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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방촌 황희의 학문과 위상
오늘의 한국사회와 방촌 황희 -최영찬 방촌 황희의 경세사상 -지두환 경세가(經世家) 방촌 황희 -오기수 겸선(兼善)의 유자(儒者) 황희(黃喜) -곽신환 인간 황희(黃喜) -황의동 169 황희(黃喜), 그 역사적 평가와 위상에 대한 일고찰(一考察) -최영성 제2부. 조선통신사 황윤길의 역사적 재조명 경인통신사 황윤길의 역사적 재조명 -정구복 기해사행 통신부사 황선(黃璿)의 관직생활 -임선빈 제3부. 민족의 위기와 호남의 충의지사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장군의 생애와 구국활동 -하태규 315 당촌(塘村) 황위(黃暐)의 생애와 학문 -황의열 충의지사(忠義之士)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석정(石庭) 황석의 생애와 활동 -홍영기 제4부. 옥동서원의 역사적 위상과 학풍 옥동서원(玉洞書院)의 존재의의(存在意義) -권태을 반간(槃澗) 황유(黃紐)의 학문과 사상 -성봉현 화재(華齋) 황익재(黃翼再)의 삶과 학문경향 -황만기 부록1. 방촌황희 연보(年譜) 부록2. 방촌황희 학술연구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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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는 결국 ‘이루었다’고 하는 ‘익성(翼成)’의 시호가 주어졌다. 제대로 신하로서의 역할을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500년 조선정치사에서 우리는 세종을 최고의 성군이라 하고, 그 시대를 태평의 시대라고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때의 최장기 재상이 바로 황희이니, 그 공의 상당 부분을 황희에게 줄 수밖에 없다. ---「곽신환, 겸선(兼善)의 유자(儒者) 황희」중에서 임진왜란 직전(1590년) 통신사의 정사로 파견된 황윤길(黃允吉)은 황희의 현손이고, 호안공 치신(致身)의 증손이다. 통신 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침입 가능성을 보고했으나, 선조와 당시 당국자들은 일본의 침입 가능성을 부정한 부사 김성일의 의견을 정론으로 택해, 민심선동이라는 명목으로 황윤길을 파직시켰고, 김성일은 승격시켰다. 선조 때 이런 정국으로 흐른 과정을 실록 자료는 부실하여, 현재까지 정확히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김성일은 사행 중의 일기를 남겨 이 자료가『선조수정실록』에 크게 반영되었으며, 이후의 사림정권은 이를 숭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정구복, 경인통신사 황윤길의 역사적 재조명」중에서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은 남원 출신으로 황희의 5대 후손이며, 임진왜란 극복에 있어서 이순신이나 권율 못지않은 역할을 하였던 의병장이다. 황진 장군은 임진년(1592) 6월에 용인전투, 이치전투(梨峙戰鬪)에서 왜군을 물리쳐, 호남을 국가의 보장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1593년 6월 충청병사로서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진주성에서 순절하여, 왜군의 예봉을 꺾고 조선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하태규, 무민공황진장군의 생애와 구국활동」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