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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부 꿈을 꾸러 갑니다 계란 한 판 인감도장 주파수 바퀴가 자란다 감기약 수상한 직립 자유의 이름으로 300 이하 맛세이 금지 노란 눈동자 밥통 걱정 브랜드 있는 밥상 숟가락 거울 소리의 조감도 2부 손 닭발 꿘투 열쇠 구두 파문 코팅목장갑 상류보다 깊은 하류 보글보글 카레 향 오독 늙은 자전거에 귀 기울임 반생이 숫돌 단소 소리 잠만 자는 방 어둠을 야금야금 3부 후음 수평의 함정 무조건 천 원 저공비행 택시 드라이버 전설의 도시 괴물 게걸음 배고픔의 뒷면 엄마 공장 바다의 배꼽 홍시 맨발에 대한 예의 꼬리의 근성 4부 우황청심환 사이 십 원짜리 눈이 내리는 날 하모니카를 불다가 母子의 시간 자주 하는 이별 비틀림 호미 한 자루 고요한 맘, 거룩한 몸 계모임 하는 날 풍경 소리 몸집 최후의 승자 하드 포맷 해설 | 삶을 의지하는 삶 그리고 믿음의 시 | 황규관 |
이장근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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꿘투
관장님께 권투는 권투가 아니라 꿘투다 20년 전과 바뀐 것 하나 없는 도장처럼 발음도 80년대 그대로다 가르침에도 변함이 없다 꿘투는 훅도 어퍼컷도 아니라 쨉이란다 관중의 함성을 한데 모으는 KO도 쨉 때문이란다 훅이나 어퍼컷을 맞고 쓰러진 것 같으나 그 전에 이미 무수한 쨉을 맞고 허물어진 상태다 쨉을 무시하고 큰 것 한 방만 노리면 큰 선수가 되지 못한다며 왼손을 쭉쭉 뻗는다 월세 내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20년 넘게 아침마다 도장 문을 여는 것도 그가 생에 던지는 쨉이다 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생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도장 벽을 삥 둘러싼 챔피언 사진들 그의 손을 거쳐 간 큰 선수들의 포즈도 하나같이 쨉 던지기에 좋은 자세다 --- p.40 열쇠 구두 구두는 열쇠다 한 평짜리 구두수선가게의 말이다 창문 한 짝씩 나란히 사이좋게 구두와 열쇠라 적혀 있다 구두만 보면 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성격인지 그 사람의 항로가 블랙박스에 기록되어 있다 세일즈맨 정씨도 닳고 닳은 굽으로 와서 문이 확 열려버렸다 정씨처럼 앞코가 둥글고 굽이 낮은 구두가 좋지 평범하지만 부지런한 성격이거든 이렇게 구린내 나는 신발이 좋아 발바닥에 땀 나도록 산다는 거니까 이런, 앞코에 상처가 났네 쯧쯧쯧 좀 참지 그랬어 그래도 구두를 구겨 신지 않는 걸 보니 자넨 아직 미래가 창창해 창창하게 반짝거리는 구두 빤히 들여다보던 정씨 열쇠를 신고 간다 구두로 문을 열 일만 남았다 --- p.42 오독 약을 악으로 읽고도 몰랐다 책 세 장 넘길 때까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약과 악 사이의 상관관계가 약으로 버틴다를 악으로 버틴다로 읽게 했다 그렇다면 악으로 일해서 약값을 벌고 다시 악으로 사는, 하루 종일 폐휴지를 줍는 할머니는 우리 시대의 오독일까 약이 귀하던 시절 약 대신 악으로 살다가 이젠 오른 약값 때문에 악으로 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약이 귀한 시절 그래서 우리 시대는 가난한 거다 가난하거나 말거나 여전히 살아내는 할머니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의 약값을 악으로 벌고 있다 남편과 약과 할머니와 악의 순환관계 순환의 핵심은 악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를 살리는 것은 약이 아니라 악이다 민간요법의 승리다 --- p.52 母子의 시간 아내의 가슴이 울고 있다 입고 있는 면티 젖꼭지 닿은 부분이 흥건히 젖은 줄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아내 때맞춰 젖먹이 아들이 잠에서 깬다 저 母子 사이를 흐르는 시간에는 때가 살아 있구나 비워야 할 때와 채워야 할 때 가슴이 부르고 배가 부르는 때 세상 그 어떤 시계와도 사이클이 맞지 않는 그들만의 간격으로 흐르는 시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내가 아들 입에 젖을 물린다 쪽 쪽 쪽 태엽 감는 소리가 힘차다 --- p.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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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생의 문을 두드리는 것”
이장근 시인이 세상에 말을 거는 방식, 혹은 세상과 대립하는 방식은 다름 아닌 문을 두드리는 행위이다. 시가 낯익은 것들을 끊임없이 낯설게 함으로써 다른 세계로 나가는 ‘문’을 여는 행위라고 할 때, 이장근 시인은 이러한 시의 본령에 다가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 그 ‘문 밖’의 세계는 구체적인 삶의 확장과 연결되어 있다. 관장님께 권투는/ 권투가 아니라 꿘투다/ 20년 전과 바뀐 것 하나 없는 도장처럼/ 발음도 80년대 그대로다/ 가르침에도 변함이 없다/ 꿘투는 훅도 어퍼컷도 아니라/ 쨉이란다/ 관중의 함성을 한데 모으는 KO도/ 쨉 때문이란다/ 훅이나 어퍼컷을 맞고 쓰러진 것 같으나/ 그 전에 이미 무수한 쨉을 맞고/ 허물어진 상태다/ 쨉을 무시하고/ 큰 것 한 방만 노리면/ 큰 선수가 되지 못한다며/ 왼손을 쭉쭉 뻗는다/ 월세 내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20년 넘게 아침마다 도장 문을 여는 것도/ 그가 생에 던지는 쨉이다/ 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생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도장 벽을 삥 둘러싼 챔피언 사진들/ 그의 손을 거쳐 간 큰 선수들의 포즈도/ 하나같이 쨉 던지기에 좋은 자세다 ─「꿘투」전문 “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던지는 “쨉”. 시인이 던지는 ‘쨉’은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려야 하는 조건 자체들이다. 그것은 사회이기도 하고 가정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욕망이기도 하다. 또 시인의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자신의 과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든 실존 현상들의 교차점에서 그의 시는 발생한다. 나아가 이장근 시인은 그 현상들의 틈서리에 자신의 삶을 기입함으로써 시의 특이성을 활성화하고 있다. 오로지 시인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꿈틀대고 읊조리듯 하나의 점을, 하나의 터치를 기존의 세계에 남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문턱이 된다. 그것은 하모니카를 불 때 “도” 음(音)을 내려면 “같은 구멍에서 거꾸로”(「하모니카를 불다가」) 들이마셔야 하는 이치와 같다. “슬픔을 박차는 꼬리의 근성” 이장근 시인이 삶을 바라보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태도는 ‘세계의 비참’에 대한 저항과 믿음이다. “북적이는 정류장”의 “싸파리 버스”에서 내려 “훌쩍, 꿈을 꾸러” 가거나(「꿈을 꾸러 갑니다」), “밥집 아주머니의 닳은 손”에 “슬쩍” 자기 손을 대어본다거나(「손」), “닭발처럼 뭉개진 손으로” 닭발을 뜯는 인부들에게서 “날개를 품고 사는” 모습을 본다거나(「닭발」),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의 약값을/ 악으로 벌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우리 시대를 살리는 것은 약이 아니라 악이”(「오독」)라 말하는 것들이다. 머리로 헤엄치는 물고기가 얼마나 되겠는가/ 물살을 헤치는 꼬리는 물고기의 추진 장치/ 먹이를 쫓거나 먹이가 되어 쫓길 때/ 알을 낳기 위해 거친 물살을 거스를 때도/ 꼬리가 해낸다/ 난자를 향해 달려가는 정자들/ 꼬리의 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겠는가/ 오십 넘어 대리가 된 아버지도/ 회사의 꼬리였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슬픔 덩어리로/ 집과 회사 사이를 바동거렸다/ 슬픈 몸짓을 보며 나는 자랐다/ 바동거리며 사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꼬리/ 슬픔을 그림자처럼 끌고 다니지만/ 나는 슬픔의 힘을 믿는다/ 파다닥, 죽는 순간까지 힘을 모아/ 슬픔을 박차는 꼬리의 근성을 믿는다 ―「꼬리의 근성」 부분 그러나 시인은 “꼬리의 근성”, “슬픔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그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다른 세계에 가닿는 ‘문’에 “툭툭” 쨉을 날린다. 경쾌하게, 그리고 명랑하게 스탭을 밟는다.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이장근 시인은 “멈추지 않고 쨉을 뻗는 팔처럼 꾸준히 자신의 생을 밀고 가는 한결같은 힘, 그런 저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있다. “그의 시도 평범한 듯하면서 쨉처럼 쭉쭉 뻗는 힘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