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6년 0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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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80쪽 | 496g | 150*215*20mm |
ISBN13 | 9788954637169 |
ISBN10 | 8954637167 |
발행일 | 2016년 0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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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80쪽 | 496g | 150*215*20mm |
ISBN13 | 9788954637169 |
ISBN10 | 8954637167 |
1장 왜 내 삶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 선택과 자기모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허위의식의 감옥에서 걸어나와라 행복의 비결 욕심은 내려놓고 원은 세운다 인연과보에도 시차가 있다 2장 감정은 만들어진 습관 좋고 싫음의 감정에서 자유롭기 화, 상대와는 무관한 내 안의 도화선 참지도 성내지도 않는 제3의 길 상대의 말에 되받아치지 못해 억울하다면 과거의 상처를 인생의 자산으로 만드는 법 후회는 지나간 실수에 매달리는 것 불안은 미래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뿌리가 같다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 만들어진 습관은 고칠 수 있다 3장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법 모든 갈등은 관계 맺기에서 시작된다 좋은 사람 vs 나쁜 사람 세상에 다 갖춘 사람은 없다 행복한 결혼의 조건 남 보기 좋은 인생 말고 중도의 길을 알려주는 직장 상사 대부분의 관계는 이기심에서 시작된다 ‘기브 앤 테이크’는 거래지, 관계가 아니다 책임감으로 살면 인생이 공허해진다 의지하는 마음은 원망하는 마음의 씨앗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마라 나무는 서로 어울려 숲을 이룬다 4장 남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지 마라 진정한 성공이란 남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지 마라 욕망은 장작불과 같다 욕구의 3단계: 욕구와 욕망 그리고 탐욕 개인은 씨앗, 사회는 밭 사냥꾼 두 사람이 토끼 세 마리를 잡았다면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나부터 나도 행복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길 5장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해지는 연습 시비분별의 마음을 내려놓고 통찰력, 고통에서 벗어나 사물의 전모를 보는 지혜 갈등을 키울 것인가, 아니면 이익을 얻을 것인가 타인을 위로할 때 얻는 공덕 사랑에도 차원이 있다 행복은 재미와 보람 속에 있다 인생의 시간을 행복하게 나누어 쓰는 법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 |
이 책은 그 동안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많은 제기된 질문과 답변 중에서 호응이 좋은 부분들을 모은 행복 안내서이다. 수행차원에서 개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서부터 사회적 문제도 동시에 다루고 있다.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마음과, 밭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요건을 모두 갖추어야 많은 사람들이 온전하게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마음의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님에게 자신만의 고민을 상담하고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얻으려고 지혜를 구한다. 이 책에도 저마다 개인적인 고민과 상처,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스트레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좌절,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례가 많이 소개된다. 질문 하나하나는 다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본은 행복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해 스님은 욕심을 내려놓고 올바른 원을 세우라고 조언한다. 끝없이 소유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는 한 우리가 다 함께 행복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존적 욕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우린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대방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좋아지려는 상대적 욕구인 욕망을 가지거나 지나친 수준의 탐욕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내가 삶의 주인이 아니라 욕망이 삶의 주인이 된다고 경고한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이란 교훈도 들려준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나름이다. 돈이 많다면, 예쁜 애인이 생긴다면, 반듯한 직장을 갖는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재의 상황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법구경에도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란 구절이 있다고 한다.
시비분별의 마음을 버리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도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꽃들은 먼저 피려고 다투지 않고 아름다움을 경쟁하거나 시비하지 않는다. 우리도 남들과 비교하며 비참해지거나 교만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내가 미리 짜놓은 프레임대로 상대방이나 여건이 움직여지지 않으면 화를 낼 일이 아니라 그 다름을 쿨하게 인정하는 것이 올바른 길임을 깨닫게 된다.
법륜스님은 이렇게 해서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면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도 시선을 돌려보라고 이야기한다. 내 행복을 위해 남을 불행하게 만들어도 안되지만 나 혼자만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 세상에 기꺼이 쓰이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자기의 행복은 배가되고 세상에도 보탬이 된다는 것이다. 인생에 주어진 시간의 20% 정도만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데 할애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따뜻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이야기 할 때 나는 종종 원주민들의 원숭이 잡는 방법을 떠올린다. 원주민들은 원숭이를 잡기 위해 나무에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내고 그 안에 그들이 좋아하는 먹이를 넣어둔다. 먹이를 잡은 원숭이는 그것을 쥔 채로는 손을 뺄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먹이는 놓는 것인데 이를 포기하지 못해 그들은 끝내 사람 손에 잡힌다. 법륜 스님의 ‘행복’을 읽을 때 이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요즘은 특히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그 말은 곧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행복’ 자체를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감은 마음의 안정과 위안이 찾아온다면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감정임에도, 수많은 책과 매체는 '행복'이라는 목표물에 직진하는 방법만을 이야기 한다. 법륜스님의 ‘행복’이라는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행복’ 자체를 목표로 삼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게 된다. 열반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깨달음’ 자체를 배우는 것이 어리석은 까닭은, 깨달음은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무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충만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행복해지기 위해 '행복' 그 자체를 알려고 하는 것도 주객이 전도된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이 행복해지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법륜스님이 행복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업은 바로 그 원인을 찾아내는 일이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원인만 수정할 수 있다면 행복은 멀지 않다.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화를 참을 수 없는 상황,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가족들처럼 우리에게는 수없는 불행의 요인이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거기서 거기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기의 방식으로 불행하다.”
행복이 단순해 보이는 것과 불행이 해결하기 힘들고 복잡해 보이는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이다. 불행한 것은 모든 개인에게 나름의 이유를 만들게 하고, 이것은 결코 내가 약해서나 못돼서가 아니라 이 ‘불행’의 모습이 너무 불가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법륜스님의 이야기로 이를 풀어보자면 이렇다. “그렇다면 그 모든 상황에 모두 다 관계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피해자든 가해자든 모든 상황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답은 당연히 ‘나’이다.
모든 상황에 ‘내’가 들어 있는데도 답이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면 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법륜스님은 법구경의 한 구절을 빌려 이렇게 말씀 하신다.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고,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모든 상황에는 그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단서가 있는 법, 법륜스님은 그 답을 ‘나’에게서 찾으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은 후에 내가 다시 집어 들지만 않는다면 고통은 다시 생기지 않는다. 원숭이가 눈 앞의 먹이를 놓고 손을 뺀다면 다시 열매가 널린 숲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그것을 못 잊고 다시 와서 집어 든다면 그 먹이는 그의 마지막 지상의 양식이 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래 그렇다면 이 책에서 스님께서 하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이더냐. 라고 묻는 다면. 나는 '기준을 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기준을 정하는 삶은 지금보다 똑똑한 내가 되어야 하고, 상상 속의 성공에 근접해야 하며, 타인까지 나의 기준에 부합해야 하는 삶이다. 내가 정한 기준을 달성해야 행복하다는 생각은 위험하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발상이다. 행복은 드래곤볼 일곱 개를 모아 단숨에 달성하는 경지가 아닌 구슬을 모으는 지금 순간순간의 느낌인 것이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를 위로해줄 친구가 있고, 매번 다투지만 아침이면 함께 밥먹을 가족이 있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별탈 없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만든 기준 안의 ‘무언가’가 ‘완성’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버릴 수 있다면, ‘행복’이 달성되어야할 목표라는 생각만 내려놓는다면 행복이 시작되는 곳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을지 모른다.
바야흐로 행복 강박 시대다. 작년에 한 신문이 젊은층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세 명 중 한 명(33.9%)이 기쁨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에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과장해서 표현한 적이 있다고 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남에게 뒤쳐지는 것이 싫어서라고 대답했다. 행복도 이제 경쟁 대상이다. 그만큼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러는 이유가 뭘까? ‘뒤쳐지기 싫다’는 말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현실 도피 심리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여기엔 개인적인 원인만은 아닌, 사회적인 원인도 있다. 학창시절, 나는 문제를 풀 때 내가 아는 것이 맞는지 틀린지 확실하지 않아서 불안한 문제일수록 빨리 정답을 확인하고 싶었었다. 해답을 향한 욕망의 크기는 내가 지금 느끼는 불안의 강도에 비례했다. 행복 강박도 동일하다. 불안할수록 집착하게 된다. 불안이 소멸된 상태로써의 행복에 대한 희구가 갈수록 절박해지는 탓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불안의 시대라 일컫는다. 북한은 연일 핵도발을 하고 있고 언제 해고될 지 모르는 비정규직 비율은 날로 높아지고 있으며 가계 부채 비율은 아주 심각한 상황이다. 다수의 경제 전문가들이 2017년에 우리나라에 커다란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 경고한다. 여기저기서 불길한 지표와 예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판이니 아무래도 가느다란 막대 위에서 위태롭게 돌고 있는 접시와도 같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행복에 대한 천착도 높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행복이어야 할까? 너무도 불안한 우리는 그저 어서 빨리 안정을 얻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 해야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는지 따져 볼 여유가 없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파시즘은 언제나 사회가 한창 불안할 때 도래했다. 그처럼 우리는 커다란 불안 앞에서 쉽게 자유를 포기하는 경향이 짙다. 선택에 뒤따르는 위험 보다는 모방을 통한 안정을 취하려든다. 때문에 막연히 남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의 모델로 여기고 뒤쫓는다. 그것은 또한 타인의 인정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해서 더욱 견고해진다. 행복은 결국 기성품 같은 것이 된다. 치수는 미리 정해져있고 우리는 이제 자신의 기준을 그것에다 억지로 맞춰야 한다. 그런 우리들은 마네킹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의지로 선택된 것이며 외모는 근사해 보일지라도 내면은 공허하다.
우리는 성공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타인으로부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지는 몰라도 자기 삶이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었을 때 과거에 자신이 한 일이 보람 있었다고 느끼기 보다 허망함을 느끼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p. 189)
자전거를 탈 때, 우리 몸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느끼지는 못해도 흔들리는 자전거 위에서 계속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불안과 행복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불안할수록 우리가 정말 해야 할 것은 행복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에 대한 숙고일 것이다. ‘법륜스님의 행복’은 그런 균형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30년간 법문을 강의한 내공으로 부드럽고 친절하게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며 사회와 가족 내에서 만나는 모든 갈등에 있어서 내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관조하는 것이 왜 보다 현명한 방법이 되는지 그리고 현재에 충실할 것과 자신의 처지를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조언한다. 그런 조언들이 이 책엔 참으로 넉넉하다. 때문에 실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여기에 의탁해 풀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게도 특별히 와닿는 조언이 있었다.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바탕에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깔려 있어요. 또 이런 자기의 자아상에 집착해서 자기를 우월하게 여겨요. 그런데 현실의 자기가 그만큼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해하는 것이지요.(p. 34)
그런 것이었나? 내 부족함의 감각이 실은 내 우월함의 반영이었다니! 난 늘 자신을 겸손하다 여겼는데 실은 그것도 우월이 굴절된 잔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다. 법륜스님의 조언이 균형점을 옮긴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이제까지 전혀 서보지 못했던 자리에서 나와 관계 그리고 삶을 응시토록 하는 것이다. 기성품화된 행복은 불안의 부정에 따른 반향으로써 성립한다. 품고 헤아리기 보다는 배척하기에 급급하다보니 행복마저 브랜드(brand)가 되어 버린다. 즐김이 아니라 소유의 대상일뿐이고 실체도 없는 기호. 유토피아란 인간 실존이 가진 부정성을 부정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찰스 틸리히의 말을 믿는다면 유토피아란 브랜드화한 행복의 극대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비롯하여 많은 유토피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디에서나 늘 폭력적인 배제와 억압이 항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나치의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유태인을 생산했다고도 말한 바 있다. 즉 유토피아는 배제와 억압의 폭력으로 성립되고 지탱되는 것이다.
축소판인 맹목적 행복도 그러하다. 뒤쳐지기 싫어서 행복을 과장해서 표현했다고 많은 이들이 대답했듯이, 여기에도 서열을 매개로 한 배제는 그대로 통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륜스님은 내 행복을 위해 희생된 타인을 먼저 고려하라고 말한다. 불안의 공포로 자신의 시야를 가리기 전에 함께 떨고 있는, 나보다 못한 타인을 먼저 보라고 하는 것이다. 외면이 아닌 직시, 배제가 아닌 배려의 요청이다. 그리고 참된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시작이다. 불안이 전염시킨 오늘날 행복의 행태를 볼 때, 이런 법륜스님의 ‘낯선 자리’로의 인도는 내게 적절해 보인다. 낯선 자리로 가는 것은 스스로를 다양한 삶의 맥락 속으로 삽입하는 것을 뜻한다. 자신을 산포하여 천변만화 하는 것이다. 어디든 서 있을 수 있는 이런 자에게 행복은 더 이상 어딘가에 있는 지점이 아닌, 지금이라도 당장 결심만 하면 되는 선택 사항일 것이다. 결과의 중시로 무시되었던 과정이 복원되고 미래 역시 현재 앞에 꼬리를 내릴 것이다. 이 비전을 법륜스님은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
정녕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법륜스님의 조언 옆에 나를 놓고 비교해 보니 솎아낼 것도 많고 용기도 아주 많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도 지금 당장 나의 바깥으로 첫 발을 내밀어 보려 한다. 법륜스님이 '자꾸 “내일부터” “모레부터” 하면서 미루지 말라(p.25)'고도 하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