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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그 강에 닿았을 때 그 강에 닿았을 때 10 나는 풀입니다 11 명품 가방 14 열매 15 열매와 무덤 16 민달팽이와 책 18 나무 세상엔 화장실이 없다 20 의문 부호 22 방 한 칸 24 황소의 눈 26 비밀의 방 28 아버지 남양군도 30 제2부 모두 받아 안아주는 바다 바다 36 망초꽃 37 사랑이란 38 쌍무덤 40 事월 42 자목련 44 바람꽃 46 달빛 걷기 48 블루베리 50 사량도에서 52 명화 54 장마전선 56 그 여자 58 제3부 나무의 길, 사람의 길 무상 62 감. 11월 63 국화꽃 안부를 묻는다 64 처서 66 나무의 눈물 68 간이 정류장 70 귀로 사는 의자 72 복자기 단풍 74 산골 우체통 76 덧발 78 물걸리 80 절골 82 아내의 저녁 84 낙엽의 길 86 별에 사다리를 거는 밤 88 사과와 장미 90 달의 뒤뜰에 감빛 꿈을 심는다 92 고지전 94 제4부 뭐 하려고 살고 죽는 일은 벌어서 빙어 98 외할머니 99 글 쓰는 나무 102 용대리 먹태 104 할미꽃 106 홀로 가는 길 108 저 남자 110 가을 뒷모습 112 앵강만 풍경 114 구본결의 시세계 | 송연숙 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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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름을 걸고 살기는 하지 그런데 집 없는 책은 왜 민 책이 아니지 우리에게만 그렇게 부르는 거 차별 대우야 집 못 버린 너희들 비난할 생각 조금도 없지만 자유로부터 말해 보자면 우리가 한 수 위지 굳이 부르려면 집달팽이, 달팽이 이러는 게 맞아 뭐, 너희들이 세상을 짓는 머리 기둥이라고 그 잘난 머리, 기둥 없어도 내 삶은 괜찮아 더듬더듬 더듬거리며 살아도 내 배로 걷고 내 배짱대로 나는 살지 그래도 나 책잡히고 책 당하고 책임질 일 조금도 하지 않지 특별한 이름 없이 홀딱 벗고 살아도 태양이 눈뜨고 나를 보고 대지가 재워주고 먹여 주니 꾀죄죄한 이름 가로세로 걸어 놓고 누구 눈에 들 날만 꽂혀서 기다리는 너희들보다야 무엇으로 보나 내가 낫지 죽는 자의 말씀들 무덤처럼 쌓여 있는 책 집 앞 공터를 지나 배추밭 가는 길로 알 것만 아는 나, 신이 써 놓은 점자책 하루 한 장씩 새겨읽으면서 오늘도 느릿느릿 내 길을 간다 --- 「민달팽이와 책」 중에서 손바닥만 한 내 뒤 뜰 가을꽃들 소박한 잔치 벌였다 분홍이랄까 옥색이랄까 가을을 입고 있는 범꼬리풀꽃 고향 이웃 누나 얼굴 하나둘 깨워 내는 백일홍 고려청자 국화병 문을 열어 하늘에 낮별로 뜨는 취나물꽃 누가 뭐래도 가을의 마음이지 옹기종기 모여선 코스모스 열매 다 내주고 한해 일 끝낸 포도 덩굴 볕 속에 가만히 몸 담그고 콧노래로 노천욕을 즐긴다 십 년 아니 십오 년 조상 벌초도 드물던 구순 되신 둘째 작은아버지 북어 같은 얼굴로 찾아오셔서 너도 이제 늙었구나 늙었구나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다 빈 하늘에 그리운 길 하나 지우고 가셨다 가을은 가을이라고 가슴 속 흐르는 물줄기 이곳저곳 정(情)의 깊이를 재며 흐르다가 머리 흔들고 발길을 돌린다 흰 이슬 서늘한 이 새벽 뒤뜰은 내 살아온 날들의 허물을 씻는 세례장 부디 겉과 속이 하나 되어 비닐 천막처럼 투명한 삶이 되길 마음 한 점에도 욕심의 그늘 들지 않길 뒤뜰 툇마루에 시간을 떼어 놓고 꽃들 사이에 슬며시 끼어 앉아 참이슬 한 잔을 받아 들며 국화꽃 안부를 묻는다 --- 「국화꽃 안부를 묻는다」 중에서 이제, 축제는 모두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가을 철새가 깊어진 하늘길로 날개를 저어 돌아오면 마음이 더 넓어진 호수 가슴을 열어 하늘과 물새를 끌어안고 푸른 물 갈대 붓을 세워 궁서체로 밤새워 손 편지를 쓸 것입니다 달빛은 강물을 따라가며 춤추고 풀벌레 찬 이슬에 어깨가 젖어도 사랑 노래 초원에 출렁이면 갈꽃들 흔들리며 잠들지 못하겠죠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그렇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살은 살끼리 뼈는 뼈끼리 부딪치며 돌아가라 하시고 가슴만 남겨서 가슴끼리 사랑하게 하십시오 오직 사랑이 목숨이고 목숨이 사랑인 사랑만이 존재인 줄 깨닫게 해주십시오 나무는 입을 하나씩 버리고 길이 보이는 모든 창문을 닫아도 가을꽃은 저 언덕과 휘파람을 사랑한다고 가을의 언어로 속삭이겠죠 말해 주십시오 잔치는 열려 취한 꿈 깨어날 일 없고 사랑으로 가는 길은 끝이 없으니 이별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고 바람이 하나씩 문을 닫고 돌아가는 이 저녁에도 --- 「처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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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시를 쓰다 보면 내가 쓴 시가 나를 낯선 눈으로 응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란 무엇인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꼭 써야만 하는가 회의에 빠집니다. 내가 써서 묶어 놓은 말 한 다발이 그 어디에 있는 아픈 영혼들을 찾아가서 그 품에 안겨 꽃이 되고 노래가 되고 음악이 되어 향기를 건네는 위로가 될지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한 것을 아는 것은 병이 아니라는 노자의 말씀을 위로 삼고 꽃다발 같은 시를 쓰기 위해 끝없이 나를 채찍질하겠습니다. 2025년 여름 구본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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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조용히, 서두르지 않고, 나무의 언어에 귀 기울인다. 문장을 다 쓰고 덮는 법도 안다. 가을이 오면 나무는 “문장을 버리고” “빈손”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멈춤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구본결 시인의 나무는 세상의 아픔을 서둘러 위로하지 않는다. 급한 해명도, 성급한 위안도 없다. 그저 “그래, 수고했다” 한마디. 그러나 이 한마디가 세상에 건네는 가장 깊은 위로이자 사랑이다. - 송연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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