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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다국적 13/Delete 14/거울의 뒷면 16/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후 18/아직 살아야겠으니 19/그 女子의 집 20/소문 22/아무도 그녀를 열지 않는다 24/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 25/검은 민들레 26/떠날 준비 28/우리의 관계 30/전봇대 32/그린 아파트 34 제2부 달력은 간다 37/무례한 생각 38/모노드라마 40/나의 비니 42/모래와 나방 43/차갑지 않다 44/모래의 날들 46/밥이 되는 동안 48/뱀꿈 49/안개주의보 50/프로필 사진들 52/지구 계약서 53/모델하우스 54/집으로 56 제3부 내 마음속 빈집 59/보라의 둘레 60/강물 전시관 62/단풍 63/나비의 춤 64/능소화 기다리는 남자 66/다육이 68/꽃비 속에 우두커니 70/또아리굴 71/모래 여관 72/맨드라미 74/문득, 75/무료 사진 촬영권 76/몽골 초원에서 78 제4부 산세비에리아 81/선인장 꽃 82/일기예보에 진눈깨비는 없다 84/타종 86/포스트잇 87/알프스의 쪽배 88/처서 90/출구에 대하여 91/태풍이 지나갔다 92/폭설 94/한로(寒露) 96/소란 97/호랑거미 98/오늘의 기도 100 해설 임지훈(문학평론가) 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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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모인 사람들이
다국적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저녁 7시 종합뉴스 속에서는 아프간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우고 뮌헨에 사는 아들은 페이스 토크를 하고 일본에 사는 딸은 일본식 원피스를 재단하고 나는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아, 라는 문구를 두드린다 조금 더 일본적이고 조금 더 독일적인 가족 사이가 가까울수록 멀어지는 화면 속에서 우린 서로 한국적이기를 바라면서 다국적이 된다 --- 「다국적」 전문 계단은 숨겨진다 더 높은 세계를 위해 제 역할을 잊은 지 오래되었다 날고 싶다 가끔 천장이 현기증을 일으키고 바닥이 튀어오른다 오래전 엘리베이터로 밀려난 계단은 비상구로 통하는데 자신을 통과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오거나 느리게 지나는 여유를 만난다 어두워지기 전이다 헤어지는 연인들의 다툼도 지켜보며 감정과 상관없이 꼼짝 못하고 서 있다 계단은 늘 오르려 한다 수직의 길은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갈 곳이 없다 그냥 놓여 있다 계단은 궁금하다 내 안의 일이거나 바깥의 일이거나 들릴 듯 말 듯 소리로만 느끼고 있다 꼭 있어야 하는데 쓸모는 별로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후」 전문 어느 방향으로 몸을 돌리든 우리는 바뀔 것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목적지를 정한 것도 아닌데 세 번째 출구는 왜 세 번째 출구에만 있나 나는 보이는데 너는 보이지 않는다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기다린다 같은 방향을 가면서도 서로 꿈이 다르듯 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 모르는 사람처럼 만날 것이다 --- 「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 전문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행성 사이에서 잠이 들었는지 별이 쏟아진다 한 줄로 요약할 수 없는 별의 생애들이 마침표도 없이 쏟아진다 단어와 문장을 건너 당신을 만난다 당신은 갈등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책장을 덮는다 나를 덮는다 화려한 표지만 남고 우리의 관계는 타버린 별의 생애처럼 책 속에 묻힌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결론을 향해 --- 「우리의 관계」 전문 달력은 간다. 반 뼘만큼 한 뼘만큼씩 간다. 검은색 옷을 입고 간다. 파란색 옷을 입고 간다. 빨간색 옷을 입고 간다. 달력이 달력에 묶여 간다. 발바닥이 닳도록 간다. 유령을 달고 간다. 납작한 몸뚱어리로 달력은 간다. 넘겨지고 접히고 찢기며 달력은 간다. 속박에서 속박으로 간다. 독거에서 독거로 간다. 달팽이만큼씩 간다. 시드는 꽃잎만큼 간다. 쉬어 갈 자리는 없다. 가야 한다, 징검다리 건너듯 성큼성큼 간다. 바람을 제치고 구름을 뚫고 간다. 세상이 구겨지고 있는데 달력은 간다. 세상이 구겨져도 간다. 끊이지 않는 강물처럼 간다. 유령 손을 잡고 간다. 이사를 가도 달력은 간다. 모른 척해도 간다. 달력이 가는 곳을 아무도 모른다. 거처는 있으나 누구도 거처에서 달력을 본 이는 없다. 달력의 연대기를 본 이는 아무도 없다. --- 「달력은 간다」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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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엿보기
오늘 우리가 마주한 서이령의 시집, 『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에서 시인은 무언가에 깊이 탐닉한 주체를 내세워, 우리로 하여금 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차갑고 무정한, 파편화되어 흩날리는 동시에 주체를 진득한 기억의 늪으로 빠뜨리는 이 세계는 우리와 동일한 객관적 세계이면서 탐닉하는 주체에 의해 주관화된 세계라는 점에서 이채로움을 발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의 시적 세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주체의 눈에 의해 세계는 어떻게 의미화되는가. 그리고 이 말은 그의 세계가 쉽사리 요약될 수 없는 감정과 감각, 이를테면 사랑의 편린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순적인 요약(불)가능성을 파고들기 위해, 우리는 다음의 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꽃, 메시지 그리고 너 소낙비가 내리는 창문이 그리워져서 눈을 감는다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네가 왔다 가는 것이 보이지만 문을 열면 무너질 것 같아서 (삭제)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너 먼 곳에 사는 너 한잔할래 허공에 잔 부딪치는 소리 들려 마음을 보여주겠다고 환하게 웃으며 내놓았던 꽃다발 (삭제) 하현달처럼 기울어가는 너 꽃잎 시들다가 떨어지고 있는데 기다리는 것도 한자리 술잔을 채우는 것은 찌르레기 울음소리로 남고 (삭제) 기억 속에 있는 너 술잔 속에 비친 나를 건져 올려 보아도 잊지 못하겠지 너를 (삭제) 지워도 지워도 다시 그 자리 ― 「Delete」 전문 직설적인 화법이 부각되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연물과 언어, 그리고 탐닉의 대상을 하나의 문장에 나열하며 시를 시작한다. 시는 그러한 나열과 상관적으로 자연물-언어-대상의 연쇄를 통해 정서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마치 화자가 지닌 기억 속의 편린인 것처럼 느껴지는 각각의 연은 개별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이 이미지들은 서사적으로는 연관관계가 없음에도 정서적인 유사성을 통해 마치 한 사람의 이야기인 것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화자는 이러한 이미지의 연쇄 속에서 거듭 “(삭제)”를 해나가지만, 이는 결코 완결되지 않으며 시 또한 끝나버리고 만다. 아마도 이 시를 읽은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화자의 삭제라는 행위가 계속해서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지워도 되살아나는 기억 속에 놓인 화자, 이것이 바로 이 시집을 관통하는 화자의 공통 속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는 이처럼 지울 수 없는 기억, 혹은 과거가 되어버린 사랑의 현실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며, 그러한 고통은 화자로 하여금 자신의 눈에 비친 모든 사물을 그러한 사랑과의 연관관계를 통해서 의미화하도록 만들고 있다. 예컨대 시에 등장하는 사물의 명칭들, “소낙비”, “창문”, “빛”, “문”, “잔”, “꽃다발”, “하현달”, “꽃잎”, “찌르레기”의 울음소리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객관적 현실 속에 위치한 사물들 그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이야기이다. 왜 그런가? 주체의 현실 속에서 그러한 사물은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너’와의 연관관계를 통해서만 그 의미가 부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현실의 틈새, 서이령의 시가 파고들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의 시는 어렵지 않은 일상어를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되, 간혹 독특한 시적 정서를 전달하거나 혹은 일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통용되는 시어가 존재하곤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그가 제시하는 언어들로부터 객관적인 현실과의 여집합적 의미를 감각하게 되고, 그 여집합을 통해 주체가 놓인 현실의 아스라한 통증 또한 동시에 감각하게 된다. - 임지훈(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정오를 건너면서 떠날 준비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보내면서 붙잡아본다. 눈물을 삼키면 신물이 올라온다. 입이 마르고 몸이 떨려도 당신은 안아줄 몸이 없는 사람 하루를 꼬박 앓고 저녁이 왜 붉게 물드는지 알게 되었다. 노을에 누운 사람은 아름답다. 2024년 5월 서이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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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만 끝내 만질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사랑이란 어쩌면 시인의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은/안아줄 몸이 없는 사람”을 바라보며 “노을에 누운 사람은 아름답다.”(「시인의 말」)는 고백은 서이령의 시적 복무가 가시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이령 시인의 시적 육박은 내면화된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루 속에서 물줄기 기다리는 콩나물/목구멍에 배어드는 푸른 핏줄/검은 보자기 뒤집어쓴 채/혓바닥으로 핥는 욕망”(「오늘의 기도」)과 같은 육탄의 묘사는 비극적 세계 속에서 생명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머리는 잘려나갔는데도/생각의 뿌리는 계속 자란다”(「오늘의 기도」)는 진술은 시인으로서 자의식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가 없는데도 자라나는 생각의 뿌리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 그로테스크한 장면이야말로 서이령 시인이 도달한 시적 현장이 아니겠는가? “어느 방향으로 몸을 돌리든/우리는 바뀔 것이다”(「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는 고뇌에 찬 결의는 그의 시를 더 먼곳으로 이끌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더 춥고 쓸쓸한 곳에서 부르는 서이령 시인의 노래를 듣게 될 것이다. - 우대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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