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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는 오래되었지만
인은주
시인동네 20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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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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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모르는 새ㆍ13/두 개의 눈ㆍ14/눈사람ㆍ15/존재의 사전ㆍ16/물에 녹는 시간ㆍ18/멍ㆍ19/달그림자ㆍ20/투석(透析)ㆍ22/다가오는 저녁ㆍ23/여름 연습ㆍ24/CCTVㆍ26/머루ㆍ27/산딸기ㆍ28

제2부
너의 장례식ㆍ31/장마ㆍ32/그 여름, 배롱나무ㆍ33/현상ㆍ34/의존성ㆍ36/어린이날ㆍ37/살구ㆍ38/노인ㆍ40/가을 장미ㆍ41/빗금ㆍ42/속담ㆍ44/이석(耳石)ㆍ45/보름달ㆍ46

제3부
안개ㆍ49/동백ㆍ50/사월ㆍ51/늦봄ㆍ52/웃는 고양이ㆍ53/탁목ㆍ54/오월ㆍ56/아까운 일ㆍ57/콘서트ㆍ58/그녀의 수법ㆍ60/편의점에서ㆍ61/이상한 야근ㆍ62/바닥ㆍ63/청혼ㆍ64

제4부
생각나무ㆍ67/고양이의 언어ㆍ68/빈집ㆍ69/짐승으로ㆍ70/슬픔이여 안녕ㆍ72/입양ㆍ73/식구ㆍ74/블루스 타임ㆍ75/새벽ㆍ76/상강ㆍ78/연민ㆍ79/참외밭ㆍ80/매미ㆍ81/까마귀ㆍ82

제5부
오후ㆍ85/해안선ㆍ86/마당ㆍ88/산당화 피는 저녁ㆍ89/배송ㆍ90/개복ㆍ92/암탉의 시간ㆍ93/개조심ㆍ94/수덕여관ㆍ95/국경ㆍ96/우화ㆍ98/봄바람ㆍ99/응급실ㆍ100

해설
저 두터운 은유의 숲, 혹은 미장센/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ㆍ101

저자 소개 1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2013년 [시조시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미안한 연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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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0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16쪽 | 176g | 125*204*8mm
ISBN13
9791158965327

책 속으로

통유리 창문 앞에 아기 새가 죽어있다 겹벚꽃 흩날리는 찬란한 봄날 아침

모르는 새가 죽었을 뿐 죽은 새는 가벼웠다
--- 「모르는 새」 중에서


둥근 달을 그렸는데
달의 정원에는
꽃들이 노랗게 피어 있었다
나보다 먼저 들어간 사람의 것이었다

꽃들은 피어 있고
꽃 아닌 꽃도 피어 있고
장미꽃 봉오리는 여섯 장의 꽃잎으로
겹겹이 달의 울타리를 치겠다고 서 있었다

사랑을 하기엔
나는 이미 늦은 사람

앞사람의 그림자를 한 잎씩 떼어내며
여름의 바깥에 서서 바라만 보는 사람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노란 꽃의 정원사가 쳐놓은 금 밖에는
하나의 달이 떠 있다
너무 늦게 뜬 달이
--- 「달그림자」 중에서


산까치가 내려와
딸기를 쪼았다

장마가 잠시 멈춘 다 젖은 수풀 사이

당신이 몰래 다녀가고
딸기는 더 빨개졌다
--- 「산딸기」 중에서


우리의 관계는 끝난 지 오래지만
너는 죽음으로 나를 호출했다
빈소에 너의 얼굴은 화환 속에 담겨 있다

너에게 들어야 할 어떤 말이 있었는데
이 생애 계산을 다 끝낸 사람처럼
어느새 너의 세계는 차갑고 고요했다

남긴 말이 없음을 그곳에서 알았다
후회와 혼돈은 내 몫으로 남겨둔 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모른 채 또 헤어졌다
--- 「너의 장례식」 중에서


남자들이 널 보면 지루해할 거야
오래전 친구한테 이런 말을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서 그때가 떠올랐다

방학이 끝날 무렵
살구나무 아래였다

살구를 가르면서 나는 곰곰 생각했다
이렇게 둥근 것들의 영원성에 대하여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바람은 불어왔고
커다란 살구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노랗게 익은 살구는 바닥에서 뒹굴었다

세상에 없는 것처럼
친구는 떠나갔고

나는 가끔 지루해져
친구를 생각했다

살구가 살구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 「살구」 중에서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새벽 세 시 아니면 두 시, 총알같이 날아갑니다 웃지 않아도 되는 밤입니다 어둠 속의 발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군요 오래전 어떤 당신도 알아볼 수 없겠습니다 이제 립스틱 색깔은 더 이상 연구 대상이 아닙니다 모르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모르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모르는 사람이 되어 끝맺음을 야기하고

우리의 흐느낌은 의외로 단순한데

총알이 날아옵니다 생존은 각자도생이라 했나요 자신의 날개로 끝내 날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이제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진으로 오래도록 어떤 가슴에 걸려 있겠습니다 늙고 싶어도 늙을 수 없는 어떤 사람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벗으면 무섭다고 합니다 얼굴은 보여줄 수 없습니다 벌써 당신은 도망가고 있군요 그래도 살아 남자는 고객님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되도록 멀리서 서로를 자극합니다

--- 「배송」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 시집에 나오는 시들의 제목은 대부분 명사형이다. 인은주는 사물에 붙여진 낡은 이름들을 건드려 시의 종(鐘)을 울린다. 그녀가 낡고 관습화된 세계를 건드릴 때, 마치 요술처럼 새로운 서사들이 튀어나온다. 마술사의 보자기에서 갑자기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처럼, 그녀는 클리셰를 흔들어 새로운 것들을 쏟아낸다. 그녀의 은유는 이름 바꾸기가 아니라 형태 바꾸기(morphing)이다. 그녀가 낡은 이름들을 소환할 때, 그것들은 내러티브로 바뀐다. 그녀는 짧은 음절의 명사들을 상징적 이야기로 바꾼다. 그것은 영화의 미장센 같기도 하고, 소설의 클라이맥스 같기도 하다. 그녀가 낡은 이름의 소쿠리에 상상력의 콩주머니를 던질 때, 무수한 이야기의 색종이들이 쏟아진다. 그 빛은 새로운 은유의 탄생을 보여주는 숲 같다. 그녀의 시를 읽는 것은, 호기심을 가득 품은 채, 이름만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 두터운 은유의 숲을 만나는 행위이다. 그 숲은 때로 죽음으로 무겁고 사랑으로 숨 가쁘지만,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하다. 그는 만 가지 이야기를 가능한 한 짧은 서사의 상자에 담는다. 그리하여 단아한 시의 집에 큰 이야기를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그녀의 장기이다.

딱따구리 부리가 나무를 두드릴 때

슬픔은 숲에 잠겨 있다
까마귀 한 마리가 숲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슬픔을 목격하려는 나무들은 자라나기 위해 목을 키운다
밤에서 깨어난 아침이 숲길을 걷고 있다
두더지가 파놓은 구멍은 밤의 흔적으로 남아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고 있다
아침은 밤을 덮는다
숲은 나무를 포괄한다
빛과 어둠이 나무를 위협한다
죽어가는 나무와 죽은 나무 사이
벌목으로 드러난 발목들이 둥근 원을 그리고 있다
둥글게 그려진 나무들의 기호가 슬픔의 형식으로 숲을 잠그고 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찍고자 찍었을 때

그것은
예약된 슬픔

둥근 산을 깨트린다
― 「탁목」 전문

이 시의 문패는 “탁목”이다. 문을 열기 전까지 아무도 이 시의 내부에서 펼쳐질 이야기를 예견하지 못한다. 문을 열면 나무를 두드리는 딱따구리의 소리가 들리고, 멀리 고요한 슬픔의 숲 위로 까마귀가 날아가는 장면이 보인다. 이미 벌목 당한 나무들의 죽음을 내려다보는 다른 나무들도 죽음의 선로 위에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슬픔을 바라보기 위해 자란다. 슬픔(죽음)은 바로 살아남은 것들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밤과 아침, 지상과 지하를 잇는 미장센은 이렇게 “예약된 슬픔”을 향해 있다. 시인의 카메라는 딱따구리와 까마귀와 벌목 당한 나무의 발목들이 둥글게 그려내고 있는 죽음의 기호들을 따라간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경 속에 울려 퍼지는 탁목 소리는 슬픈 미래를 예기(豫期)하는 조용한 조종(弔鐘) 소리이다. 그것은 도래할 운명의 회피 불가능한 시간을 향해 째깍째깍 울린다. 슬픈 운명은 이렇게 고요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온다.

엄마 잃은 아이는 엄마라고 불렀다
툭하면 아이는 울고 그러면 또 비가 왔다
날마다 해가 뜨기를 아이는 기다렸다
― 「빈집」 전문

“빈집”이라는 명패를 단 이 집은 비어 있지 않다. 그곳에는 깨진 가정의 서사가 남아 있다. 그것은 사라진 과거일 수도 있고, (사람이 살고 있지만) 빈집이나 다를 바 없는 황량한 현재일 수도 있다. 아이는 툭하면 울고 그럴 때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없는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빈집”은 어둡고 처량한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인은주 시인은 이렇게 몇 음절 안 되는 낡은 보통명사에 내러티브의 은유를 덧씌운다. 그녀가 펜 끝을 놀릴 때, 명사는 구절이 되고, 구절은 문장이 되며, 문장은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그녀의 스토리가 산문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기승전결의 구조를 완전히 박살 내기 때문이다. 그녀의 서사는 압축된 한 장의 컷(cut)이다. 그녀는 간략하게 잘라낸 하나의 풍경만을 보여줌으로써 그 안에 더욱 많은 이야기를 담는다. 시의 언어가 침묵의 웅변이라면 인은주의 시가 바로 그러하다.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 시인의 말

할 수 있는 말보다 할 수 없는 말이 많았던 날들이었다.
나를 확인하기 위해 아름다운 문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사이였다.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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