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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이기호
케이크 손 발문 조예은 피와 살로 만든 케이크, 그 위에 선 파티셰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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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때로 현재형으로 쓰이는 문장들이 과거로 굴러떨어지는 날을 상상한다. 에베레스트산의 끄트머리가 움푹 파이거나 안혜리와 내가 갈라서는 날, 그래서 오랜 기억을 돌이킬 필요가 없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본다. 그러면 나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 p.10 그때는 세 마디 이상의 문장을 만드는 법을 몰랐고 머리를 얼마나 자주 감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엄마 티셔츠와 원피스의 차이마저 몰랐다. 내가 아는 건 옷이 더러워지면 대야에 넣고 물을 받아야 한다거나,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 있는 걸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면 된다는 것뿐이었다. 선생의 말을 듣지 않은 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짜증을 내거나 싸움을 벌이고 다닌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 p.31 남자는 추하고 해롭고 역겨운 걸 철저히 싫어하는 사람들, 그런 걸 눈앞에서 완전히 치워버리려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빚진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각자의 사정이 불공평한 까닭에 외면하고 묵인하고 모르기로 마음먹는 데에서도 이득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그들의 이득은 깨끗함을 유지하는 상태 그 자체라고 했다. --- p.109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나는 이 나이에 돈 한 푼 못 버는데 정신까지 나간 남자고, 넌 그런 남자 집에 드나드는 불우한 여자애야. 한밤중에 개처럼 짖고 다니는 걸 보면 제정신도 아니야. 지금까지는 내가 고양이 죽이는 이야기를 했으니까 이번에는 네가 애들 때리는 이야기를 해보자. 그게 바로 페어플레이 아니겠니.” --- p.115 아이들의 세계만을 논하자면, 내가 윤서래의 갈비뼈를 부러뜨린 건 계산할 필요가 없는 세목이었다. 박경수 같은 애들에게 얻어맞는 건 합당한 정산이겠지만 윤서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왜인지 갚을 필요 없는 빚을 갚아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진실로 정리할 빚도 있는 것 같았다. --- p.185 나는 안혜리를 떠났고 안혜리도 나를 보내주었다.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여전히 얼굴을 분간할 수 없는 아이들 너머에 김은아가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나는 그 애를 껴안고 안혜리에게 했던 것처럼 입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여기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그러고자 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을 테고, 그 애들과 나의 관계는 안혜리와의 기억에 비하면 미미했다. --- p.191 언젠가 남자를 다시 만날 때 피하지 않으려면 이 정도가 딱 알맞아서, 그리고 남자에게서 본 것을 남과 나누기 위해서는 계속 살아가야만 해서, 나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옥상에서 내려와 집으로 가는 길을 밟기 시작했다. --- p.197 |
중학교 3학년인 나, 현수영은 소위 업소에서 일하는 엄마와 줄곧 변두리 원룸촌에서 살아온 선머슴 같은 여자아이다. 엄마는 남자친구의 설득으로 나를 낳았지만 엄마의 남자친구는 내가 태어난 후 1년 반이 지나자 잠적해버렸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해 나는 어릴 적부터 이렇다 할 보살핌이나 훈육을 받지 못한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어디에 있든, 어디에 가든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소외된 존재가 됐다. 나는 또한 학교 친구 안혜리의 개이자 일종의 남편, 그리고 행동대장이다. 안혜리는 자신을 따르는 무수한 학생들을 거느린 ‘노는’ 세력의 우두머리다. 어느 날, 살아 있는 생물체를 손으로 만지면 그 생물체가 케이크로 변하는 남자를 우연히 알게 되고 그가 살아가는 세계에 발을 들인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부정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전환점이 된다. 나는 케이크 손에게 비로소 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고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한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날갯짓을 시작한다. 힘들고 아프고 비참한 과정 속에서 그것을 딛고 일어선 세계는 더럽고 추한 것들에서 아름답고 평안한 것들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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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가 아무리 달콤하다 한들, 누군가는 죽는다.”
어떤 죽음이 곧 나의 생존과 연결되는 기묘한 세계 빛과 그림자, 불행과 행복 사이에서 단요 작가가 그려내는 지금 이 시대의 방정식 『케이크 손』의 “세상은 악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고통뿐만 아니라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고통으로도 가득 차 있다.” 업소에 나가는 엄마를 둔 나(현수영)는 마땅히 받아야 할 보호를 받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채 열여섯 해를 살아왔다. 나를 조종하는 안혜리의 뜻에 따라 같은 반 학생들을 ‘개’라고 부르며 투견처럼 싸움을 붙이고 또 싸움으로 상대를 폭행한다. 나는 ‘악인’ 혹은 ‘기인’이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탈선을 막으려는 사람들에게 ‘배제당하는’ 존재다. 그런 나를 안혜리는 아름다운 눈동자와 막대한 애정으로 품어준다. 나뿐만이 아니다. 미성숙하고 외로운 아이들이 안혜리가 창조한 비좁고 기묘한 세계 속에서 갇혀 산다. 나는 안혜리의 다양한 쓸모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것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남자는 ‘외부’의 기준으로 정상의 범위에 속해 있었지만 맨손으로 만지는 모든 생물이 케이크로 변하는 저주에 걸렸고 나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다. 남자는 주기적으로 케이크를 만들지 않으면 신체적인 고통에 휩싸인다. 그런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쥐와 길고양이를 케이크로 만들면서 혼자 고립되어 살아간다. 어떤 죽음이 곧 생존과 연결되는 이율배반의 세계 속에서 그 남자의 인생은 그렇게 ‘추락했다’. 나는 그 남자의 곁에 머물며 ‘앞뒤가 맞지 않는 방식으로 질서정연한’ 세상의 흐름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그의 고통과 선택을 지켜본다. 그리고 달궈진 손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에게 스스로를 내민다. 하지만 남자는 나를 케이크로 만들지 않는다. 그 순간, 숭고한 눈을 가진 안혜리 대신 남자가 새로운 신으로 자리 잡으며 나는 조금씩 바뀐다. 안혜리에게서 벗어나, 세상의 바깥에서 세상의 일부가 되기를 선택하며 모두를 포용하고, 미래를 생각한다. “『케이크 손』은 명백히 가해자들의 이야기”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제각기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한 가해자성은 ‘인간의 악함’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태어난 순간부터 무자비하게 주어지는 ‘조건의 악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 소설은 말한다. 타인의 고통과 괴로움을 양분 삼아야만 자신이 생존할 수 있다는 조건에 처했을 때, 다시 말해 타인의 고통과 스스로의 고통을 저울질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인간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그런 상황에서 자의적인 선택이라는 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러한 불가피성을 우리에게 다만 보여줄 뿐, 면죄의 가능성을 섣불리 설파하지는 않는다. “악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고통”과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고통”은 그 결과만 놓고 봤을 때 그리 다르지 않다는 불편한 사실까지도『케이크 손』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렇듯 단요 작가는 “매끄러운 세상의 피부를 손수 벗겨내고 그 아래의 흉측한 레일들을 누구보다 세심히, 오래 들여다본다.”(조예은) 모두가 “좋은 것을 원하지만 모두에게 좋은 것은 불가능”하기에, 누군가는 모두가 꺼려하는 지점에서 살아간다는 진실. 이러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 『케이크 손』에 대하여 이기호 소설가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지금 이 소설이 무섭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말 세상은 악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고통뿐만 아니라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고통으로도 가득 차 있으며, 두 고통의 결과는 거의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케이크 손』은 명백하게도 가해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가해자들의 사정을 상상하는 작업은 대개 옹호론으로 흐르기 마련이고, 그래서 현실에서는 다소 터부시되기 마련입니다만, 픽션의 존재 의의는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이 글에 비겁하거나 그른 면이 있다면, 그 비겁성은 아마도 남자가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선량하며 유능했다거나, 주인공이 눈에 띄게 영리하다거나 하는 대목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
좋은 소설은 읽다 보면 수많은 미지함수와 변수를 만나게 되고 꿈꾸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작가 단요는 우리 시대의 특별한 방정식 설계자다. 그가 만든 방정식의 답을 구하기 위해선 항상 그 반대편에 우리 자신을 대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지금 이 소설이 무섭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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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매끄러운 세상의 피부를 손수 벗겨내고 그 아래의 흉측한 레일들을 누구보다 세심히, 오래 들여다보는 작가다. 이제 나는 단요 작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그의 이야기는 깊은 우물 같다. 계속 파고 들어가면 야금야금 맑고 달콤한 샘물이 고인다. - 조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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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관계들의 부조리함에 가담한 수영을 탓할지도 모른다. (……)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고, 그러한 현실의 문제들에서 소외된 이들이 결국에는 자기 인식과 인정을 찾아가 닿는 모습은 오히려 틀에 박힌 정답과 이상향을 내세우는 어떠한 형태보다 더 와닿는 지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거기에 환상적인 케이크 손이 등장한 것은, 막막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틀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다. - 이지용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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