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하나뿐이던 여동생은 머리맡에 짧은 메모를 남기고 죽어버렸다. 나는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 사랑해. 용서해줘. 사랑해. 그녀는 두 번이나 사랑한다고 썼다. 거기에는 자신의 결정이 지체되는 것을 피하려는 자의 다급함이 있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두 번씩이나 사랑한다고 쓴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그녀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어머니가 그걸 버틸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머지않아 죽어버릴 거라고, 그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아니 어쩌면, 나의 전망이 그녀의 죽음을 견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창백한 무영의 정원」중에서
종말은 불시에 찾아오지 않았다. 종말의 날짜가 모두에게 공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종말이 도래하리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예상보다 너무 멀리에 있다는 데에 당혹감을 느꼈다. 새로운 인생을 꿈꿀 수 있을 만큼 멀지는 않았으나, 다급하게 삶을 정리해야 할 만큼 가깝지도 않았다. 작별의 인사를 전할 사람들의 목록 대신에 남아 있는 계절의 숫자를 헤아렸다. 초읽기가 시작되자 온갖 종교가 앞다투어 포교에 나섰고 수많은 천국이 상품처럼 진열되었다. 거리에 폭동이 일어날 때면 종말보다 지옥이 앞서는 듯했다. 최후의 존엄을 외치는 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이 종말이 실패하리라 예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학자들의 예측과 무속인들의 전언은 혼동되었다. 그러나 그중 무엇 하나도 종말을 실감케 하지는 못했다. 종말의 징후들이 포착되고, 종말의 날이 거듭 확정되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종말은 너무 멀리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절망이나 희망이 아니라, 기다림에 익숙해지는 일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예언자들」중에서
자정을 0시라고 부르는 걸까. 0은 11의 다음에 오는 숫자가 아니고, 23의 다음에 오는 숫자가 아니며, 0은 12와도 24와도 같지 않다. 0은 1의 앞에 올 수 있으므로, 자정을 하루의 시작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시계는 둥글고, 1부터 12의 숫자를 가지고 있고, 시침과 분침과 초침은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돈다. 하루에 두 바퀴를 돌며, 하루에 두 번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동시에 12를 가리키고, 두 번 중의 한 번은 오늘과 내일에 동시에 속한다. 시계는 계속해서 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그런데 왜 0일까. 마치 시간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의 측량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오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그것은 눈앞에 영이 앉아 있지 않았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질문이다.
---「영의 기원」중에서
그때 한 여자가 멀리서 언 강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어. 네 엄마였다. 부동의 풍경을 휘젓고 있었지. 동작이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너무 멀어서 구체적인 생김새나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두꺼운 검정 점퍼 아래 자줏빛 스커트가 펄럭이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아무튼 발목을 다 덮는 자줏빛 스커트는 풍경 안의 다른 색들을 모두 무채색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강렬했지. 아름다웠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구나. 걷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 작은 발을 얼음 위로 지치며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강의 중심을 향해 저절로 빨려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중에서
그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 속에 피폭된 성모상의 검은 두 눈이 떠올랐다. 다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눈을 뜨자, 이번엔 붉은 카펫이 깔린 까마득히 긴 복도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문이 닫히고, 그가 또다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은 눈 속엔 텅 빈 어둠만이 가득했고, 엘리베이터는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는 중이었다.
---「신앙의 계보」중에서
당신은 보았다. 불멸의 인간이 당신 앞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홀로 오래 살아남은 자의 눈은 영화 속에서 보아왔던, 혹은 소설 속에서 읽고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서늘하지도, 삶의 무상함을 깨달은 깊은 심연을 간직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탁하고 불투명했다. 드러내는 것보다는 감추는 것에 능했다. 더한 것도 뺀 것도 없이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눈은 마치 얼음강과도 같았다. 그 얼어붙은 수면 아래로 흐르는 물의 깊이와 유속을 도저히 가늠할 길이 없었다고 당신은 말했다.
---「경멸」중에서
수진을 묶고, 그녀의 입과 귀를 막고, 형인은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들이 나를
모욕한 대가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조금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당신들이 제외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당신들도 깨달아야 한다. 당신들의 딸은 온전히 돌아가지 못할 거야.
---「사이렌이 울리지 않고」중에서
우리는 그가 이해하는 바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완전히 삼켜버리도록 늪과 같은 그림자 속에 자신을 던진 바, 그의 아내가 보여주려 하지 않았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그 사건들처럼, 그가 스스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을 우리 또한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언제나 미리 삭제된 몇 개의 장면이 존재하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삭제된 바로 그 장면들이다. 나는 영원히 달아나지 못한다. 다만, 이제 불을 끌 시간이다.
---「화성, 스위치, 삭제된 장면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