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파비안
작품 해설 |
Erich Kastner
에리히 캐스트너의 다른 상품
전혜린의 다른 상품
|
거리는 야시장 같았다. 집의 정면은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칠해져 있어서 하늘의 별도 얼굴을 붉혀야 할 정도였다.
--- p.7 파비안은 손수건을 꺼내서 얼굴의 붉은 얼룩을 닦았다. 넥타이는 비뚤어졌고, 머리가 쑤셨다. --- p.15 여기 길바닥에는 사람들이 산책하면서도, 벽 하나 사이에서 어떤 광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조금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p.21 파비안은 편지를 집어넣고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는 여기에, 전에는 셋방을 빌려줄 필요가 없었다는 홀펜트 부인의 낯설고 쓸쓸한 방에 앉아 있는가? 왜 그는 집에, 어머니 곁에 있지 않는가? 여기에, 이 도시 속에서 이 미쳐버린 돌궤짝 속에서 그는 무엇을 찾는 것인가? --- p.51 “이 세상이 올바르게 될 가능성을 가졌는가를 바라보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내가 아까 말한 것은 다만 절반만 진실이었어. 내가 이렇게 헤매고 있는 것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 나는 돌아다니면서 또다시 기다려.” --- p.69 파비안은 그루네발트 별장에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한 집들이 소비하고 있는 사치를 그는 쑥스럽게 느꼈다. 그는 그와 같은 사치 속에서 사람이 잠깐 방문 온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 p.91 파비안은 문간에 서서 돈이 아직 있나 알아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고는 생각했다. ‘나는 어찌 될 것인가?’ 그러고는 그는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산보를 하기로 했다. --- p.129 “내 돈의 절반은 규칙적으로 구직서를 쓰는 데 달아나버립니다. 우표가 필요합니다. 발신 우표가 필요합니다. 나는 서류를 일주일에 스무 번이나 써야 하고 증명해 받아야 합니다. 아무도 서류를 다시 돌려주지는 않습니다. 대답조차도 못 받습니다.” --- p.149 그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그가 자기 돈으로 산 유일한 옷이었다. 일생 동안 어머니는 그를 위해 애쓰고 절약했던 것이다. 그것이 결코 끝나지 않아야 한단 말인가? --- p.160 계단 위의 인간들은 몸을 길게 펴고 누웠으나 계속해서 훔쳤다. 총소리가 탕탕 울렸다. 사람들은 남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죽었다. 계단은 시체로 덮였다. --- p.181 “내가 보다 많은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됩니까?” --- p.189 그는 길을 건너서 공원으로 들어갔다. 도덕이야말로 최선의 신체 위생이었다. 옥시풀로 양치질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았다. --- p.215 갑자기 그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는 뒷방으로 가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닫고는 창가에 앉았다. 그는 마당을 내다보다가 머리를 창틀에 얹고 울었다. --- p.257 파비안은 물에 빠져 죽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헤엄칠 줄을 몰랐던 것이다. --- p.283 |
|
자조적인 위트와 지독히 날카로운 풍자로 고발한
사회의 허위성과 그에 대비되는 한 인간의 순수한 영혼 작가에게 반나치 작가라는 ‘낙인’을 안겨준 문제작! 『파비안』은 세계적인 아동 문학가 에리히 케스트너가 1931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1933년, 나치는 ‘파괴적이고 부도덕한 정신 상태’를 보인다는 이유로 그의 책을 소각하고 금서 처분했다. 『파비안』은 불안과 동요로 가득 찬 1930년대의 베를린을 무대로 하는데, 모든 국민에게 ‘희망찬 세계’의 전망을 주입하고자 노력한 나치에게 케스트너가 포착한 동시대의 혼란은 치명적인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파괴적이고 부도덕한 정신 상태’라는 낙인과 그 낙인을 거스르는 『파비안』의 운명 소설의 주인공 파비안은 어느 평범한 회사원이다. 파비안은 베를린을 배회하며 온갖 것을 체험한다. 당시 대도시는 인간에게서 영혼을 뽑아버리는,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 소모하는, 빠져나오려는 모든 시도가 무위에 그치는 거대한 소용돌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작품의 문제의식이 자연스레 솟아난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자 도덕가인 파비안이 과연 불안으로 가득한 베를린을 샅샅이 경험하고도 여전히 그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물음 말이다. 사방에서 부패와 부도덕, 악과 몰락이 손짓하는 대도시에서 파비안은 영혼을 가진 사람, 즉 도덕가로서 온 도시를 미친 듯이 헤맨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우울에 사로잡혀 체념적 방관자로 도시를 배회하다 결국 한 소년을 구하고 자신은 죽음을 맞이한다. 이 결말은 도덕가인 파비안의 영혼이 시대에 맞서 능동적 주체일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대도시를 배회하며 내내 혼란만을 느낄 수밖에 없던 그지만, 모든 것을 던져 소년을 구해주어 자신의 의지를 계승해 나갈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주인공 파비안의 운명은 책 『파비안』의 운명과 닮았다. 두 파비안은 각각 죽고 불태워졌지만, 다른 방식으로 계승되어 현대 문명과 파시즘의 폭력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고발하는 역할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한낮 햇빛의 직사와도 같은 눈부시게 강렬한 진실의 빛에 독자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_전혜린 파비안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잊거나 의식하지 않은 채로 행동하지 않는다. 즉, 그는 늘 깨어 있다. 늘 자기 주변을 의식하며 마음과 정신이 게으름에 빠져 폭력에 동조하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이렇게 파비안은 자기 자신이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저항하고 기록하는 주체가 되었다. 거악 앞에 홀로 선 개인은 늘 외롭다. 그래서 좌절하고 굴복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때로는 위대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금서’의 오욕을 뚫고 살아남아 여전히 읽히는 이 책이 그 증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