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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的 生活?H 君에게
要求와 悔恨 詩形의 音律과 呼吸?劣拙한 井見을 海夢 兄에게 金素月의 追憶 格調詩形論 小考 詩論 譯詩論 流行歌詞管見 詩集 ≪잃어진 眞珠≫에서 해설 김억은 엮은이 김진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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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飜譯이라는 것은 飜譯이 아님니다. 創作입니다. 나는 創作보다 더한 精力 드는 일이라 합니다. 詩歌는 옴길 수 잇는 것이 아니라 하면 詩歌의 飜譯은 더욱 創作 以上의 힘드는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가 업습니다. 이것은 다른 ?닭이 아니요 不可能性엣 것을 可能性엣 것으로 맨드는 努力이며 ?한 譯者의 솜씨에 가쟝 큰 關係가 잇습니다. 이에는 媒介되는 譯者의 個性이 가쟝 큰 中心 意味를 가지게 되야 詩歌의 飜譯처럼 큰 個性的 意味를 가진 것은 업다고 斷定하랴고 합니다.
---「시집 ≪잃어진 진주≫에서」중에서 素月이는 殉情의 사람은 아니외다. 어디까지든지 理智가 感情보다 勝한 聰明한 사람이외다. 그러고 所謂 心毒한 사람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自然이 事物에 對하여 利害의 주판질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외다. ?은 事情도 없는 바는 아니었거니와 이 詩人이 詩作을 中止하고 달리 生活의 길을 찾던 것도 그 實은 詩로서는 生活을 할 수가 없다는 理智에서외다. ---「김소월의 추억」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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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한국 근대문학의 태동기인 1910년대 김억은 당대의 공리적인 문학관에서 벗어나 정규적인 시의 형식을 반성하고 새로운 시의 형식을 모색했다. 특히 1916년부터 상징주의 이론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상징주의 시 <오뇌의 무도>(1921)와 <잃어진 진주>(1924)를 번역했으며,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를 출간했다. 이처럼 상징주의 이론을 도입해 근대적인 시에 관한 전문적인 이해를 형성하도록 했으며, 번역시를 통해 새로운 시형을 모색했고, 나아가 우리 민족에 맞는 시형과 운율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시화함으로써 1920년대 자유시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0년대 이후 해외 문학의 수용 시기에 번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프랑스·영국·독일 등을 포함하여 8개국 이상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오뇌의 무도≫(1921), ≪기탄자리≫(1923), ≪잃어진 진주≫(1924), ≪원정≫(1924), ≪신월≫(1924) 등 역시집을 출간했다. 자의적이고 내용에 편중하던 번역이 주류를 이루던 상황에서 번역의 내용과 외형이 모두 중요함을 자각하고, 번역 문단을 현대적으로 선도했다. 김억의 번역론에서 가장 획기적이며, 논란이 되어 온 핵심은 ‘창작적 의역’이라는 방법론이다. 전통적으로 번역의 원칙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억은 시가의 말할 수 없는 묘미는 언어미의 어의(語意)·어음(語音)·어향(語響)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의미만을 가져오면 그것이 원시의 뜻은 전했을지 모르지만 시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시의 번역에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시의 의미가 아니라 원작에서 발견한 감동을 토대로, 시상을 잡아 창작하는 것이 바로 번역자가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한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김억은 민요시에 관심을 보이면서 1930년대는 일종의 정형시론인 격조시론(格調詩論)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격조시형이 우리 민족의 정서, 즉 조선 정서를 드러내는 데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통해 민족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근대시가 제작되기를 희망했다. 1930년대 초부터는 ‘조선심’과 ‘격조시형’을 내세우면서 유행가 작사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정형 율격이 가장 잘 적용된 작품이 바로 대중가요 가사였다. 민족이 향유할 수 있는 ‘조선적 형식’을 통해 ‘조선적인 정서’, ‘조선심’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격조시’로 구체화되면서 대중가요 가사 작사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김포몽, 김안서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5년 이전 80곡의 유행가 가사를 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