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07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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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416쪽 | 522g | 135*195*25mm |
ISBN13 | 9788954673082 |
ISBN10 | 8954673082 |
발행일 | 2020년 07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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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416쪽 | 522g | 135*195*25mm |
ISBN13 | 9788954673082 |
ISBN10 | 8954673082 |
세로토닌 007 옮긴이의 말 407 |
읽는 내내 불편했다. 주인공의 과도한 성(性)에 대한 집착이나 묘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의 불편함을 자극한 것은 오히려 그의 나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40대 중반. 미셸 우엘벡은 그 나이를 그렇게 지나왔나 싶다. 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해야 할 나이의 한 사내를 주인공을 내세워 현대인의 우울을 묘사하는 게 마뜩치 않다기보다 당혹스러웠다(하지만 어느 나이대를 택할 것인가?).
주인공 플로랑클로드 라브루스트는 40대 중반의 프랑스 백인 남성이다. 농업대학을 나와서(미셸 우엘벡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더욱 이 주인공은 작가를 연상케 한다) 농업 전문가로 정부에 컨설팅하는 위촉직(그래서 공무원보다는 연봉이 쎄다)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농업은 위기에 처해있고, 자신이 그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또한 비틀린 여자 관계에 시달린다. 스무 살 어린 일본인 여성과 동거하지만, 그녀에게서 어떤 애정도 느끼지 못하고,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기로 마음 먹는다. 그 비틀린 애정 관계는 20년 전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한 여인 때문일 것이다. 그녀를 아직도 못 잊고 있으며, 근처까지 가지만 앞에 나서지도 못한다.
또 한 가지. 그는 캅토릭스라는 “반으로 쪼개지는 작고 하얀 타원형 알약”을 복용 중이다. 바로 우울증 약. 대표적인 우울증 약은 프로작인데, 프로작이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막아서 그 양을 유지시켜주는 약이라면, 캅토릭스는 장에 존재하는 세로토닌(그렇다. 세로토닌은 장에 많이 존재한다!)의 분비를 촉진시켜 그 양을 늘려주는 약이다(소설에는 2017년에 개발된 약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 그런 약은 없다. 상관없다. 소설이니까. 그런데 장에서 세로토닌이 분비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이 캅토릭스의 부작용은 리비도 상실과 성기능 장애다(프로작의 경우는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상당수 보고되고 있다). 플로랑클로드는 바로 이 캅토릭스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일본인 동거녀로부터 떠나고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기를 결심하고 난 후의 여정은 과거로의 여정이지만, 그 과거는 현실이 되지 못한다. 궁핍을 넘어 추래해져버린 옛 여친, 몰락한 프랑스 농업을 상징하는 귀족 출신의 대학시절 친구, 그리고 늘 돌아가고 싶었던 애인.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남아 있던 아름다운 과거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지 않고, 현실을 더 괴롭게 만드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흘러가고 그가 장기 투숙하는 호텔이 금연 정책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의 자살을 암시하며 소설은 끝난다. 겨우 호텔의 금연 정책 때문에? 그렇게 보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마지막 방아쇠가 그 금연 정책임은 분명하다. 캅토릭스로 애써 분비시켜온 세로토닌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과거로부터 이어져오고 현실에서 증폭된 우울로부터 그를 살려내지 못한 것이다. 그게 현대인의 우울이다.
다시 돌아가서 불편했던 점을 돌이켜보면, 현대인이 우울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과연 다들 그렇게 살아가느냐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의심스럽다. 그래서 오히려 이 소설을 중년 남성(40대를 중년이라고 하기에도 그렇다)의 징징거림으로 이해하는 것을 어떨까 싶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사실 대부분이 그렇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의식하면 우울하고 의식하지 못하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한 남성이 옛 애인을 못 잊어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투덜거림. 다만 그 징징거림, 투덜거림이 폭력적으로 끝나기 때문에 문제인 셈이다.
한 작가의 책을 죽 읽다 보면 전작들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이제껏 나온 그의 모든 소설을 읽어온 바 이번 소설은 그의 소설 중 가장 역동적이다.
(※ 국내 출판된 우엘벡 책 중 완독하지 못한 건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의 대담집 『공공의 적들』 뿐이다. )
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성, 일의 성취와 자발적 포기, 권태, 무기력, 은둔 등을 다루는데, 이 책의 초반은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중산층 서구 엘리트의 모습으로 『투쟁 영역의 확장』, 『소립자』, 『지도와 영토』, 『복종』과 더 가깝고, 중반은 68세대가 추구했던 자유주의와 섹슈얼리즘, 과거 연인들과의 관계 고찰의 모습으로 『소립자』, 『어느 섬의 가능성』, 『플랫폼』과 닮았다. 후반부터 전개가 독특해진다. 직전의 전작 『복종』이 정치적 목소리가 강하긴 했지만 적극적인 저항까지 담지 못했다면 이번 『세로토닌』은 프랑스에서 실제 일어난 '노란 조끼 운동'을 예견했다는 평을 들을만큼 사회 비판이 격렬하다. 점점 더 개판으로 돌아가는 세상 꼴을 보자니 당연했던 걸까. 물론 실패의 엔트로피로 향하지만. 자본주의 시대 '노동의 종말'을 향하고 있는 지금이 어떤 꼴인지 자비 없이 보여준다.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벨 에포크(좋은 시절) 시대라고 말하지만 그건 먹고살기 좋았던 중상위층에게나 해당했다. 빈부 격차나 각종 차별이 더없이 치솟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참조), 지금 우리도 그런 역사 속이다.
섹슈얼리즘을 문제적으로 다루는 솜씨는 조르주 바타유와 비슷하지만 바타유보다 우엘벡이 더 저돌적이다. 섹슈얼리즘과 계몽주의와 냉소주의가 뒤섞인 D. A. F. 드 사드가 20~21세기에 살았다면 미셸 우엘벡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곧 자살할 듯 말 듯 한 허무주의적이고 신랄한 문체는 에밀 시오랑이나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비슷하다. 인종 차별과 여성 혐오를 많이 드러내는 미셸 우엘벡의 글이 불쾌한 부분이 많음(이번 소설엔 아동 관련 범죄까지...)에도 그의 글에 매료되는 건 절망의 끝까지 가보는 그의 적나라함이 폭력성과 환멸만으로 가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모든 것에 가차 없는 비판을 하는 한편 우리는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이고 굴레로 가득한 인생을 산다는 걸 비감히 고찰한다. 끝까지 조마조마하며 읽었는데 '사랑'을 강조하며 끝나는(에로스적 사랑- 낭만적 사랑에 국한된 게 한계이지만 : 동성애를 혐오했던 바타유와 역시 닮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우엘벡답지 않아 더 뭉클했다. 그에게나 지금의 우리에게나 가장 지독한 상실은 '사랑'이다.
"우리가 생의 단 한순간도 어떤 신이 됐든 신의 개입이나 존재조차 느껴본 적이 없으면서도, 심지어 우리가 신의 호의적인 개입을 특별히 누릴 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삶에 누적된 허물과 과오들을 고려할 때 다른 이들보다도 더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바라는 어떤 것"이 있는 게 인간의 삶이다. "지상에서 소유한 모든 것이 달랑 여행가방 하나로 압축"되고 "인간관계를 맺는 시기는 이제 만기"가 되었으며 이제부터는 "폐를 끼친 일에 사과하는" 일만 가득할 거라고 판단한 46살의 플로랑클로드는 같은 나이에 죽은 네르발과 보들레르를 떠올리며 결코 쉬운 나이가 아니라고 자조한다. 그는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이미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아무런 추억도, 다가올 기적에 아무런 기대도 없는 감정의 동절기로 조금씩 진입하고 있었고, 이 무력감은 직무 영역에서도 무산되는 사업이 늘어감에 따라 배가되었다." 똑같은 한 주 한 주가 반복되면서 "우리가 대단한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조용히 자리 잡았고", 직업인의 삶은 '아무런 쾌락도 선사하지 않는 창녀'처럼 생각되었다. 윗세대부터 우리 세대까지 파괴된 것을 재건하는데 철저히 무능했으므로 인류 문명에 대한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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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래가 활짝 열려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유일한 시절. 이후로 펼쳐지는 성인의 삶, 직업인의 삶은 느리고 점진적인 정체와 다름없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젊은 날의 우정, 학창시절에 맺었던 유일하게 진실한 우정은 성인의 삶의 문턱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의 좌절된 꿈의 산증인들, 명명백백한 추락의 산증인들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 젊은 날의 친구들과의 재회를 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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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간단하나 실질적으로는 이제 더는 그렇지 않으며, 바로 그렇게 인류 문명은 요란하지 않게, 위험도 비극도 없이, 아주 미미한 유린만으로 거꾸러진단. 문명은 무기력과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으로 거꾸러진다. 사회민주주의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무것도 없고, 혹여 있다면 오직 영원한 그리움과 망각에의 호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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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도 불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조수간만은 살아오는 동안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육지를 뒤덮으러 조용히 밀려 올라오는 저 거대한 액체를 느껴보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토크쇼 <우린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가 왁자하게 흘러나왔고 느리게 밀려오는 대양과 기묘한 대조를 이뤘다. 패널이 너무 많았고 다들 너무 크게 떠들었다. 이 오락 프로의 볼륨이 전체적으로 과도하게 높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으나 이내 후회했다. 현실세계에서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었고 이야기 밖으로 밀려난 기분이었다. 내게 부족한 것은 어쩌면 핵심적인 것인지도 몰랐다. 게스트들의 캐스팅은 완벽했고 스튜디오엔 소위 중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창밖을 보니 바닷물이 이제는 불안할 정도로 더한층 가까워진 듯 보였다. 다음엔 우리가 바다에 잠길 차례인가? 그 경우라면 약간의 기분전환이 되리라. 결국 나는 커튼을 닫고서 텔레비전을 다시 켠 뒤 볼륨을 죽였다. 이내 탁월한 선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딱 좋았다. 오락 프로그램의 왁자지껄함은 그대로인 채로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즐거움이 더해졌다. 약간 정신 나간 듯하면서도 재밌는 미디어 인형들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할까. 그것들이 분명 나를 잠들게 해줄 터였다.
현재의 일본인 연인 유주는 집단 성교에 빠져 있고 플로랑클로드의 의미는 그녀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파트너일 뿐이다. 그녀를 죽일까도 생각하다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세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필사적 노력을 끊고 자발적 실종을 택한 플로랑클로드는 인생을 결산하려는 의지 속에 의미 있었던 과거의 인연들을 찾아가지만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한다. 과거 연인 클레르는 알콜 중독에 빠져 있고 유산으로 받은 부동산이 남은 희망이다. 유일한 친구 에메릭을 찾아간 플로랑클로드는 그와 마찬가지 처지인 에메릭의 몰락을 목도한다. 그는 "정말이지 우리가 다른 이들의 삶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정도 연민도 정신분석도 이성적인 판단도 전혀 유용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낸 뒤 의미를 최대한 부풀"려 질병 같은 그 메커니즘 속에서 죽음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와 같았던 카미유를 찾아가 몰래 훔쳐보기만 하다가 미혼모로 사는 것 같은 그녀에게 자신보다 아들이 더 중요할 거란 생각에 관계 회복을 포기한다. 세로토닌이 든 캅토릭스로 인한 부작용인 발기 부전은 남성으로서의 사형 선고였지만 그에겐 사형 선고의 추가 사항이었을 뿐이다. 사회적 관계는 모두 끝장났고 풍족할 줄 알았던 재산으로는 물가 상승으로 10년 밖에 버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자살을 계획한다. 그가 고골 『죽은 혼』이나 토마스 만 『마의 산』을 읽듯이ㅡ365일이 다 그렇겠지만ㅡ 특히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와 미셸 우엘벡 『세로토닌』을 읽는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인생이 잘 안 풀렸다고 생각하는 40대 중후반이라면 엄청난 공감과 더 치명적일 것.
관계를 원하고 사람을 필요로 하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망치기 일쑤여서 도덕과 윤리, 법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끝없이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행복은 결코 거기서 오지 못한다. 경계를 허무는 사랑을 생각해보라.
실패한 인생을 반추하는 주인공보다 주인을 잃고 전날부터 먹이도 먹지 못한 채 울고 있는 젖소들이 더 마음 아팠다ㅜㅜ
전 세계 공통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외로운 자는 구강기로 퇴화해 요리에 열광하는 탐닉형 비만자, 약에 의존하는 건강염려증자, 흡연과 알콜중독 같은 중독자가 되기 십상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화려한 요리, 항우울제 캅토릭스 약도 아닌 플로랑클로드가 시종일관 마시는 칼바도스가 마시고 싶었다. 온갖 실망 속에 사람보다 사랑보다 그의 우울이 더 가깝게 느껴져서다. 정말이지 인간은 다양한 증상의 병리 병동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지난날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영원히 일어난 것이고, 이제야 나는 그것을 알았으나, 그것은 닫힌 영원, 닿을수 없는 영원이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을 크게 둘로 나눈다고 했을 때, 이걸 '살아서 참 좋구나'와 '살기 너무 힘들구나'로 나누었을 때,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물어 보는 일. 사는 일이 단순하지 않으니 늘 한결같은 답을 택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마다 좀더 치우치는 쪽은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앞쪽에 눈이 머문다. 내 선택이 이러하다 보니 취향도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향한다. 글도 그림도 음악도.
블로그 이웃님의 글에서 소개받은 작가의 작품이다. 읽다 보니 작가의 글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평가와 달리 내 취향에서 어긋난다. 주제나 취지에서가 아니라 소재와 표현들이 내가 읽고자 하는 글과 거리가 멀었던 탓이다. 같은 소재를 다루더라도 표현을 통해 끌려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 작가의 글은 읽어도 읽어도 거북하고 부담스러웠다. 나의 지극히 촌스러운 독서 취향이 작가의 세계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리라.
세로토닌은 신경을 전달하는 물질이라고 한다. 이게 많아도 문제, 적어도 문제라서 적정량을 유지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고 또 필요한 태도라고 하는데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적어서 문제를 느낀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우울해서 약을 먹어야 하고, 우울해서 현실을 견디기 힘들고, 우울해서 과거의 영광을 자꾸만 헤집고... 우울하게 된 원인은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우울한 상태에서 느끼는 아픔은 다들 비슷하여 또 공감을 나누게 되는 것이겠지.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니 우리 같이 달래 보면 좋을 것 같아, 이 또한 힘들겠지만. 나로서는 이 나눔마저 벅차서 자꾸만 물러서고 마는 것이고.
개인의 행복과 안정은 개인만의 능력이나 성취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회 분위기, 특히 사회적 감수성이 아주 큰 역할을 맡고 있다. 나만 행복해서는 온전히 행복할 수 없다는 것, 내가 우울한 데에는 다른 이들의 실패나 좌절이나 상실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 이제는 우리가 이만큼 넓어진 서로 간의 영역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겠다. 작가가. 주인공이 끝내 놓치지 않은 '사랑'만큼은 여전히 희망으로 남기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