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 혼술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고 나 혼자 사는 것이 새로운 생활 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대인 관계에 대한 욕구는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먹방은 관계에 대한 욕구가 가장 한국적으로 드러난 문화 현상일 것입니다.
그 방식 역시 물론 꽤나 한국적인데요. 보통 야동이 일방적으로 성행위 장면을 보여 준다면, 먹방은 시청자와의 쌍방향 소통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시청자들이 채팅창이나 댓글을 통해 먹방에 반응하고 BJ나 유튜버가 시청자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식이죠. 먹방 중에 실시간 댓글 창이 같이 떠 있는 경우도 흔한 모습입니다.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피드백하며 함께 뭔가를 만들어 가는 것.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사회적 교류의 방법입니다. 각자의 영역에 선을 긋고 그 안으로 침범하는 것을 꺼리는 일본인들과는 다른 방식이죠.
---「먹방의 나라 한국 vs 야동의 나라 일본」중에서
어느 분야에서나 늘 그래왔듯이 한국은 겉으로 보면 우당탕탕 대소동이지만 거시적 관점에서는 한 발 한 발 달라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떨까요?
일본의 성역할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매우 전통적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스우파(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열기가 뜨거웠는데요. 무대를 휘어잡는 쎈 언니들의 활약에 많은 시청자가 열광했습니다.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댄서들의 역량과 저력, 그리고 댄서(안무가)라는 직업, 춤에 대한 열정과 철학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죠.
일본인은 이런 한국 여성들을 ‘무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우파 댄서뿐 아니라 K-팝 가수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은 이어지는데요. 일본의 여성은 매우 나긋나긋하고 여리여리한 모습을 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본의 여성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J-팝과 애니메이션, 게임 등 일본의 문화콘텐츠에 등장하는 ‘소녀들’입니다.
---「쎈 언니들의 나라 한국 vs 귀여운 소녀들의 나라 일본」중에서
두 나라 사람들이 현실을 보는 방식과 관련되어 각 문화콘텐츠의 차이는 두드러집니다. 일본인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환상의 세계를 보려 하는 반면, 한국인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현실 세계를 보려 한다고 할까요?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이 ‘인간의 문제’에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방법이 현실에 직접 개입하는 식이 아니라는 뜻이죠. 대부분의 일본 애니메이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 간의 사건을 통해 ‘비유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떠올릴 수 있게 합니다. 우주나 미래,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깊이 있고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만이 할 수 있는 접근이죠.
그러나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는 현실을 직접 다룹니다.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국에 비해 한국은 역사 관련 콘텐츠의 제작이 단연 두드러지는데요. 일제강점기, 6.25, 군사정권, 민주화 운동, IMF 등 가슴 아픈 역사도 거침없이 다룬다는 점이 한국의 특징입니다.
---「막장의 한국 드라마 vs 이세계의 일본 애니」중에서
일본인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이 명확히 구분되는 존재라는 전제 아래 관계를 맺습니다.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꺼려 하고 사회적으로 규정 지어진 행동반경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편안해하는 것은 이러한 전제에서 비롯되는 문화입니다.
반면,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의 입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대인 관계를 해 나갑니다. 한국인들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이심전심), 때로는 상대방의 영역에 지나치게 깊게 들어가거나(참견) 상대가 원치 않는 오지랖을 부리는 것 또한 이러한 전제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인 관계에 피로감을 느끼는 한국 젊은이들 중에는 이러한 ‘오지랖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깔끔한 일본식 인간관계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문화는 그렇게 단편적으로만 바라봐서는 곤란합니다.
관심과 오지랖을 통해 한국인들이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정서적 지지가 이루어지고, 깔끔하고 예의 바르게 보이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심리적 압박을 겪는다는 것은, 한국 문화에 익숙한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표정이 큰 한국의 탈 vs 표정 없는 일본의 탈」중에서
갑질의 동기 역시 통제감의 극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결핍된 통제감을 충족하는 한국적인 병리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갑질의 양상은 이지메와는 차이를 보입니다. 이지메가 ‘집단의 규범을 어긴 개인에 대한 집단적 응징’의 성격을 갖는다면, 갑질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려는 개인적 행위’라는 점이 두드러집니다.
을에 대한 괴롭힘은 갑인 자신에게 걸맞은 대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초점이 있지요. 상대방 탓을 한다기보다는 우월한 자신을 드러내고 느끼는 것이 갑질의 심리적 기능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방식에 있어서도 이지메가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갑질은 드러내 놓고 보란 듯이 한다는 차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피해자들의 심리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지메에 순응하는 일본인과는 달리 한국인은 갑질을 대단히 부당하다고 지각합니다. 상대방과의 지위 차이나 상황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복종하지만 갑의 처사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거나 갑질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내면화하지는 않죠.
---「한국의 갑질 vs 일본의 이지메」중에서
이들은 산 생활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산에서는 더 이상 세상일과 세상 사람들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인들이 산으로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들어간다’라는 말을 썼지만 히키코모리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산으로 들어간다기보다는 집을 나간다고 해야 할까요.
히키코모리와 마찬가지로 외톨이 생활이지만 자연인의 삶은 다릅니다. 그들은 산속에서 자연과 계절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신이 먹고살 것들을 마련합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산으로 들어온 이들은 산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삶의 이유를 찾아내는 듯합니다.
---「산으로 들어가는 자연인 vs 방으로 들어가는 히키코모리」중에서
한 때문에 귀신이 되고 한을 풀기 위해 사람에게 나타나는 한국의 귀신과 역시 저세상으로 가지 못할 만큼의 큰 원한을 품었으나 자신이 죽은 곳에 머물면서 자신과 큰 관계 없는 이들에게까지 해를 끼치는 일본의 귀신.
사람들과 친숙하고 함께 어울려 살며 웬만해서는 해를 끼치지 않는 한국의 요괴와 자신들의 영역이 확고하고 이를 침범한 인간들을 확실하게 응징하는 일본의 요괴. 한국인과 일본인 마음의 어떤 차이가 여기에 투영되어 있을까요?
---「한을 품은 한국 귀신 vs 자리를 지키는 일본 귀신」중에서
즉, 한국인들의 자기 인식은 ‘실제의 자기 가치보다 높은’ 자기 가치감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가치감이 높다는 것은 시쳇말로 ‘근자감’, 즉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인식인데 이러한 자기 인식의 방식이 한국인에게 유형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한국인들은 한 번의 승부로 패배를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적어도 세 판에 두 번은 져야 “이번엔 내가 졌다”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두고 보자!”라는 말이 따라붙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러나 일본인들은 다릅니다. 한 번의 승부로 생사가 갈리는 칼의 문화여서 그랬을까요. 한 번의 승부로 승패가 갈리면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패배를 받아들입니다. 승자로서의 상대와 패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죠.
---「삼세판의 씨름 vs 단판의 스모」중에서
따라서 어울림은 ‘탈개성화의 조화’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개의 주체가 각자의 소리를 내지만 전체적으로는 어우러지는 모습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조화스럽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분명 나름의 법칙과 흐름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죠. 자유로운 자기 표현과 전체를 위해 지켜야 할 어느 정도의 선. 그 선을 넘나드는 맛이 어울림의 묘미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인 비빔밥은 이러한 어울림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종 나물과 고기, 계란, 밥, 참기름, 고추장 등 모든 재료가 각자의 개성을 잃지 않지만 그들이 섞여 또 다른 하나로 완성되는 것이죠.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이 스시인 것 역시 인상적입니다. 얇게 저민 생선 살은 밥과 섞이지 않고 정확히 경계 지어 있습니다. 가츠동, 텐동 등 덮밥 종류도 그렇고요. 물론 배 속에 들어가면 똑같겠지만 일본인들이 무엇이든 명확히 나뉜 것을 선호한다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전체와 개인의 역할처럼 말이죠.
---「한국의 어울림 vs 일본의 와」중에서
따라서 고속버스춤은 신명에 도달하기 위한 제의입니다. 이 신명을 내기 위해 사람들은 긍정적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행위에 몰입합니다. 빠른 비트의 음악은 감정을 고조시키고 함께하는 이들과의 공감은 이러한 감정을 더욱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됩니다.
마침내 체면 때문에, 성격 때문에, 사회적 지위 때문에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그 어떤 행동도 허용되는 완벽한 자유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답답하던, 막혔던 기운이 터져 나와 자유롭게 흘러넘치는 순간입니다. 서로의 눈빛을 통해 이를 확인한 다음부터 그곳은 이미 신명의 세계입니다.
이 신명을 맛보기 전까지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잠시의 일탈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신명을 향한 욕구는 더욱 불타오릅니다. 관광을 마치고 돌아가는 야밤의 고속버스가 춤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왜 한국인들은 고속버스춤을 출까」중에서
불편함은 결코 긍정적 정서라 하기 어렵습니다. 불편함과 같은 부정적 정서들은 당연히 행복을 느끼는 데 방해가 됩니다. 한국인들의 행복도가 낮은 이유 중에는 불편함을 쉬이 느끼는 우리의 마음 경험 방식도 한몫했을 겁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합의를 찾아가려는 노력과 불필요한 감정 싸움을 줄이려는 지혜가 뒷받침된다면 프로불편러들의 불편감은 사회를 변혁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사는 우리들은 늘 우리나라가 별로라고 불평했지만 한국은 누구도 몰랐던 사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편한’ 나라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프로불편러들의 나라」중에서
일본인들에게 바깥 세상은 해야만 하는 일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일본 문화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지 못할 때 주어지는 부담감은 상상 이상입니다. 늘 얼굴 맞대는 사람들로부터 하루아침에 손가락질을 받거나 이지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종종 ‘싸움’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잇쇼켄메이一生縣命, 즉 목숨을 건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요. 일본의 애니메이션에는 목숨을 걸고 수많은 종류의 싸움에 나서는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일본인에게 집이란 전쟁과 같은 바깥 생활에서 지치고 힘들었던 나를 따뜻이 맞아 주는 나만의 공간입니다. 바깥과 안을 구분하는 내 경계 안쪽의 세계. “타다이마”란 나를 맞아 주는, 그 세계에 대한 인사말일 것입니다.
---「일본인은 왜 빈집에 돌아와서도 인사를 할까」중에서
그러나 찰나의 순간에 승패가 갈리는 승부의 현장에서 이러한 생각은 집중력을 저해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따라서 필살기는 일본인들에게 경쟁의 불안과 패배로 비롯될 수치를 제거하는 역할을 해 줍니다.
내가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승부에서 혹시라도 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내게 쏟아지는 다른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다시 말해, 필살기란 일본인들에게 ‘내가 내 자리에서 내 역할을 하게 해 주는’ 도구인 것입니다.
이는 반대로, 일본 사회에서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압력이 얼마나 큰가에 대한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 ‘필살기’까지 필요할 정도니 말이죠.
---「일본 애니 주인공은 왜 필살기에 집착할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