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말하는 작가의 탄생
나는 궁금하다. 왜 여섯 살짜리조차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그런 환상을 품는지. 왜 1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조차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어가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지. 책, 그게 뭐라고?
--- p.22~23
나는 인세로 먹고살고 싶었다. 책을 잘 쓰면 책이 잘 팔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문 칼럼이나 시사 프로그램 패널 출연, 외부 강연 같은 가욋일에 한눈팔지 말고, 잘 팔릴 만한 재미있는 신작을 쓰자 마음먹었다. 2017년 봄이 되자 그 결심이 아래서부터 흔들렸다. 당대 한국 소설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 작가 책 괜찮더라’는 평가를 받아도 판매량은 신통치 않다. 애초에 독서 인구 자체가 줄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도 사는 작가가 돼야 인세로 먹고살 만해진다.
--- p.25
20세기소녀는 나를 연예인처럼 보이게 하려고 작심한 것 같았다. 그날은 말하는 장강명이 말하는 사람들의 업계에 본격적으로 데뷔하는 날이기도 했다. 사진을 찍으며 스타일리스트가 가져온 셔츠 두 벌과 재킷을 번갈아가며 입었다. 사진가는 카메라 앞에 선 내게 “편하게 하시면 돼요”라고 했지만, 그 말은 아무리 들어도 절대 편해지지 않았다.
--- p.33
시간을 견디는 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하고 물을 수 있겠다. 나는 그 질문이 어쩌면 쓰는 인간과 말하는 인간을 가르는 중요한 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화와 녹음기가 생기기 전까지 말하기와 듣기는 그 행위가 이뤄지는 시공간에 집중하는 의사소통 기술이었다. 실시간 메신저가 등장하기 전까지 쓰기와 읽기는 (필담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보통 마주하지 않은, 다른 시간에 있는 사람을 향했다
--- p.48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논란의 상당수는 예의와 윤리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예의와 윤리는 폭력을 줄이기 위한 두 가지 수단이다. 이 두 덕성은 서로 겹치지 않으며, 맥락과 상황의 문제(예의)를 보편적인 법칙(윤리)으로 만들고자 할 때 종종 충돌이 발생한다.
--- p.56
2장. 책을 읽는 일, 책에 대해 말하는 일
‘좋은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와 같은 주제를 놓고 대낮에 맨정신으로 지인과 토론할 일은 거의 없다. 직장 동료와 점심을 먹다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 “뭐 잘못 먹었어?”라는 대꾸를 듣기 십상이다. 또는 걱정 어린 시선과 함께 “요즘 안 좋은 일 있는 거 아니지?” 하는 말을 듣게 될 수도 있고.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평소에 우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어두컴컴한 술집에서 한껏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서야 겨우 던질 수 있다. 물론 그런 시각에, 그런 장소에서, 그런 정신 상태로는 진지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다음 날에는 그런 화제를 꺼낸 사실을 부끄러워한다.
--- p.97~98
독서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라면, 누구나 쑥스러워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에 대해, 인생의 가치와 행복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아니, 말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누군가 경청해주는 것은 대단히 감동적인 경험이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점점 말이 많아진다. 생산적인 대화가 오간다. 책은 우리가 진지한 화제로 말하고 들을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 p.98
이성 교제 횟수를 자랑하는 학생은 이성과 우연히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눈 것조차 데이트로 간주할지 모른다. ‘1만 권’에 집착하는 독서가들은 두꺼운 책들은 피하고 읽기 쉽고 얇은 책들만 골라 읽는 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사실 알고 있다. 1만 명과 교제한 사람보다 평생에 걸쳐 서너 명의 상대와 길고 깊게 연애했다는 사람 이 연애의 다양한 측면을 더 잘 이해하리라는 사실을. 당신이라면 누구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싶은가. 책도 마찬가지다.
--- p.105~106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종이책의 물성이 아니라 책이라는 오래된 매체와 그 매체를 제대로 소화하는 단 한 가지 방식인 독서라는 행위다.
--- p.113
오늘날에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읽고-쓰기와 말하고-듣기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오가는 대화는 글자로 이뤄져 있고 당사자 간의 물리적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그 대화는 말하고-듣기에 가깝다. 우리는 그 대화에 감성적으로 참여하고, 부지불식간에 상대에게 윤리보다 예의를 요구하게 된다. 그건 그것대로 큰 문제다. 상대가 펼치는 주장의 옳고 그름보다 무례함의 여부가 더 중요한 그런 공간에서 공적 논의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 p.137
나는 오히려 ‘읽고 쓰면 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실제로는 편리한 면죄부로 쓰이는 것 아닐까 의심한다. 힘들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읽고 쓴다는 쉽고 재미있는 일만으로 자신이 좋은 인간이 되고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 p.156
3장. 말하기-듣기의 세계에서 만난 작가들
말하고 듣는 사람들이 읽고 쓰는 사람들보다 현재를 더 많이 사는 것 같다. 읽고 쓰는 부류만이 수십 년, 수백 년 뒤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을 놓치게 된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읽고 쓰는 이들은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대신에 우리는 외로움을 덜 탄다고 할 수 있을까?
--- p.201
우리는 최근 1년 동안 나온 책 중 가장 뛰어난 책, 가장 가치 있는 책을 과연 알아볼 수 있기는 한 걸까? 애초에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어떤 책이 시대를 앞섰다면 그 작품은 당대에 환영을 받을 수 없다. 그게 바로 시대를 앞섰다는 말의 의미다.
--- p.209
지금은 말하는 일과 쓰는 일에서 오는 수입이 달리는 자전거의 양 페달 같다. 두 페달을 번갈아가며 열심히 밟아야 프리랜서 글쟁이라는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달린다. 회사 다닐 때보다 분명 더 자유롭고 벌이도 썩 낫지만 한 페달에서 발을 떼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 ‘말하는 일도 재미있고 매력 있잖아? 너도 그럭저럭하잖아?’ 하고 자문하기도 한다. 회계의 문제가 아니라 각오의 문제이며, 바로 내가 이 상황을 선택하고 승인했음도 안다.
--- p.222
내가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이 서로 싸운다. 그러는 사이에 책은 점점 팔리지 않고, 강연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말 좀 하는 지식인 셀럽’에 대한 수요는 늘어간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는 베스트셀러를 쓰는 것이 최종 해결책이라는 역설적인 결론에 이른다. 인세나 판권 수입을 두고는 번민하지 않는다. 그건 뭐, 눈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돈이지. 펑펑 쏟아져라, 한겨울 함박눈처럼.
--- p.223
4장. 그럼에도 계속 읽고 쓴다는 것
고전은 독자에게 얌전하게 교훈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들은 독자들이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시비를 건다.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이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맞혀보라고 묻는다. 그것이 고전의 힘이다. 오이디푸스는 뭘 잘못한 걸까? 햄릿은 미친 걸까? 덴비는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라고 평했다.
--- p.240
그 책들은 그런 야수성 때문에 고전이 되었다. 동시에 당대에는 격렬한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고 불태워지거나 고발당하거나 판매 금지되었다. 악평을 받는 작품이 모두 길이 남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는 소설은 절대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소설가가 읽고 쓰는 세계에서 미래를 만나려면 마음속에 야수를 품어야 한다.
--- p.240~241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식사나 뜨거운 물줄기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그것들을 희생시켜가면서 구하려는 게 있다. 그걸 품위라고 부를 순 없을 거 같고, 의미? 글쎄……. 그렇게 불러야 할 테지만,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발견하려는 우주적 진리, 혹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삶의 중심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내가 좇는 그 ‘의미’가 객관적인 것인지 주관적인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보다 크고 나의 바깥에 있으면서 내 안에도 있는 무엇.
--- p.248
기자 5년 차부터 다시 혼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피곤한 날에는 집에 와서 그냥 곯아떨어졌고, 그렇지 않은 날에 밤에 한두 시간씩 원고를 썼다. 수면 시간이 줄어도 상관없었다. 원고가 잘 풀리는 날에는 기분이 통쾌할 정도로 좋았다. 그때 이미 꽤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 p.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