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에게 기획서를 보여줬더니 “이건 노스탤지어 말고 뭐가 있나”라는 말을 들었다. “만드는 사람이 처음부터 결론을 알고 있는 다큐멘터리는 재미없어”라고. …… ‘처음부터 결론을 아는 작품을 만드는 건 재미없다’는 진리를 깨우친 것은 비교적 최근 들어서다. --- p.34~35
정말로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놀랄 만큼 사고가 유연해서, 자신의 영역과 동떨어져 보이는 유파나 새로운 대상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호기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경쟁심이자 도전 정신이다. 무언가 하나라도 건질 수 있는 요소, 훔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탐욕스러움이다. 그런 어린애 같은 경쟁심을 내버리는 순간부터 인간의 화석화는 확실히 시작된다. 과거의 유산을 고집하는 것은 가장 손쉬운 일이다. --- p.39
소녀에게는 연기 경험도 기술도 전혀 없었지만 나는 십수 년의 인생 속에서 기른 그 소녀 나름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느꼈다. 어쩌면 아직 본인조차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한 번은 어디 깊숙한 곳까지 잠수해 들어갔으리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가혹한 경험의 산물인 것일까. 무엇이 행복한 인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을 무엇이든 탐욕스럽게 비료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 우리 세계의 특징이다. --- p.44
영화는 언어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산문보다 행간에서 다양하게 상상력을 발휘하는 시나 하이쿠와 닮았다. 영화를 즐기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력이나 청력이라기보다 오히려 예민한 주의력과 풍부한 상상력이다. --- p.52
크게 믿은 뒤에는 크게 의심하고 싶다. 의심하고 덤벼드는 태도야말로 숭상해온 대상을 대하는 가장 진지한 자세라고 생각하니까. --- p.59
‘어차피 영화야’라고 절실히 생각한다. 영화는 위기를 구하지 못한다. 생활을 다시 일으킬 힘도 없다. 하지만 모든 곤란이 없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분명히 사람들의 마음에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와는 또 다른 세계를 받아들일 빈틈이 다시 생겨나 시시한 연애나 칼싸움, 요괴들 이야기에 조마조마, 울렁울렁, 쓸모없는 가슴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또 어둡고 뒤틀린 지독한 이야기와 고독을 공유하고 싶다고 생각할 날도.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날을 맞이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그때가 오면 언제든 훌쩍 찾아올 수 있게 등불을 곁에 둘 수 있도록, 이 세상 한구석에서 우리는 준비해두려 한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현실과 싸우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자신의 생활로부터 거리를 두고 숨을 돌릴 어둠을 마련해두기 위해. --- pp.67~68
나 같은 기량의 사람에게 영화 촬영은 골치 아픈 일의 연속이어서, 그중 즐거웠던 추억을 내 안에서 곱씹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해나갈 희망을 잃어버린다. --- p.78쪽
다른 사람인 척하지 못하는 그 서투름, 애처로울 정도의 대체 불가능함이야말로 내가 그 역할에 바라는 인물상 자체였다. ‘세간의 평가가 어떻든 나는 나로서밖에 살아갈 수 없다’라는 강인함과 비애는 감동을 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그녀들을 ‘역도 선수’라는 비슷하지만 다른 설정에 끼워 넣으려 하는 데 대한 저항감도 내 안에서 생겨났다. 그녀들에게 본인과는 다른,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를 연기시키는 데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함. 덧붙이자면 이것은 결코 프로 배우에게는 품지 않는 감정이다. 나는 ‘무언가인 척’을 시킨다는 죄책감을 끝내 견딜 수 있을까. --- p.95쪽
무능한 나 자신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는 나름대로 해답을 가지고 있다. --- p.107
이제까지 살아오며 가장 ‘여행’ 같았던 시간은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면, 집과 학원 자습실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던 재수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탁하게 고인 듯한 강가를 따라 자전거로 달리면서, 어떤 사람도 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이 가슴 한복판으로 스며드는 것을 떨쳐버리듯 힘껏 페달을 밟았다. 왜 그 나날을 여행이라고 생각했는가. 역시 내가 어떤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여행이란 그런 기분을 뜻하는 것 아닐지. --- p.152
나와 각본은 철저하게 싸워왔다.
결별의 때가 찾아왔다.
카메라가 돌 때 그 앞에 있는 것은 내가 각본을 쓸 때 상상했던 디테일과 아무리 가까워도 같지 않다. 영화가 태어날 때 각본은 죽는다. 내 안에서만 살아 있던 풍경과 인물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는 새로운 동료와 영화를 만든다. --- p.170
창작자는 낭만을 꿈꾸는 법이다. 역할을 제안한 배우가, 내가 그린 인물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해주지 않을까 하는 낭만. --- p.171
나는 원래 용모 단정한 남자에 대한 시기와 의심이 강해서, 그 됨됨이를 알기 전부터 ‘교만’ ‘나르시시즘’ ‘경조부박’ 등의 부정적인 키워드를 떠올리며 경계하는 커다란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다기리 씨는 핸섬하기는 하나 어두운 면 역시 십자가처럼 짊어진 채, 인간의 생 자체의 아름다움도 서서히 체현해나가는 저력을 지닌 귀중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 p.186\
사람과의 관계 속에는 대체로 못다 한 일이 있고, 또 그것이 관계의 미래를 잇는다. 하지만 그 사람을 느닷없이 잃으면 그 ‘못다 한 일’이 가슴을 쿡쿡 아프게 찌른다. 그 일을 만회할 기회도 동시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 p.196
영화란 이다지도 알기 힘든 것일까. 그러나 이제 알았다, 라고 생각한 순간 열기가 식는 것이 인간의 슬픈 본성이다. 내게는 언제까지고 알 수 없는 연인이 있어서 행복하다. 사랑은 아직 당분간 지속되리라.
--- 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