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충남 태안군 안면읍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평론가를, 2학년 때는 언론인을 희망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문필가의 꿈을 키웠다. 게다가 중학 시절 역사 공부를 특히 좋아했는데, 이처럼 글쓰기 자질을 갖추고 역사 공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짐으로써 이후 1980년대 민중민족문학 진영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로서 기초 소양을 튼실히 다졌다. 그는 대전고 재학 시절 정부의 대일 굴욕 외교로 빚어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바, 관념으로서 역사가 아닌 실천으로서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처럼 청소년 시절에 튼실히 배양된 역사의식은 그가 1968년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한 이후 ‘독서회 사건’과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을 목도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억압에 대한 문제의식을 강하게 가지도록 했다. 이 무렵 그는 신동엽 시인을 민족의 역사 인식을 깨닫게 해 준 민족시인으로서 각별히 존경한바,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애송했다. 1960년대 후반 채광석의 대학 시절은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반민족적 3선 개헌으로 들끓었고, 그는 학내의 이념 서클 활동과 야학 지도를 통해 이러한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무엇보다 1970년 김지하의 담시 <오적> 필화 사건과 전태일 노동자의 분신을 보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체제 민주주의를 향한 운동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국가의 대학생 병영화를 위한 교련에 대한 반대 시위에 앞장서다가 체포되어 강제로 군대에 징집되었다.
군 제대 후 박정희 정권의 초헌법적 긴급 조치 시대 속에서 ‘김상진 열사 추모 시위’ 계획을 후배 및 동료와 함께 세우고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캠퍼스 안에서 반독재 민주주의를 향한 추모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오둘둘 사건’으로 채광석은 실형을 선고받고 2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출소 후 1978년 신용협동조합에 입사하였고, 대학 시절 ‘반달’ 모임에서 만난 강정숙과 결혼하였다. 신용협동조합 시절 ≪창작과 비평≫의 독자 투고에서 “한 편의 시마다에 민중의 삶을 드러내며 민중의 시대를 당겨오는 거점이 확보되지 못한다면, 시인의 민중 의식이란 일종의 허위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고 하여, 이미 민중민족문학 계열의 문학평론가로서 전문가적 견해를 보였다.
1980년 5·17 쿠데타에 앞서 주도면밀하게 세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긴급체포되었다. 석방 이후 무크지 ≪시와 경제≫ 활동에 동참했다. 1982년 ≪시와 경제≫ 2집 때부터 활동에 가담하면서 문학을 통해 시대의 역사 현실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하여 1983년 2월에는 김정환의 장편 연작시 ≪황색 예수전≫ 1권에 해설을, 3월에는 ≪한국문학의 현 단계 II≫에 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를, 5월에 창간된 무크지 ≪시인≫에 시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 외 네 편을 발표하였다. 이 문학 활동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시와 경제≫ 2집에 노동자 박노해의 <시다의 꿈> 외 다섯 편의 시를 소개한 것이다. 이후 채광석은 진보적 출판사인 풀빛출판사의 풀빛 판화시선을 기획하여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1984)을 출간했다. 이 외에도 혁명 전사 김남주의 시집 ≪진혼가≫(1984)를 청사민중시선으로 출간하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84년 신용협동조합에 사표를 내고, 본격적 문학운동에 출사표를 던졌다. 무엇보다 1984년 민족문화운동협의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을 필두로, 진보적 동료·후배 문인들을 중심으로, 1970년대에 설립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1980년대의 시대정신에 걸맞은 대중적 문인 조직으로 재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창립된 지 10주년이 되는 1984년에 그가 직접 작성한 <84 문학인 선언>이 채택되었고, 그를 총무 간사로 한 자유실천문인협회의회가 재창립되었다. 이후 그는 재창립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활동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 특유의 활력으로 1985년에 시집 ≪밧줄을 타며≫(풀빛), 사회평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청년사)을 출간하는 등 대학교의 시국 및 문학 강연을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문학 활동을 계속했다.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문화예술분과 위원장을 맡으면서 전국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역문학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지역의 문학 현장을 직접 호흡하면서 지역문학운동의 중요성을 지역 문인들과 함께 고민하였고, 각 지역의 구체적 현실에 걸맞은 지역문학운동을 활발히 모색하고 실천하는 데 힘을 보태었다. 그는 가히 ‘민중적 민족문학의 독전관(督戰官)’(황지우)이며, “‘한국민족문학사’의 뚝심 건장한 농부”(김준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격정 속에서 7월 1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여성단체연합회가 주최한 ‘민주 시민 대동제’에 참석하여 ‘민문연’ 노래패 후배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토론을 벌인 후 이튿날 새벽 두 시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실 앞 아현동 대로상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88년 7월 그의 문학평론집 ≪민족문학의 흐름≫(한마당)이 출간되었고, 그의 1주기에 ≪채광석 전집≫(풀빛) 1권(시)과 2권(산문)을, 2주기에 3권(서한집), 4권(문학평론집), 5권(사회·문화평론집) 등 전 5권의 간행을 완료하였다. 2000년 7월 시인 채광석을 기리는 시비(詩碑)가 그의 고향 안면도 송림공원에 건립되었다.
1970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1970년대 민족문학론의 쟁점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비평사와 소설을 연구하고 있다. 1998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 세계>가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 ≪리얼리스트≫ 및 계간 ≪실천문학≫, ≪리토피아≫ 편집위원을 지냈고, 현재 반년간 ≪바리마≫ 편집위원으로서 유럽 중심주의를 창조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문학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뼈꽃이 피다≫, ≪순간, 시마에 들리다≫, ≪논쟁, 비평의 응전≫, ≪칼날 위에 서다≫, ≪비평의 잉걸불≫, ≪1970년대의 유신 체제를 넘는 민족문학론≫, ≪‘쓰다’의 정치학≫ 등이 있다.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