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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권의 어두운 밤
백인덕
시인동네 20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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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책소개

목차

제1부

모르는 사이 · 13
가라앉는 배 · 14
산중음(山中飮) · 16
우연한 아침 · 18
북극권의 어두운 밤 · 20
시 · 22
공전(空轉) · 23
종말처럼, 시작처럼 · 24
해자(垓字) · 26
바깥의 밖 · 28
지중해의 별 · 30
경험의 반란 · 32
떠오르는 배 · 34

제2부

한탄(恨歎) · 37
어떤 편지 · 38
영주 · 40
여기와 지금 · 42
어떤 출근 · 44
빨래를 널다 · 46
환 · 48
이기적인 기도 · 49
항복 · 50
붉은 여우를 위하여 · 52
막막객잔(漠漠客棧) · 54
요즘 개 · 56
에라, 봄 · 58

제3부

인동(忍冬) · 61
생의 반 · 62
덜 게운 꽃 · 64
이젠 잊기로 해요 · 66
지연(遲延) · 68
나의 멸망 · 70
행려 · 71
11월 · 72
이월 · 74
석촌사거리 · 76
난(亂) · 78
신의 저녁 · 80
구원의 이유 · 82

제4부

거룩함에 대하여 · 85
늪 · 86
뼈아픈 근황 · 88
목 · 90
동해 지나 삼척 · 92
메리 올리버를 기억함 · 94
애도의 이유 · 96
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 98
적요 · 99
기도 · 100
여전히 낯선 세계와 꽃말들 · 102
저녁의 이유 · 104

해설
깊이 웅크린 것들의 투명한 고통과 순연한 빛 · 105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저자 소개 1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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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1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25*204*20mm
ISBN13
9791158964924

책 속으로

사월의 비는 어떻게 내렸나,
복도엔 큰 웃음소리, 알루미늄 창틀에 떨어진 빗물보다 투명하게 웃던 어떤 이, 춘천의 상념과 칠판에 뒤섞인 얼굴 보았던가, 상상했었던가?

시월의 비는 누구를 때렸나,
더 가늘어진 어깨, 힘겹게 버린 책 몇 권 아직도 가슴에 두고 오르고 내리는 것, 다 생은 눈물져 비빔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먹통이었던 전화를 몇 대 때리고 파랗게나 검게 밑줄 긋는 그래도 생은 뜨거웠는데

자기만을 적시는 구월의 비,
작은 기침과 높이 올라가지 않는 왼팔, 누구는 사상을 말하고 누구는 습성을 말했지만 기침은 생득(生得)에 가까워 제대로 놓인 돌의 형태를 알지 못한다.

기침 소리 잦아들고,
아무리 힘센 바람마저 가슴을 열고, 비집고, 찢을 일 없으니 사랑은 깊어 단단한 돌, 아니 잘 부서지는 흙 한 덩이 되는 일. 오래된 미래, 스승이여!

그대 호흡은,
폐에 스미고 혈관을 흘러 가슴 깊숙이 맺힌다. 정월에는 안개만 가득하려나 보다. 사이사이 환한 미소, 간간한 기침, 들으려는 자에게는 다 들리니 맘껏 웃으며 터져도 좋겠다.
종말처럼, 시작처럼
---「종말처럼, 시작처럼」중에서

부르는 이름마다 다 춥더라.

긴 살얼음, 부러진 칼날 번뜩이는 기슭, 사내 몇, 머리 위 헌 배를 뒤집어쓰고 떨어져 나간 사지는 잊은 채 검게 돌아오고 있다. 흐르는 피조차 없는 길을 씩씩하게 걸어 나온다. 풀숲 빈 둥지의 쥐새끼들이 도망치고 따스한 햇살은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것, 자꾸 무너지는 꿈의 바깥이 얼음 그대로 땅에 박힌다.

가지런히 머리를 뉘이면 찬란해 날 선 꿈인들 왜 없었으랴, 더운 가슴은 습지를 빚어 밥풀 꽃망울인들 터뜨리지 못했을까? 오로라, 빛은 열이 없어 머리에 헌 배를 인 채 사내 몇,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잠에 든다. 억세고 두터운 잠결, 허한 날 북풍은 끝없이 맨 살갗을 저며 대지만 뜨거운 이름이여, 어디서 포근한 몸 누이는가?

부르는 이름마다 다 춥더라.
---「떠오르는 배」중에서

혜안(慧眼)을 쓰고
해안이라 읽는다

애인이라 소리 내지 못하고
영원을 적는다

발밑 새를 검게 옮겨
모서리 벽에 박아버린다

먼지가 점령한 거리
나는 어느 별의 먼지인가?

서걱대는 분절(分節)의 구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멀다

통화를 하거나
연신 침을 뱉거나
하얀 마스크로 가린 눈빛

갑자기 부은 목이 메는
나는 어느 죽은 별의 먼지였나?

행복(幸福)을 쓰고
항복이라 읽는다
---「항복」중에서

문 번호를 잊어 흐린 하늘이나 살피니 오, 멀다. 눈이 오시려나 영혼은 언제 몸에 스미나 아내가 오기까지 한 시간여, 이왕 떨 바야 근린공원 폐지 더미, 던져진 빈병처럼 웅크리리라. 식당 제육볶음과 소주 한 병을 사 밤의 빈 공원을 독차지했다. 개도 얼씬 않는데, 대저 사람 말이란 자기 밖을 찌르기 마련 밤은 절로 깊고 꿈은 천리를 다녀왔나. 어깨는 멀쩡하고 머리만 잔뜩 젖었다. 내리는 눈에 대가리를 디밀고 다리는 안쪽으로 당겨 천벌(天罰) 받는 자세로 졸았다. 오, 멀다. 언제쯤 맑아질 수 있을까. 핸드폰은 희미하게 울었고 소주는 반병 넘어 비었다. 공원 밖 길에서만 훤히 보이는 정자 아예 드러누워 몸을 숨기는데 덜 젖은 옷이 머리보다 가벼워 거뜬히 가라앉는다. 집 밖의 집을 찾았다.

---「행려」중에서

출판사 리뷰

백인덕은 시력(詩歷) 30년 동안 균질적으로, 슬럼프 없이, 자신만의 언어와 사유와 의제를 꾸준히 축적해왔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는 흐릿한 세상을 어둑하고 깊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자신만의 음화(陰?)를 구성해간다. 물론 세상의 표면적 흐름에 대해 분노하거나 감동하는 일은 백인덕의 몫이 아니다. 다만 그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직접적 경험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시로 하여금 한 시대의 어두움을 비추는 시대적, 실존적 역상(逆像)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게끔 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그의 시편을 통해 구체적 시공간에서 빚어진 사람살이의 양상을 사실적으로 접하게 되고, 속도전과 폭력성에 의해 밀려난 어떤 경험적 실재들을 어둑한 풍경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결국 이번 시집은 시인 자신과 함께 낡아가는 시간에 대한 절절한 헌사이자, 그 속에서 웅크리며 반짝이는 아릿한 기억을 기록한 섬세한 화폭인 셈이다.

그동안 백인덕의 시는 삶의 심층으로 한껏 내려가 거기서 사물과 내면의 파동을 구성하고 담아내는 데 진력해왔다. 사실 그 어떤 사물이나 현상도 도구적 이성이 서열화하는 합리성과 효율성의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백인덕은 자신의 사유와 감각을 합리성과 효율성에 맹목적으로 복속시키지 않고, 존재 자체를 온전하게 상상하게끔 하는 역리(逆理)의 가능성에 내면 공간을 열어둔다. 그의 시 안에서 많은 사물이나 현상이 결핍과 불모의 상관물로 상정되고는 있지만, 그 아래에는 깊이 웅크린 것들의 투명한 고통과 그것을 통과한 후의 순연한 빛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밤이 따로 있으랴

여기서 죽으면 저기선 꽃을 피우는 법

다시 유월의 붉은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나도

거룩한 밤은 모든 죽음에 붙이는 찬사

살아 이룰 수 없는 꿈
― 「거룩함에 대하여」 전문

생명이란 가벼운 것이라서
꿈이라도 무겁게 꾸자고
밥과 꽃, 칼과 촛대를
늘 머리맡에 두고 잔다

아침 약을
해 저문 뒤 먹고
모아두었던 기침을 풀어
흐린 들창이나 뚫는다

어디든 나서고 싶지만
어디든 가보고 싶지만

생명이란 오래 눌려 배긴 결대로
풀어지고 해지는 것

꿈이란 끝자리 미열에 지나지 않는다
― 「저녁의 이유」 전문

‘거룩함(the sacred)’이란 기본적으로 분리 혹은 배제의 관념이다. 당연히 거룩함은 그렇지 않은 것과 외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에게 떠오르는 것은 “거룩한 밤이 따로 있으랴”라는 의문이다. 그것은 거룩함이 “살아 이룰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인덕은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의 가능성을 모두 품은 존재자의 미완의 꿈을 노래한다. 붉은 유월 장미 같은 생명의 향연조차 어느 한쪽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동시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거룩한 밤도 죽음에 붙이는 찬사일 뿐이 아니겠는가. 나아가 시인은 ‘저녁’이라는 소멸의 시간을 통찰한다. 생명은 가볍고 꿈은 무거워 저녁은 “밥과 꽃, 칼과 촛대”를 모두 허락한다. “아침 약”을 먹거나 “모아두었던 기침”을 풀어놓는 것도 흐린 들창이 젖어드는 저녁때다. 모든 것이 침잠해 제자리로 돌아가는 저녁에 시인은 어디든 나서고 어디든 가보고 싶었지만, 가벼운 줄만 알았던 생명은 오랜 결대로 풀어지거나 해져가고 꿈은 결국 가벼운 열처럼 지나갈 뿐이다. 그러한 역설적 자각으로 꿈에 닿으려던 시인의 바람은 생명의 결대로 또 시간을 견디고 살아가야 하는 이법에 비로소 도달한 것이다. 이러한 자각의 순간이 바로 저녁을 맞은 진짜 이유였던 셈이다.
―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시인의 말

난독(難讀)과 비문(飛文)이 아니어도

하얀 슬픔 같은 밥,

노란 슬픔 같은 시를 만나고 싶었지만

나는 자주 발목이 접혔다.

2020년 11월
백인덕

시인의 산문

아주 오랜 뼈는 제 안에 시간을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 쏟아지는 별빛은 말문을 막지만

당신은 안다,

당신이 느낀 것이 우주의 모든 것, 부스러져 내린 세계임을.

바람은 뒤가 없어,
바라고 바라 어두워져 갈 때 당신은 안다.

내 이름은
당신이 호명하지 않을 때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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