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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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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계곡 9
2부 가을의 향기 95
3부 사냥 나팔 139
4부 고요 211
5부 수호 천사들의 낮잠 259
6부 그저 꿈일 뿐 333

작품 해설 363
작가 연보 387

저자 소개 2

저몬세라트 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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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serrat Roig

소설가이자 민주화 이행기의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여성 지식인. 여성의 삶과 역사적 기억, 카탈루냐의 문화적 정체성, 노동 계급의 경험을 하나의 정치적·윤리적 사유의 장으로 엮어 낸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194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자유주의적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아드리아 구알 연극 학교에서 공부하며 배우로 활동했다. 1968년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철학·문학 학위를 받았고, 1970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빨랫감은 많고 비누는 적은데, 옷은 또 얼마나 깨끗이 빨아 놓으라는지』로 빅토르 카탈라 상을 받고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
소설가이자 민주화 이행기의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여성 지식인. 여성의 삶과 역사적 기억, 카탈루냐의 문화적 정체성, 노동 계급의 경험을 하나의 정치적·윤리적 사유의 장으로 엮어 낸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194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자유주의적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아드리아 구알 연극 학교에서 공부하며 배우로 활동했다. 1968년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철학·문학 학위를 받았고, 1970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빨랫감은 많고 비누는 적은데, 옷은 또 얼마나 깨끗이 빨아 놓으라는지』로 빅토르 카탈라 상을 받고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72년 카탈루냐 역사의 주요 사건을 배경으로 여성 3대의 삶을 그린 『라모나, 잘 있어』를 발표했다. 1976년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체리의 계절』(1977)로 산트 조르디 소설상을 받았고, 앞선 두 작품과 이어지는 바르셀로나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자 여성주의적 입장이 정점에 이른 『보랏빛 시간』(1980)을 발표했다. 이외에 장편 소설 『일상의 오페라』(1982), 『감미로운 목소리』(1987), 단편집 『젊음의 노래』(1989)를 출간했다. 카탈루냐어 작가 협회의 회원으로 카탈루냐어를 지키는 데 평생 헌신했다. 또한 여성주의 지식인으로서 『여성 시대?』(1980), 『페미니즘』(1981), 『새로운 인본주의를 향한 여성들』(1981) 등을 집필했다. 언론인으로서 그의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으로, 로치는 수준 높은 여성주의 저널리즘의 전통을 세우고, 조국의 역사적 기억을 복원하려 애쓰고, 탁월한 인터뷰어로 활동했다. 생존자들을 인터뷰하고 옛 강제수용소를 직접 방문해 집필한 논픽션 『나치 수용소의 카탈루냐인들』(1977)은 그의 중요 저서 중 하나로, 인본주의와 증언 문학의 관점에서 홀로코스트에 접근하며, 스페인 공식 역사에서 잊힌 희생자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한 시도였다. 1991년 바르셀로나에서 4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인류학과와 스페인 바르셀로나 자치대학교 유럽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시립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존 제이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가르치며, 지중해 이주를 연구하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 「카탈루냐 독립운동에서의 의례적 경험 및 일상적 정치 참여」가 있다. 옮긴 책으로 『나는 고백한다』 『겨울 여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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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30일
판형
반양장 ?
쪽수, 무게, 크기
392쪽 | 132*225*30mm
ISBN13
9788937465031

책 속으로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나탈리아는 브루크가(街)와 그란 비아 대로가 만나는 모퉁이에 위치한 파트리시아 고모네 집에 가 지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실비아 클라레트와 결혼 생활 십팔 년 차인 오빠 유이스는 아구스타 대로와 가까운, 도시의 상류층이 거주하는 칼베트 거리의 복층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네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실비아와는 음식 취향이라도 맞았던지라 그녀 때문은 아니었고, 유이스 때문이었다. 집을 떠난 십이 년 동안 많은 걸 잊은 나탈리아였지만, 병원에 데려간다고 차 안으로 자신을 쥐 몰이하듯 몰아넣으며 경멸의 웃음을 짓던 오빠의 모습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패혈증으로 쇼크를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아랫배가 아파 몸을 비트는 나탈리아에게 유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몸을 굴리는 건 네 자유야,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엔 생각을 해야지, 뇌를 쓰란 말이야.
--- p.11

아무도, 나탈리아를 사랑했던 세르히오도, 감정의 세계를 발견하게 해 준 지미도, 세상 보는 눈을 갖추어 준 에밀리오도 다정한 필립 삼촌만큼 값진 무언가를 준 적이 없었다. 그녀의 나라에 대해서도, 과거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몰랐지만 말이다. 이제 나탈리아는 인생의 피사체와 배경을 직접 고를 수 있는,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서른여섯의 나이로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매춘을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 p.22~23

오랜만에 여기 오신 모양인데…… 십이 년이요? 세상에! 아마 많이 변했을 겁니다, 여기 말이죠. 별별 일 다 겪었지요, 짐작하시겠지만……. 내 나이가 얼마로 보입니까? 쉰이라고요? 그런데 마흔둘이에요. 난 그저 내 자식 세대는 내가 겪은 일을 겪지 않길 바랄 뿐이죠. 마을에 들어와 감자까지 긁어 가더군요. 그 자식들이죠, 누구긴 누구겠어요? 소위 말하는 이긴 자들……. 택시 기사의 회색 눈빛이 더 이상 금속처럼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안개 낀 하늘 색을 하고 있었다.
--- p.24

파트리시아 미랄페시는 나탈리아를 위해 천장에 채광창이 나 있는 방을 정리해 놓았다. 행주와 빳빳하게 다려 타임 향을 먹여 놓은 식탁보 들을 보관해 두었던 로코코 양식의 서랍장은 비워 두었다.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푹 쉬다 가거라, 나도 말동무가 있어서 좋구나. 옷이라도 갈아입어, 피곤할 텐데. 파트리시아 고모는 문을 닫았다. 나탈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옷장 위 거울로 그녀의 미소가 이어졌다. 구질구질한 이곳이 싫어서 그렇게 떠나더니, 뭘 그리 급하게 다시 돌아왔니.
--- p.36

나탈리아가 보기에 아르모니아는 여전히 예전처럼 자신만만했다. 나이는 더 들었지만, 언제나 나탈리아를 주눅들게 하던 그 공격적인 톤은 변함이 없었다. 아르모니아는 모든 관계가 정상적이라 어떤 가능성을 꿈꿀 수 있었던 시절을 살아 보았음이 분명했다. 비록 그 기간이 짧았을지언정. 그래서 자기 식대로 바르셀로나를 살았고, 누구와 살지도 선택할 수 있었다. 신이든 부모든 그 누가 뭐라 하든 견뎌 낼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탈리아에게는 불가능한 삶이었다. 그래서 엔카르나식으로 말하자면 “더러운 짓거리”를 하러 파리, 그리고 런던으로 떠난 것이었다. 나는 프랑코주의의 강제적 산물이지. 그녀는 지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럼 우리는 원자 폭탄의 산물이겠네. 지미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 못 한 게 분명했다.
--- p.51~52

결혼 후 처음 몇 년간 그녀는 발레를 완전히 잊고 지냈다. 지금 사는 복층 아파트가 아닌 기나르도 구역의 좀 더 작은 집에 살 때였다. 마리우스가 태어났고, 아기의 눈에 실비아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집에 갖춰진 집기들, 침대 시트, 식기 세트, 조리 기구 들. 전부 새롭고 아름다웠다. 광장에 나가 “우리 남편이”라고 말하는 것, 혹은 관리인이 “안녕하세요, 미랄페시 부인.” 하고 인사하는 게 너무 좋았다. 신혼 초, 유이스는 그녀를 여왕처럼 모셨다. 부족함이 없었다. 드레스, 스타킹, 클러치와 맞춤한 가죽 구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유이스는 실비아가 원하는 모든 걸 들어주었고, 그의 품 안에서 실비아는 보호받는다고 느꼈다. 팔짱을 끼고 영화관에, 좋은 식당에 갔고, 그는 친구들에게 “내 아내야.” 하고 그녀를 소개했다. 그녀는 정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 p.62

유이스는 아주 실용주의적인 남자였고, 앞길에 방해가 되는 기억은 재빨리 지워 버렸다. 인생에선 두세 가지만 분명히 해 두면 그걸로 충분해, 라고 말하곤 했다. 이성이 최고의 방어 무기라 믿었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확고히 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종교는 어리석은 자, 여자, 병약자, 그리고 실패한 자 들이나 믿는 것이었다. “20세기 후반인 지금, 인간은 달을 밟았고 곧 있으면 화성에 갈 거야. 하지만 이 나라는 광신도들 천지야.” 유이스가 “이상주의자”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를 미치게 했고, 좌우를 막론하고 해충처럼 박멸해야 할 대상이었다. “무슨무슨 주의가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어. 정치가 중요하던 시대도.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헛소리는 이제 끝난 거야. 이제는 기술과 과학적 진보의 시대라고.”
--- p.74

언젠가는 이런 세상이 끝날까? 에밀리오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거 알아, 나탈리아가 말을 이어갔다. 네가 가까운 역사에 대해, 그러니까 모든 게 전쟁에서 이긴 자들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설명할 때면, 솔직히 나는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아. 하지만 이런 모습들, 사람들이 희망 없이 사는 비참한 모습을 직접 보면 네 말이 무슨 뜻인지 맘에 와 닿아. 이게 언젠가는 끝날 거라고 생각해? 또 한 번 물었다. 에밀리오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나탈리아의 귓가에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이게 뭐야? 그녀가 물었다. 노래야. 장바티스트 클레망이라는 파리 코뮌의 시인이 만든 노래. 그 시인은 체리의 계절이 오길 간절히 바랐어. (183~184

출판사 리뷰

“결국 체리의 계절이 오는 것이 두려웠던 거야, 체리의 계절이 오길
바란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계절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 거니까.”

역사적 전환이 여성의 삶과 기억,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천착한 몬세라트 로치
짧게 타올랐던 변화의 불꽃 이후, 희망은 어떻게 좌절되고 또 되살아나는가


“카탈루냐 문학의 생명력은 모두 몬세라트 로치 덕분이다.”_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카탈루냐 문학계를 가로지른 찬란한 별.” _콜럼 토이빈

“생동감 넘치는 여성주의 소설. 소설이라는 형식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현기증이 날 만큼 거침없이 흐르는 의식의 흐름이 돋보인다. 몬세라트 로치는 서로 상반되는 움직임을 그려 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며, 가슴을 울리는 소설을 남겼다.” _《르 몽드》

프랑코 독재 말기, 거대한 변화의 문턱에 선 바르셀로나와 그곳의 사람들

20세기 카탈루냐 문학과 지식인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 몬세라트 로치의 대표작 『체리의 계절』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3번으로 출간되었다. 로치의 작품이 한국에 번역 출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체리의 계절』은 스페인 내전 시대부터 프랑코 독재 종식을 일 년 반 앞둔 시점까지 자유로이 오가며, 상상조차 못 한 변화의 문턱에 선 바르셀로나와 그곳에 사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를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그려 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프랑코 독재 정권은 이전 공화국의 모든 흔적을 철저하게 지웠다. 역사와 기억이라는 유산은 지하 지식인 사회와 친밀한 모임, 특히 여성들을 통해서 은밀히 전해졌는데, 몬세라트 로치는 이 같은 정치적 억압에서 살아남은 기억에 천착했다. 『체리의 계절』에서는 생생한 인물들이 등장할 뿐 아니라 민주화 이전 바르셀로나 중산층의 물질적 · 내면적 삶이 세밀하고도 날카롭게 묘사되어 있다.

이야기는 프랑코 정권의 독재 절정기에 학생 시위에 참여했다가 큰 상처를 입고 영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나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12년 만에 돌아온 스페인은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위해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그녀 앞의 현실은 변한 것이 별로 없다. 나탈리아는 경제적 성공으로 더욱 보수화된 오빠와 두려움 많고 신경질적인 그의 부인, 가장 절박한 순간에 그녀를 외면한 아버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숨 막히는 정치적 분위기와 대면해야 한다.

반세기 만에 세계 독자들과 만나는 카탈루냐 현대 문학의 고전

『체리의 계절』은 작가 삶의 자전적 요소가 상당 부분 투영된 작품으로, 로치는 3년간 작품을 구상하고 단 26일 만에 집필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프랑코 독재가 무너진 이듬해인 1976년 산트 조르디 소설상을 수상하면서 카탈루냐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무려 40년 가까이 지속된 독재정으로 반항적인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스페인에서 단숨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당시 스페인은 낙태는 물론 성애 묘사조차 금지되어 어떤 영화들을 보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가야 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이러한 스페인에 젊은 미혼 여성의 낙태 경험이 담긴 『체리의 계절』은 신선한 충격을 안기며 바르셀로나 도심 곳곳의 신문 가판대에서 문고판으로 판매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카탈루냐에서는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지만 외국 독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몬세라트 로치의 작품들은 2020년대 들어 영어로 번역되어 새롭게 주목받으며 국제적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한국어판 번역을 맡은 권가람은 로치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 베차베 가르시아를 직접 만나고, 『체리의 계절』을 주제로 한 현지 토론회에 참석하는 한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바르셀로나에서 살았던 부부를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취재와 조사를 바탕으로 프랑코 독재 말기 바르셀로나의 정치적 · 사회적 분위기와 도시 곳곳에 깃든 역사적 맥락을 번역에 충실히 반영했다. 또한 한국 독자들에게 낯설 수 있는 역사적 사건과 장소, 문화적 배경에 상세한 주석을 덧붙여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과거의 상처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이 교차하는 바르셀로나

소설은 12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고향 바르셀로나로 돌아오는 나탈리아 미랄페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학생 운동에 가담해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그녀는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음을 알고 불법 낙태 시술을 받은 후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가족과 조국을 떠났다. 그녀가 떠났던 때는 프랑코 독재정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지만, 귀향을 며칠 앞두고 영국에서 마주한 고국의 뉴스는 아나키스트 정치범의 사형 소식이다. 이제 마흔을 앞둔 그녀의 눈에 바르셀로나는 예전과 다르다. 도시는 “스스로의 소리를 덮어 버리기 위해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앞두고 변화를 꾀하고 있음에도 답답한 조국의 정치적 현실과 함께 그녀가 대면하여 풀어야 할 숙제는 가족이다. 혼란스러운 청춘 시절, 가족과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삶을 거부하고 떠난 나탈리아는 외국을 떠돌며 자신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과거의 상처와 가족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오빠는 어느덧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더욱 보수적인 인물이 되었고, 한때 발레리나를 꿈꿨던 그의 아내는 불안과 불만 속에서 살아간다. 가장 절박했던 순간에 자신을 외면했던 아버지와의 관계 역시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나탈리아는 자신이 떠나온 도시와 가족을 다시 마주하면서, 그동안 외면해 온 기억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체리의 계절』은 나탈리아 한 사람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소설은 그녀의 귀향을 계기로 미랄페시 가족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가 여러 세대의 삶에 남긴 흔적을 드러낸다. 전쟁과 정치적 억압을 겪은 기성세대, 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보수적인 가치관에 갇힌 중산층, 그리고 이전 세대와는 다른 삶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소설은 한 가족의 역사를 넘어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생생한 초상을 그려 보인다.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바르셀로나 역시 단순한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몬세라트 로치는 카탈루냐 선배 작가들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여 바르셀로나라는 도시를 또 다른 주인공으로 삼는다. 작가가 그려 낸 바르셀로나의 거리와 광장, 카페와 아파트, 오래된 저택에는 도시가 겪어 온 변화와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다.

소설의 제목인 ‘체리의 계절’은 장바티스트 클레망의 노래 「Le Temps des Cerises」(1866)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 노래는 파리 코뮌(1871) 당시 패배를 애도하면서 언젠가 자유와 평등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희망으로 불렸다. 프랑코 독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당시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체리의 계절은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로치는 그 희망을 섣불리 낙관하지 않는다. 오랜 독재가 남긴 상처와 억압은 정치적 변화만으로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별과 계급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여성주의의 눈

특히 로치는 여성 인물들의 삶을 통해 당시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나탈리아가 가족과 조국을 떠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찾으려 했다면, 다른 여성들은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에 적응하거나 저항하며 살아간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만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살아가는 실비아와 그녀의 친구들은 이러한 모순을 잘 보여 준다. 로치는 이들의 허영과 편견, 여성들 사이의 경쟁과 갈등을 신랄하게 그리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여성들만의 친밀감과 유대를 놓치지 않는다. 가부장적 가치관을 내면화하면서도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로치가 그리는 여성 인물들을 더욱 복잡하고 생생하게 만든다. 자신이 속한 중산층이라는 세계는 로치 자신이 그 모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욱 날카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문학적 토대였다. 소설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유이스와 실비아 부부의 집에서 열린 타파웨어 파티는 중산층 여성들의 허영과 경쟁, 친밀감이 한데 뒤섞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몬세라트 로치는 경제적 안락함이 여성의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노동 계급 여성들의 삶에서 자기 결정과 해방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런 작가의 시선은 소설에 등장하는 노동 계급 여성들을 묘사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미랄페시 집안의 가사 노동자인 엔카르나는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고 삶을 개척해 나간다. 소설에 등장하는 성매매 여성들 역시 중산층의 도덕적 잣대로 재단되지 않는다. 로치는 이들을 이상화하거나 자유로운 여성의 전형으로 내세우기보다 저마다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물들로 그리고, 이를 통해 여성의 삶을 제약하는 것이 성별뿐 아니라 계급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나아가 전쟁과 독재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부모 세대의 복잡한 내면에도 눈길을 돌리며, 인간의 나약함과 모순을 이해하려는 연민의 시선을 잃지 않는다.

여성주의와 카탈루냐의 정체성을 위해 헌신한 작가 몬세라트 로치

1970년 어느 날, 출근길에 몬세라트 로치는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당시 그는 갓 태어난 아이를 키우며 생계를 위해 백과사전 편찬 프로젝트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고, 남편과도 별거 중이었다. 프랑코 독재가 여성에게 요구하던 순종적인 아내와 어머니의 삶에 갇히지 않으려면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야 했다. 로치는 바르셀로나 근교의 소도시에 방을 빌려 글쓰기에 몰두했고, 그렇게 완성한 첫 단편집으로 그해 권위 있는 빅토르 카탈라 상을 수상했다. 이후 로치는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독재가 지우려 했던 역사의 기억을 되살리고, 여성의 삶과 목소리를 중심에 놓고자 했다. 또한 프랑코 정권 아래 공적 영역에서 억압받던 카탈루냐어와 카탈루냐 문화를 지키는 일에도 평생 헌신했다. 로치에게 카탈루냐어로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문학적 뿌리를 지키는 동시에 독재가 강요한 침묵에 맞서는 일이었다. 역사의 거대한 사건보다 그 사건이 개인의 내면에 남긴 흔적에 주목했던 그는 기억과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자적이고도 시적인 서사 세계를 구축했다. 마흔다섯 살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로치가 남긴 작품들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세계의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추천평

“카탈루냐 문학의 생명력은 모두 몬세라트 로치 덕분이다.”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카탈루냐 문학계를 가로지른 찬란한 별.” - 콜럼 토이빈
“생동감 넘치는 여성주의 소설. 소설이라는 형식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현기증이 날 만큼 거침없이 흐르는 의식의 흐름이 돋보인다. 몬세라트 로치는 서로 상반되는 움직임을 그려 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며, 가슴을 울리는 소설을 남겼다.” - 르 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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