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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5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332쪽 | 420g | 145*207*30mm
ISBN13 9788972758822
ISBN10 8972758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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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MD 한마디

몇몇 첫 소설집은 잊지 못할 첫인상을 남긴다. 이번 천희랑 소설가의 첫 단편소설집은 묵직한 상징과 유려한 문장이 독자들의 마음에 꼭 남을 것이다. 소설 곳곳에는 죽음이 있지만, 그것을 빛으로 능숙히 그려내는 젊은 작가의 탄탄한 힘을 믿어보자. -문학MD 김유리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내게 하나뿐이던 여동생은 머리맡에 짧은 메모를 남기고 죽어버렸다. 나는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 사랑해. 용서해줘. 사랑해. 그녀는 두 번이나 사랑한다고 썼다. 거기에는 자신의 결정이 지체되는 것을 피하려는 자의 다급함이 있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두 번씩이나 사랑한다고 쓴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그녀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어머니가 그걸 버틸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머지않아 죽어버릴 거라고, 그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아니 어쩌면, 나의 전망이 그녀의 죽음을 견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창백한 무영의 정원」중에서

종말은 불시에 찾아오지 않았다. 종말의 날짜가 모두에게 공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종말이 도래하리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예상보다 너무 멀리에 있다는 데에 당혹감을 느꼈다. 새로운 인생을 꿈꿀 수 있을 만큼 멀지는 않았으나, 다급하게 삶을 정리해야 할 만큼 가깝지도 않았다. 작별의 인사를 전할 사람들의 목록 대신에 남아 있는 계절의 숫자를 헤아렸다. 초읽기가 시작되자 온갖 종교가 앞다투어 포교에 나섰고 수많은 천국이 상품처럼 진열되었다. 거리에 폭동이 일어날 때면 종말보다 지옥이 앞서는 듯했다. 최후의 존엄을 외치는 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이 종말이 실패하리라 예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학자들의 예측과 무속인들의 전언은 혼동되었다. 그러나 그중 무엇 하나도 종말을 실감케 하지는 못했다. 종말의 징후들이 포착되고, 종말의 날이 거듭 확정되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종말은 너무 멀리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절망이나 희망이 아니라, 기다림에 익숙해지는 일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예언자들」중에서

자정을 0시라고 부르는 걸까. 0은 11의 다음에 오는 숫자가 아니고, 23의 다음에 오는 숫자가 아니며, 0은 12와도 24와도 같지 않다. 0은 1의 앞에 올 수 있으므로, 자정을 하루의 시작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시계는 둥글고, 1부터 12의 숫자를 가지고 있고, 시침과 분침과 초침은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돈다. 하루에 두 바퀴를 돌며, 하루에 두 번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동시에 12를 가리키고, 두 번 중의 한 번은 오늘과 내일에 동시에 속한다. 시계는 계속해서 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그런데 왜 0일까. 마치 시간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의 측량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오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그것은 눈앞에 영이 앉아 있지 않았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질문이다.
---「영의 기원」중에서

그때 한 여자가 멀리서 언 강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어. 네 엄마였다. 부동의 풍경을 휘젓고 있었지. 동작이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너무 멀어서 구체적인 생김새나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두꺼운 검정 점퍼 아래 자줏빛 스커트가 펄럭이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아무튼 발목을 다 덮는 자줏빛 스커트는 풍경 안의 다른 색들을 모두 무채색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강렬했지. 아름다웠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구나. 걷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 작은 발을 얼음 위로 지치며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강의 중심을 향해 저절로 빨려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중에서

그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 속에 피폭된 성모상의 검은 두 눈이 떠올랐다. 다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눈을 뜨자, 이번엔 붉은 카펫이 깔린 까마득히 긴 복도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문이 닫히고, 그가 또다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은 눈 속엔 텅 빈 어둠만이 가득했고, 엘리베이터는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는 중이었다.
---「신앙의 계보」중에서

당신은 보았다. 불멸의 인간이 당신 앞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홀로 오래 살아남은 자의 눈은 영화 속에서 보아왔던, 혹은 소설 속에서 읽고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서늘하지도, 삶의 무상함을 깨달은 깊은 심연을 간직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탁하고 불투명했다. 드러내는 것보다는 감추는 것에 능했다. 더한 것도 뺀 것도 없이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눈은 마치 얼음강과도 같았다. 그 얼어붙은 수면 아래로 흐르는 물의 깊이와 유속을 도저히 가늠할 길이 없었다고 당신은 말했다.
---「경멸」중에서

수진을 묶고, 그녀의 입과 귀를 막고, 형인은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들이 나를
모욕한 대가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조금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당신들이 제외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당신들도 깨달아야 한다. 당신들의 딸은 온전히 돌아가지 못할 거야.
---「사이렌이 울리지 않고」중에서

우리는 그가 이해하는 바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완전히 삼켜버리도록 늪과 같은 그림자 속에 자신을 던진 바, 그의 아내가 보여주려 하지 않았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그 사건들처럼, 그가 스스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을 우리 또한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언제나 미리 삭제된 몇 개의 장면이 존재하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삭제된 바로 그 장면들이다. 나는 영원히 달아나지 못한다. 다만, 이제 불을 끌 시간이다.
---「화성, 스위치, 삭제된 장면들」중에서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창백한 무영의 정원
돌연사한 아버지와 스스로 죽음을 택한 여동생, 이어 발생한 어머니의 실종. 많은 사람들이 급작스럽게 죽어가는 묵시록적 세계 속에서 주인공 ‘나’는 죽은 여동생의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 비밀 모임에 접속하게 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익명의 죽음들을 마주하게 된다.

예언자들
하루하루 종말의 도래를 기다리는 세상 속에서 네 번째 현이 끊어진 바이올린으로 마지막 날까지 음악을 연주하는 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여자’와 사형선고를 받아 형이 집행되었지만 시체안치소 비닐 팩 안에서 깨어나는 ‘남자’의 이야기.

영의 기원
친구 ‘영’의 죽음을 전해 들은 ‘나’는 동전을 던지며 ‘영’의 죽음이 사고인지 자살인지를 계속해서 묻는다. 남겨진 ‘나’는 문서 작성용 프로그램을 열어 사고를 의미하는 앞면은 1로 자살을 의미하는 뒷면은 0으로 기록하며 ‘영’과 ‘영’이 남기고 간 것들을 기억한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딸을 둔 어머니이자 한 여성의 연인이었던 인물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그녀의 딸과 옛 연인이 주고받은 열 통의 편지 형식에 담긴다. 예술가이자 성 소수자인 여성들의 사랑과 절망, 화해와 불화의 조각들이 아름답고 정교한 서사를 통해 하나의 퍼즐 작품으로 완성된다.

신앙의 계보
신부 'P'는 천주교 박해와 원폭 피해의 상흔이 남아 있는 나가사키의 우라카미성당을 방문해 신의 뜻에 관한 그의 의구심을 해소하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남자아이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그를 옭아매온 상처와 죄의식에 더욱 빠져들게 된다.

경멸
미술기자인 ‘당신’이 겪은 화가 ‘그’의 기이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불멸의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기자의 눈앞에서 자살을 해 보이는 화가를 두고 기자는 황급히 현장에서 도망을 치지만 기자의 눈앞에 정말로 화가가 다시 살아 돌아오게 된다.

사이렌이 울리지 않고
유학 업체 사무원으로 일하는 ‘형인’은 특별 관리 학생인 ‘수진’의 입학시험 접수에서 실수를 저지른 탓에 사장과 ‘수진’의 부모로부터 부당한 요구에 시달린다. 모멸감을 느끼며 공항으로 ‘수진’을 마중 나가게 된 ‘형인’에게 ‘수진’은 자신의 비밀 한 가지를 털어놓는다.

화성, 스위치, 삭제된 장면들
‘그’는 아이가 이사해 나간 방에서 아내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화성 여행의 시대가 도래한 세상에서 아내는 화성을 다녀온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중간중간 찢겨 나간 일기장의 내용을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채워 넣으면서, 아내의 자살 원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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