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그저께 한 인터뷰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만일 평생 내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이 정말 단 한 권만 있다면 나도 이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다른 많은 사람처럼 바보 멍청이였을 것이다. 어떤 책은 내 20대에 큰 감명을 주었고, 어떤 책은 내 30대의 삶에 방향타가 되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책이 1백 세 때의 나를 흥분시킬지 정말 궁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 p.19
1945년 1월 5일 나는 공작 수컷처럼 잔뜩 허세를 부리며 신부님에게 말했다. 〈신부님, 저 오늘 열세 살 됐어요!〉 그러자 신부님은 툴툴거리듯 툭 던지셨다. 〈잘못 살았네.〉 무슨 말일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셨을까? 나이가 그쯤 됐으면 진지하게 고해성사라도 해야 한다는 말일까? 아님, 고작 남들 다 하는 생물학적 의무 수행이나 한 걸 갖고 칭찬받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까? 혹은 속정을 숨긴 채 겉으로만 툴툴거리는 피에몬테 사람 특유의 방식대로 애정 담긴 축하의 말을 그렇게 에둘러서 표현한 것일까? 그러나 나는 안다. 스승이라면 의당 제자를 항상 시련으로 몰아넣어야 하고, 필요 이상으로 칭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신부님이 내게 일깨우려 하셨다는 것을.
--- p.21
나는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하지 않는다. 그건 헌법이 허용한 권리다. 그런데 트위터에 내 가짜 계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걸 안 순간 나는 꼭 카살레조의 짝퉁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한번은 어떤 부인을 만났는데, 느닷없이 내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트위터에서 내 글을 잘 보고 있고, 심지어 가끔 나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트위터상의 그 인물은 가짜 에코가 틀림없다고 점잖게 설명했지만, 부인은 마치 자기를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트위터를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데카르트의 말을 변주하자면 〈트위토, 에르고 숨Twitto, ergo sum〉이다.
--- p.42~43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공포로 온몸이 굳어 버렸다. 아스팔트 위에 사람의 뇌수가 흘러내린 광경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다행히도 그게 마지막이다). 게다가 죽은 사람을 본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만일 그때 내가 오늘날의 거의 모든 청소년처럼 카메라 기능이 장착된 핸드폰을 갖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어쩌면 나는 사고 현장에 내가 있었다는 걸 친구들에게 보여 주려고 그 장면을 찍었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아는 사람들을 위해 그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을지 모른다. 그다음에도 그런 짓을 계속해 나가다가 또 다른 사고 장면들을 찍고,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한 인간으로 변해 갔을지 모른다.
그 대신 나는 모든 것을 내 기억 속에 저장했다. 70년이 지난 뒤에도 이 기억 속의 영상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타인의 고통에 냉담한 인간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실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어른이 될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어른들은 영원히 구제할 길이 없다.
--- p.86~87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인, 용감하고 신중한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영웅이 필요한 나라는 불행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왜 불행할까? 그 나라에는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보통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정직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 요즘엔 이런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프로 정신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보통 사람들이 없다면 그 나라는 필사적으로 영웅적 인물을 찾기 마련이고, 그렇게 찾은 사람에게 금메달을 나눠 주기에 급급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가 뭔지 몰라 일일이 지시 내려 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필사적으로 찾는 나라는 불행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바로 그것이 『나의 투쟁』에 담긴 히틀러의 이념이었다.
--- p.134~135
바야르는 자신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때 책을 읽은 사람들도 잘못된 인용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책에 『장미의 이름』과 그레이엄 그린의 『제3의 사나이』, 데이비드 로지의 『교환 교수』를 요약하면서 각각 잘못된 정보를 하나씩 집어넣었다고 막판에 고백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 요약된 내용을 읽으면서 그레이엄 그린의 대목에서는 바로 오류를 간파하고 데이비드 로지에 관한 글에서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지만, 정작 내 소설에 대해서는 오류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건 아마 내가 바야르의 책을 주의 깊게 읽지 않았거나, 건성으로 책장을 넘겨서 그런지 모른다(바야르건 이 칼럼을 읽는 독자건 그렇게 짐작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 p.228~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