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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너에게 닿을 수 없는 말 13/4F 14/반성 혹은 변명 16/방 18비 오는 밤 20/길 21/유리알 유희 22/콤프레샤 24/나침반 26/물꽃 28/주럽 30/사계 32/도서관에서 34/그래서 오늘은 웃었다 36 제2부 꽃 39/꽃향기에 대한 기억 40/우리 심장은 아직, 뜨겁습니다 42/잣눈 내린 아침 45/상사화 꽃대는 더디 올라왔다 46/웃고 있는 꽃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48/가지치기 50/쉬야, 응가 51/흡혈 공화국 52/독불장군 54/꽃밭에는 꽃들이 55/장마 56/침묵의 봄 58/안전제일 60 제3부 공생 63/씨눈 64/초록, 물들다 66/각인 67/꽃반지 끼고 68/달이 품은 저수지 70/꽃의 발견 71/누리장나무에 대한 오해 72/모래무덤 74/밤송이 76/수당(水塘) 77/또 다른 시작점 78/시월이 80/하나의 작품이 되는 82 제4부 오랜 사랑 85/맏이 소나무 86/작은마의 품 88/석벽 90/종인 우매 92/검룡소 가는 길 94/허세 95/원해(遠海) 96/어떤 사랑 98/허공에 띄운 편지 100/닛사나무 아래 102/철없는 날개 104/한 여자 106 해설 백인덕(시인) 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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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이 막 발급됐을 무렵의 수업시간
인왕산으로 쫓겨 올라가던 그들이 내겐 영웅으로 비쳤다 병아리 혓바닥 같은 4월 까마귀들이 에워싼 신촌역 Y대 주변 같은 반 친구들과 가출 소녀들처럼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몇 바퀴 돌다가 검문에 걸려 파출소로 서대문경찰서로 넘겨졌다 집회 장소에 집결하지 못하고 주변만 서성이던 양심은 그래도 히득댔다 자술서엔 고등학교는 졸업해야지 하는 알량한 계산을 적어 넣었다 대학 시절 노래패로 문선대 활동을 하며 시위 대열에 합류하곤 했는데 눈물 콧물 흘리며 따라 뛰다가 까마귀 떼에게 머리통 터지도록 두들겨 맞는 사람을 보며 대열에서 슬쩍 빠져 전철을 타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수감된 친구에게 사식 한번 넣어주지 못했던 미안함도 빠른 결혼과 시어른 모시고 산다는 생활을 무기로 얼버무렸다 지금은 아련한 과거의 일들이지만 여전히 생각 따로 생활 따로 부끄럽긴 마찬가지 뜨겁게 살아 있어야 할 정의나 진실 앞에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며 부끄럽게 위안하는데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언제쯤 하나 될까 싶지만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비겁한 짐승이 내 안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오늘도 핑계를 만들어낸다 --- 「반성 혹은 변명」 전문 드넓은 초원의 풀 마르지 않는 샘 처음도 끝도 없는 길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났고 기차를 타고 아주 떠나버린 안나 카레니나 길안(吉安)에서 택시를 잡아타지 못한 시인 장정일 모터사이클을 타고 혁명의 깃발을 펄럭인 체 게바라 자유로운 영혼 조르바 자기만의 방이 있는 버지니아 울프와 자분자분 함께 걷다 보면 어느새 나는 사막을 걷는 연금술사 겁 없이 바다를 나는 나비 수레바퀴 아래에서 어느 샐러리맨의 죽음을 목격하고 결국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달린다 오늘도 한 송이 장미를 위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내게도 편지를 배달해 주기 바라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뒤적인다 --- 「도서관에서」 전문 꽃을 보려고 풀을 뽑는다 연지곤지 바른 광대나물 햇님 따라 노랗게 웃는 괭이밥 살랑살랑 실바람에 낭창거리는 냉이꽃 하늘하늘 꽃마리 무더기로 꽃을 피운다 꽃을 보려고 꽃을 뽑는다 뿌리째 뽑혀 나가는 잡꽃들 머리채가 휘감겨 들려지는 나 --- 「꽃」 전문 사랑에 대한 달콤한 말은 아름다운 옷을 입지만 때론 바꿔 입기도 벗어버리기도 한다 아버지는 한 여자를 위해 모두를 버렸고 어머니는 돌도 안 된 젖먹이를 두고 모성을 버렸다 다행히 할머니가 책임을 떠안으셨는데 몸져누운 할머니의 병시중을 들며 죽음까지 보게 된 초등학교 6학년 너무 어리고 철없어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나쁜 마음을 먹기도 했는데 그것이 죄스러워 무딘 칼로 손목을 긋기도 했다 별들이 무더기로 떨어진 지 1년 참사 1주기 추모식이 끝나고 대형 스크린에 차례차례 올라온 앳된 얼굴들 웃고 있는 꽃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진상규명도 재발방지대책도 책임자 처벌도 국가는 어느 것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으니 사랑이 아니다 이불 밑 활갯짓 분노밖에 할 수 없는 미안한 마음 담아 159개의 조화(弔花)를 보내며 꽃들의 명복(冥福)을 빈다 --- 「웃고 있는 꽃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전문 할아버지 87세 할머니 82세 오늘도 나란히 배드민턴장으로 오신다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이 오다리로 오신다 반 백년 넘어 한 백년 향한 부부의 랠리 톡, 탁! 톡, 탁! 힘주어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잘 받아내고 잘 쳐올리라고 셔틀콕 깃털처럼 가볍게 힘 빼며 친다 간간이 들리는 추임새가 아침을 연다 --- 「오랜 사랑」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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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엿보기
세상은 그렇다, 혹은 원래 그런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되새기는 이 명제는 단순 긍정의 언표로 보인다. 하지만 화자의 이중적 태도가 감지된다. 세상을 나의 바람대로 만들 수 없다, 나의 힘으로 바꿀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 확실해 보이는 이 사실을 호락호락 수긍하지만은 않겠다는 것이다. 이때 발화에 배어나는 자조적 뉘앙스야말로 자기의 무력감을 표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아직 세상에 함몰하지 않았다는 비의(秘義)를 함축한다. 세계와의 불화는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된다. 지난 세기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이 우리의 바람과 일치하게 만들고, 바람직하지 않은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 서로 힘을 모으고 함께 노력하는 것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렇다, 그람시의 주장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유일한 해법을 제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의 투지와 연대가 발휘하는 힘에 대한 이 낙관적 신뢰는 지난 세기가 역사의 시대이기에 가능했던 꿈이었을 것이다. 그나마도 그람시 자신이 세상 일반과 다르게 생각했다는 이유로 갇힌 감옥에서 사유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 있었기에 더 큰 울림을 갖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기원이나 계보와 관련하여 묻는다면, 누구도 자유의지의 최종 심급인 절대정신의 부재로 인한 역사의 종언을 부정하기 어렵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고착, 대중매체의 확산과 정교화에 따른 대중문화의 일상화. 오늘 우리 시대에는 파편화된 개인이 검은 유령처럼 몰려다니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언제, 어디서든 대체 가능한 모듈(module)이 되어 접속되거나 차단될 뿐이다. 파편은 떨어지거나 깨진 전체를 상상할 수 있다. 이 상상의 힘을 통해 본래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계기(motive)를 형성한다. 하지만 모듈은 자기 복제가 곧 전체의 형성이기 때문에 기원이나 계보를 갖지 않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수시로 밀려오는 물결에 따라 떠오르거나 가라앉는 운동의 반복이 역사를 대체한다. 이렇게 존재는 다 익명성의 바다에서 익사한다. 강수경 시인이 드러내는 세계와 불화하는 자아의 실존적 고뇌는 ‘자기만의 방 한 칸’이라는 개인적 희망과 “아픈 손가락들을 위해/집을 짓는”(「시인의 말」) 당위의 사이, 틈, 뜻대로 좁혀지지 않는 간극(間隙)에 위태롭게 걸쳐 있다. 오늘은 어제가 되었고 그래서 오늘은 웃었다 어떤 날은 화창했으나 오후엔 흐렸고 저녁엔 잠시 붉은 노을이더니 밤에는 비가 내렸다 새벽엔 잦아진 빗물이 우수관에서 작은 곤충들의 날개 비비는 소리를 내고 아침엔 안개로 피어올랐다 모든 것들이 어디론가 숨어버린 밤 사람들은 익명성을 바랐고 숨은 것들을 찾느라 기억의 해마를 뒤졌다 잠을 이루지 못한 은행잎들은 보도블록에 노랗게 실신했다 로또는 맞지 않았고 사람들은 한 끼 밥보다 희망에 돈을 걸었다 기다리던 소식은 번번이 부러지고 부러진 소식 모아 불쏘시개로나 써 볼까 불화하는 오늘은 벌써 어제가 되었고, 그래서 오늘은 웃었다 - 「그래서 오늘은 웃었다」 전문 표제작인 이 시는 ‘자연/인위’의 대립을 통해 인과적 접속사인 ‘그래도’의 의미를 되묻는다. 그 물음의 끝에는 현존재의 유일한 거소(居巢)인 ‘오늘’에 대한 회의가 자리한다. “어떤 날은 화창했으나 오후엔 흐렸고 저녁엔 잠시 붉은 노을이더니 밤에는 비가 내렸다 새벽엔 잦아진 빗물이 우수관에서 작은 곤충들의 날개 비비는 소리를 내고 아침엔 안개로 피어올랐다”라는 진술은 가치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 관찰의 결과다. 무작위로 형태가 변한 것 같지만, 흐리고 붉다가 비가 내리고 안개로 피어오르는 현상은 우리 눈이 포착하지 못하는 원인과 결과, 혹은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반면에 작품의 후반부, ‘익명성’을 바라며 ‘기억의 해마’를 뒤지는 사람들의 행위는 “로또는 맞지 않았고 사람들은 한 끼 밥보다 희망에 돈을 걸었다 기다리던 소식은 번번이 부러지”는 것처럼 이유 없이 좌절한다. 누군가는 ‘운’ 혹은 ‘통계적 확률’을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행위는 인과론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근대 이후 계몽의 기획이었다. 게으른 자는 가난하고,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자만이 그 결실을 따먹을 수 있다. 새삼 거론하기도 버겁지만, 이 논리는 선행 조건이라는 변수가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상관관계를 인과로 오역(誤譯)할 때 흔히 발생하는 인식적 기만이다. 어제는 그저 지나갔기에 오늘에는 오늘 몫의 희망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무작정 품게 한다. 시인은 이 사실에 회의를 드러낸다. “불화하는 오늘은 벌써 어제가 되었고, 그래서 오늘은 웃었다”라는 선언에서 ‘그래서’는 인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불화하는 오늘’이 ‘어제’란 이름으로 ‘오늘’을 잠식한다는 것을 이면의 논리로 드러낸다. 따라서 이때의 ‘웃음’은 세계를 향한 화자의 이중적 태도를 온전하게 포함한다. - 백인덕(시인) 시인의 말 아픈 손가락들을 위해 집을 짓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겐 집을 가질 권리가 있고 내겐 그럴 의무가 있다. 2024년 5월 강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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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경의 시는 서정(抒情)이라는 바탕 위에 쌓아 올린 유리성 같다. 자연을 자연이라고 말하고, 사람을 사람이라고 있는 그대로 말한다. 꾸밈이 없다. 언어를 비틀지도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깊다. 너무 깊어서 오히려 투명하다. 그 투명의 힘으로 불화를 꿈꾸지만, 그것은 시인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불화하는 오늘은 벌써 어제가 되었고, 그래서 오늘은 웃었다”(「그래서 오늘은 웃었다」)라는 진술에서 보듯이 낙천적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불의와 타협하지는 않는다. 강수경은 “영정도 위패도 없는 거짓분향소/조문도 조의도 없는 검정 리본”(「우리 심장은 아직, 뜨겁습니다」)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뜨거운 이성의 소유자이자, 탈탈 털려버리기만 하고 “맥없이 끝나버린 화상 면접”(「콤프레샤」)에 좌절하는 소시민이기도 하다. “꽃을 보려고/꽃을 뽑는”(「꽃」) 아둔한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강수경의 자세야말로 진짜 시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고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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