
앞거랑에 뒷발 담근 채 어미 소는 자빠져 있었다
환장한 박춘식이 낫 들고 달려갔지만
뒤따라온 아내 몸까지 더럽혀지고 말았다

환장할 사람은 환장을 하더라도
먹을 건 제때 먹어주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건성으로 떠먹던 저녁 숟갈 슬그머니 내려놓고서
박춘식 마누라 울음소리 사이로 발꿈치 들고
관솔불도 없이 동네 사람들은 개울가로 나갔다
죽은 자리에 파묻었던 소 꺼내
풍덩풍덩 성걸어 마을에다 나눌 때
송치는 구장이 빼돌렸다
남은 건 터럭 태운 냄새와 생똥 몇 바가지뿐이었다

잘 먹었다, 오냐 아주 잘 먹었다
집집마다 민망한 웃음 소고기로 틀어막은 뒤
온 동네가 여한 없이 물똥만 좍좍 쏟았다

_「배내기소」 전문


그 무슨 꿍심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머슴 노릇 때려치우고 한 며칠
팔자걸음 작대기 패 곁꾼 노릇이나 하더니
옥장이 열다섯 단풍 들 무렵,
총알 두 방 이마에 맞고 중뜸 논바닥에 엎어졌다
마을에서 헌 가마니때기에 둘둘 말아
맨땅에 눕혀놓고 대충 묻어 버렸다
반나절만 상주 노릇 하다가 탈상한 옥장이
아비 머슴 살던 집에서 두어 달 엉덩이 걸치고 있더니
싸락눈 치던 밤에 소 한 마리 몰고 토껴 버렸다
서방 잡아먹은 년이란 누명 쓰고 쫓겨 온
열일곱 과부 하나도 그 밤에 살길을 도모했다

초겨울 소낙비 억수같이 쏟아지고
갠 날,
옥장이 아버지 무덤에서 두 발 쑥 내밀었다
소도둑놈 아들 잡으러 가려고
아비가 용심 쓴다며 동네가 술렁거렸다
옥장이 아버지
아들 옥장이 잡으러 가지 못하게
머슴들 여럿이 가 구덩이 깊이 파고 묻어주었다

_「옥장이 아버지」 전문


집 떠난 귀신도 돌아온다는 섣달그믐 날 집 떠났다
떨궈 줄 눈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맞아 죽은 홀어머니는 집 뒤 으슥한 남의 밭에다
평토장해 버렸다

조국이라 부를 수 없는 조선도
어머니 부장품 삼아 평토장해 버렸다

부산에서 밀항선이나 탈 계획이었다
몸서리쳤던 구주 탄광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게 옥생각이다 그게 옥생각이다
떠나는 덕평이 뒤통수에다 밤 까마귀가 짖었다

동네 궂은일 도맡아 챙기던 덕평이 등 뒤로
팽팽하던 뒷산 능선이 풀썩 무너져 내렸다
_「평토장」 전문

출판사 리뷰

출판사로부터 『시월』 재발간 제안을 받고 나는 7년 전 이 시집의 상당 부분을 고쳐 썼다는 걸 떠올렸다. 고쳐 쓴 이유는 무엇보다 곳곳의 성에 차지 않는 문장과 몇몇 불편한 장면들을 걷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들춰보니 두 이야기는 제목을 고쳤고, 한 이야기는 들어냈으며, 새로 한 이야기가 보태져 있었다. 지난해 쓴 ‘서북 것들’ 이야기도 보태려다 집(集) 면적이 커질까 봐 그만뒀다.

무자비한 폭염 속에서 복숭아 터럭을 뒤집어쓴 채 보낸 여름이었다. 그새 벼 이삭이 경건해졌고 귀뚜리들 글 읽는 소리가 서늘하다. 곧 “단풍잎으로 검은 리본을 준비”하는 10월이 올 것이다.

10월항쟁 80주년을 앞두고
이중기

추천평

이 시집은 우리 근대사의 큰 상처인 대구 시월항쟁과 관련이 되어 있다. 지금까지 ‘시월폭동’으로 알려진 시월항쟁은 제주4·3과 거창양민학살이 있기 전에 일어난 일로, 1946년 10월 1일 대구항쟁이 도화선이 되었다. 시월항쟁은 대구를 진원지로 곳곳으로 번져갔는데, 그중 가장 격렬하면서 피해가 컸던 지역이 영천이었다. 이중기는 시월항쟁의 전말을 보여주면서 특히 영천 지역의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고봉밥 한 그릇이 간절했을 뿐”인 남루한 양민들이 “무슨 원대한 포부가 있어/ 피를 뿌”린 게 아니라, 역사의 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엮여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그 원통함을 지극한 연민으로 붙안아 다독인다. 장강처럼 굽이치는 격정의 언어들은 시월의 영천을 비탄과 울분으로 떠올리면서, 영천에서 농민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그 어쩔 수 없는 원죄의식과 업을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꿀림 없이 당당한 어조로 우리 민족사의 한 비극적인 상황을 가열차게 드러낸 기념비적인 시집이 아닐 수 없다. -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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